구름의 아들 서효원 선생님 소개

늦깎이 백팩 여행사 서효원 선생님의 여행기를 올립니다. 저는 그분의 글을 대신해서 올리는 겁니다. 일체의 저작관 및 지적재산권은 서효원 선생에게 있습니다.(c)Hyo So 2017-2024


서효원 선생의 여행기 서문

나는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왔다. 온갖 궂은 일을 하다가 1994년 55세때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찰청에 취직하였다. 근무 부서는 범죄피해자 보상국 이었고 직함은 범죄피해자 보상요원 (미국 명: 빅팀 애드버킷) 이었다. 영어가 부족해서 고생하던 나는 집에 오면 영어 실력을 늘리려고 늘 미국 텔레비전을 보았다.

서기 2000년 61세때 미국 텔레비전 교육방송에서 이상한 말을 들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내가 했던 잘못한 일 때문에 후회 하는 것이 아니라 해보지 못한 일 때문에 후회 하게 된다.” 고.

이 말에 충격을 받았고 내가 하고 싶었는데 못해본 일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러 가지 못해본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 이었다. 그러나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감히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떠날 수가 없었다.

61세 인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너무 늙어서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은 위험할 수도 있고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으면 늦게 얻은 직장이나 잘 다니고 집에 죽치고 있는 것이 가장 최선의 길이라고 내 자신을 타일렀다. 그러면서 5년 이라는 세월이 지나가 버렸고 66세로 5년이나 더 늙어 버렸다. 나는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루는 대한항공에 다니는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 제가 대한항공에 오래 열심히 근무한 결과로 아버지가 가시고 싶은 세계 어느 나라던지 왕복 비행기표 한 장을 무료로 만들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전 부 터서 배낭여행을 해보시고 싶다고 말씀 하셨는데 어디로 표를 만들어 드릴까요?”

망설이다가 ‘공짜면 비상도 먹는다.’ 라는 말이 생각 났다. 아들에게 이집트 카이로 왕복 비행기표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기왕이면 좀 먼 곳으로 가고 싶었고 세계의 7대 불가사의를 다는 외우지 못하지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피라미드였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지 카이로는 어떤 곳 인지 위험하지는 안는지 하는 등 아무런 정보도 몰랐다. 카이로에 있는 아무 호스텔이나 가면 젊은 배낭여행 족 들이 와 있을 터이니 그들에게 같이 좀 다니자고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였다.

카이로에 있는 한 호스텔에 예약을 하고 2005년 4 월 12일 66세때 무작정 카이로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으로 해보는 홀로 배낭여행 이었다.

나의 최초의 이 이집트 배낭여행은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한 달간 예정을 하고 떠났는데 단 이틀 밤을 자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단 시동이 걸린 나는 이후 11년 동안 내 나이 77세 가 되도록 죽을 고생을 하면서 세상을 떠 돌게된다.

처음 여행을 했을 때나 마지막 여행을 끝냈을 때도 내 여행에 대해서 책을 만든 다던지 누가 나더러 와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나의 여행 이야기가 신문에 실릴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미주 중앙일보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요청이 왔다. 나는 몇 번을 사양 하다가 인터뷰에 응하기로 하였다.

미주 중앙일보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신문에 실렸던 나의 배낭여행에 대한 특종기사를 참고로 여행기 앞에 싣는다. 여행기는 최근에 한 것 부 터서 시작해서 옛날에 했던 여행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기억이 잘나는 것을 먼저 썼다.


여행기 후문

나는 1939년 5월 12일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나의 고향은 전라남도 광양 이다. 아버지 가 공직자로 목포에서 근무할 때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 나는 달성 서가고 나의 조상은 경상북도 대구 사람이다.

고조 할아버지가 광양으로 귀양을 와서 4대째 광양에서 살았다. 광양에 달성 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집안밖에 없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로부터 3형제의 아들을 두었고 전처에서 나의 누님인 딸 하나를 낳았다. 나는 아들 중 맏이다.

아버지는 경상남도 부산에서 근무하다가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농사일을 하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나는 광양 서 국민학교를 한 학년 월반하여 5년 동안에 졸업했다. 순천 중학교와 순천 고등학교를 졸업 하였다.

나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인 14세때 집을 도망쳤다. 순천을 거쳐서 여수에서 배를 몰래 훔쳐 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 서 대신동에 있는 이스즈 도락구(트럭) 회사에 조수로 취직하였다. 그때는 꼬부라진 쇠막대기를 차 앞에 뚫린 구멍으로 넣고 돌려서 엔진을 걸었다. 체구가 작고 힘이 없는 나는 쇠막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야 했다.

