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인생을 배우는 ’77세 청년’
인물 오디세이…환갑에 첫 해외 배낭여행…17년간 70개국 누빈 서효원 씨
“못 해본 일 때문에 후회하지 말자”
마크 트웨인 말에 이끌려 여행 시작
인도여행 후엔 고열 등 죽을 고비
식구들 만류에도 다음 계획에 희열
다른 나라 사람들 사는 모습 궁금
그 속에 있으면 다른 인생 사는 느낌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에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연결 돼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힘들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아마 이 남자라면 그 답을 속 시원히 내줄지도 모르겠다. 이미 고희를 훌쩍 넘기고도 백팩 하나 메고 세계를 누비는 남자, 서효원(77)씨다. 환갑 넘어 시작한 배낭여행 이 어느새 17년째에 이른 그가 지금껏 돌아다닌 나라만도 70개국이 넘는다. 온전히 두 발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오롯이 그 나라를 가슴에 담아 오는 이 강철 사나이는 단지 특별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불가한, 웬만해선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다.
최근 일사병 증세로 병원 신세까지 졌지만 여전히 다음 여행계획으로 들떠 있는 서효원씨를 LA 한인타운 자택에서 만나봤다.
#무모한 도전, 아름다운 도전
이력만 봐도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55세에 LA카운티 검찰청 범죄피해보상국에서 늦깎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2년 전 75세 되던 해 은퇴했다. 1977년 LA로 이민 온 그는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 청소에서 마켓비즈니스, 보험판매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 1994년 한국어 가능한 직원을 뽑는다는 범죄피해보상국의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해 어렵사리 공무원이 됐다. 당시로서는 미국 직장생활도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처음 1년은 전화 받는 것도 겁이 났을 만큼 녹록치 않은 시간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한국어 책보다 LA타임스가 더 편한 ‘미국 사람’이 다 돼버렸다.
그의 범상치 않은 이력은 비단 직업뿐만이 아니다. 젊어서부터 여행과 등산을 즐긴 그는 평생 한 번도 쉽지 않은 미 대륙 횡단을 세 차례나 하고 휘트니 산도 세 번씩이나 오른 등산 마니아다. 그리고 그의 이런 여행과 등산, 일상의 경험들을 소재로 1992년부터 지금까지 틈틈이 본지 ‘독자마당’에 100여 편이 넘는 글을 투고해온 열혈 기고가이기도 하다. 이처럼 독서와 글쓰기를 즐기는 덕분에 그가 해외 배낭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 역시 다분히 문학적이다.
“TV에서 우연히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한 얘기를 듣게 됐죠.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한 일 때문에 후회하는 게 아니라 해보지 못한 일 때문에 후회 하게 된다고요.”
마크 트웨인의 그 한마디에 이끌려 그는 생애 첫 해외 배낭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휴가를 이용, 1년에 한 차례씩 한 달간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고희 청년의 좌충우돌 세계여행기
그가 첫 번째 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이집트. 그가 이집트를 목적지로 잡은 이유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스핑크스를 직접 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스호스텔 하나 달랑 예약하고 떠난 이집트 여행이 녹록했을 리 만무. 공항 환전소에서부터 환전 사기를 당할 뻔한 것을 시작으로 다음날 전문 호객꾼까지 만나 여행경비까지 뜯기고 나서 그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이튿날 아침 짐을 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도전한 아찔한 첫 여행의 경험은 분명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 법도 한데 그는 이듬해 다시 터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5년간은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여행지에 대한 공부도 없이 무작정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러다 차츰 여행 경험과 노하우가 쌓이면서 그의 여행도 보다 꼼꼼해지고 준비도 철저해져갔다.
그러나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한들 17년 여행길이 항상 편했을 리 있겠는가. 한 달 간 떠난 인도여행 후엔 고열, 설사, 결핵 등으로 한 달 간 병원신세를 지며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당연히 아내와 자녀들이 다시는 여행갈 생각도 말라며 만류했지만 병상에 누워서도 다음 여행계획을 세웠다고 하니 이 지독한 여행광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여행은 아무도 못 말리는 병이에요.(웃음) 당연히 집 떠나면 고생이죠. 그러나 지구 반대편 다른 풍경 속,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서 있는 그 자체가 가슴이 벅차고 떨려요. 바로 그 전율을 잊을 수 없어 가족들이 말려도 또 배낭을 꾸리게 되는 거죠.”
이쯤 되면 궁금해지긴 한다. 아무리 배낭여행이라고는 하나 도대체 얼마나 경제적으로 넉넉하기에 1년에 한 달씩이나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는 것인지.
“여행경비는 항공료를 포함해도 대략 2000달러 안팎이에요. 숙박은 하루에 3~10달러 정도하는 유스호스텔에서 자고 음식은 거의 마켓에서 장을 봐 직접 요리해 먹습니다. 점심은 도시락을 싸가지 다녀서 큰 비용이 들지 않아요.”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우다
퇴직 후 그의 여행 행보는 더욱 바빠졌다. 은퇴 후 한 달 뒤인 2013년 6월, 그는 득달같이 짐을 꾸려 모로코, 스페인, 포르투갈 등 3개국을 다녀왔다. 그리고 지난해 1월엔 석 달에 걸쳐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 6개국을, 올해 1월엔 케냐와 탄자니아를 한 달 일정으로 여행했다. 그가 건넨 여행 사진 속 그는 먼 길 떠난 수도승처럼 남루하고 피곤해 보였다. 길 위에 그 무엇이 있어 고행에 다름 아닌 여행을 지속하게 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일까. 여행이 그에게 주는 것은. 그는 답한다. 또 다른 인생이라고.
“우리보다 가난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나라에서도 그들만의 삶의 행복을, 엄연한 질서를 보면서 내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러다보면 타인을 더 존중