트럭은 적기 기차역으로 가서 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 시멘트 포대를 싣고 저장창고로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트럭에서 포대를 내려서 창고에 쌓는 인부들에게 돈을 주었다. 인부들은 일부러 쇠 갈코리로 포대를 찢었다.

일이 끝나면 운전수는 차를 시멘트 벽돌공장으로 몰고 갔다. 트럭 밑바닥에 수북이 쌓인 시멘트를 팔고 운전수는 나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었다. 이 돈으로 숙식을 해결하였다. 고기는 시장에서 바닥에 내려놓고 아주머니들이 칼로 썰어서 파는 삶은 고래고기를 사먹었다.

그때는 적성감시위원단 물러가라는 데모가 한창이었다. 트럭은 불법 하꼬방 철거작업장에 동원되어 뜯어낸 판자집 나무를 운반하였다. 왼쪽 발을 대못에 찔렸다. 발이 고래만큼 크게 부었다. 트럭회사 앞의 국수 집 아줌마는 된장을 헝겊에 싸서 나의 발에 처매주었다. 돈을 벌지 못하는 나는 하는 수없이 지팡이를 짚고4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는 퇴학처리가 되어있었다.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사정하여 나는 다시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순천까지 가는 버스 비를 주지 않았다. 두 시간 동안 걷기가 싫어서 학교를 가지 않고 산에서 놀다가 집에 가서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에이 비 시 도 제대로 몰랐다.

어머니는 나에게 대학교 보내줄 돈이 없으니 공군사관학교 시험을 보라고 하였다. 떨어졌다. 나는 대구의 공군 공작창 책임자로 있는 오촌당숙 서창석 공군 대령 집으로 보내졌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묵으면서 공부하다가 공군사관학교 시험을 보면 혹시 삼촌 백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또 떨어졌다.

나는 공군 졸병으로 군대에 들어갔다. 열 여덟 살 때였다. 대전 공군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공군헌병이 되었다. 나는 바로 이 공군 학교에 배치되었다. 밤에는 보초를 섰고 낮에는 대전 시내순찰을 나갔다. 공군들이 창녀 집을 드나드는 것을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아가씨들이 나를 보고 놀렸다. 당신이 학생이지 무슨 군인이냐 고.

뒤에 김포 제11전투 비행단으로 전속되었다. 밤에는 활주로 경비를 나갔다. 밤 12시면 깨워서 활주로로 내 보냈다. 활주로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엄동설한에 북풍이 몰아쳐도 숨을 곳이 없었다. 몸을 새우처럼 꼬부리고 등을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웅크리고 밤을 새웠다.

낮에는 부대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거나 높은 사람들이 오면 사열 복장을 하고 도열을 나갔다. 동작이 느린 나는 시간 내에 도열복장을 다 못 끝마쳤다. 나를 놓아두고 다른 헌병들은 가 버렸다. 나는 헌병대에서 ‘슬로우 모숀’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고 상관들에게 많이 맞았다.

밤새도록 활주로 보초를 서고 아침에 들어왔는데 유두열 병장이 교통정리를 나가라고 하였다. 나는 침대에 가서 들어 누었다. 유두열 병장이 나를 팼다. 나는 맞받아쳤다. 그의 동료인 병장들에게 맞을까 봐 무서워서 나는 탈영하였다. 붙잡혀서 영창을 살았다.

한상휘 중위는 사고뭉치인 나를 육군 형무소에 보내버리려고 하였다. 헌병 대대장이 반대하여 나는 공군영창에 삼 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영창에서 사공 임수 라는 해군사관학교 도태 생을 만났다. 그에게 공부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었다. 영창에서 나온 후 바로 서울문리 사범대학 야간에 시험을 보았다.

합격 통지서를 들고 헌병대 대장인 박재영 소령을 찾아갔다. 박소령은 사고뭉치인 내가 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하자 감격스러워 했다. 그는 영어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미군헌병대에 배치시켜서 아침 8시부터 저녁 4시까지 일하게 하였다. 매일 밤 나를 외출시켜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나는 공군에 있으면서 1년간 학교에 다녔다. 나는 군복무 3년을 마치고 제대 하였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에서 온갖 일을 하면서 서울문리사범대학교 2년제 야간대학을 졸업하였다. 중학교 영어 정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나는 한번도 선생을 해보지 안았다.

몸이 약해진 나는 1년을 쉬었다가 낙원동에 있는 건국대학교 야간대학 영문과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2년뒤 졸업하였고 영문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로서는 한국 최첨단이라는 훼어챠일드 미국 반도체 조립회사에 취직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회사에 시찰 왔다. 나는 5년 동안의 야간대학교 공부와 자기 학대로 몸이 많이 상했다. 너무 말라서 목욕탕에 가는 것도 부끄러웠다. 우리회사 여공들은 ‘기사님은 바람이 불면 날라 가시겠네요.’ 하면서 나를 놀렸다.

27세에 24세인 지금의 나의 처와 결혼하였다. 처는 내가 다녔던 서울문리사범대학교 1년 후배다. 돈이 없어서 추가 등록 때 학비를 내러 갔다가 등록금 창구에서 만났다. 우리는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항상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다. 미지의 세계로 가면 지금보다 살기 좋은 곳이 있을 것 같았다. 40세에미국으로 이민 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화장실 청소 사무실청소 페인트 일을 했다. 롱 비치에서 마켓도 했다. 보험도 팔아보았고 집도 팔아보았다.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 에서 4 년 공부하였다. 부동산부로커 시험에 합격 하였다. 나는 집 파는데 소질이 없었다. 세금 보고서 등 융자받기 위한 서류를 가짜로 만들기가 싫었다.

55세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찰청 범죄피해자 보상 국에 취직하였다. 20년을 일하고 75세에 은퇴하였다.

환갑 때 이상한 두 개의 말을 접하게 된다. 첫째는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했던 일 때문에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못해본 일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이다. 두 번째는 ‘사람이 늙으면 집에 가만히 있어도 죽고 여행을 다녀도 죽는다.’ 이다.

후회하면서 집에서 가만히 앉아서 죽기가 싫어서 66세 때 처음으로 혼자서 배낭을 메고 이집트의 카이로를 향해서 떠났다. 그리고 수많은 나라를 혼자서 다녔다. 나는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 것일 까.

여행할 때 나는 무섭고 고생도 많이 한다. 병도 앓는다. 많이 걷고 길도 잃는다. 골치도 아프다. 그래도 나는 여행이 좋다. 이유 없이 가슴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100% 모르는 곳 100%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와 서면 멀고먼 바다 한 가운데 혼자 돛단배를 타고 있는듯한 가분이 든다.

배낭 메고 혼자서 하는 여행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완전 스포츠다. 몸 머리 감정 오관 등 나의 모든 기능을 동원하여 살아 남아야 한다. 둘 이나 셋 이서 하는 여행은 재미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다. 배낭여행의 묘미는 타인 즉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혼자서 여행을 해야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현지인이나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나라에서 온 형형색색의 인간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다.

어느 곳에 가던지 그곳의 재래시장에 가보는 것이 좋다.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는 모두 각각 다르게 생겼다고 한다. 사람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생김새가 어떠하던 어느 곳에 살던 인간의 속성은 다 같다. 사람은 똑 같은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고 같은 고뇌와 인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은 나만이 잘 생겼고 나만이 예쁘고 내가 잘났고 내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든다. 새벽 세 시에 아무도 없는 모르는 곳에 버스가 나를 내려놓고 떠나버리면 나는 망연자실해 진다.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우리는 항상 남을 살펴보고 또 자기를 뒤돌아 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항상 자기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 살던지 다 어디론가 분주히 가고 있다. 나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걷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세상을 살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 까. 돈일 까 권세일 까 명예일 까. 물론 이런 것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이세상을 살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시간밖에 없다.

하느님은 공평하셔서 착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인의 머리 위에도 햇빛을 쪼이고 걸인의 발아래도 비를 내린다. 그러나 시간만큼은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일년밖에 시간을 안 주고 혹자에게는 100년이란 세월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하느님의 불공평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 까.

죄의 값은 죽음이요 지옥이라고 했다. 어른들이 죄를 짓지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을 까. 어린애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문제는 나같이 오래 산 사람들이다. 나는 77세로서 돌이켜 보면 좋은 일 한 것 보다는 나쁜 일 한 것이 훨씬 더 많다.

농부나 광부나 어부는 무엇인가를 생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벼를 수확하거나 고기를 잡거나 금을 캔다. 노래하는 사람이나 서커스 단원들을 사람을 즐겁게 한다. 우리들의 근심 걱정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정치가 들이나 국회의원들은 법도 만들지만 대개는 싸움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돈 들이고 시간 없애고 고생고생 하면서 여행을 하는 것일 까. 여행으로 소속감이나 성취감은 생기지 않는다. 인간의 최고의 가치라는 무욕도 얻을 수 없다.

그래도 여행을 하고 나면 가슴 뿌듯하고 무엇인가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듣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러분도 혼자서 배낭을 메고 모르는 나라로 한번 가 보라는 것이다.

나는 죽을 때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나같이 죄 많이 지은 사람이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회의 하게 된다. 인생이란 그렇게 슬픈 것도 아니고 그렇게 기쁜 것도 아니라는 말이 생각 난다.

여러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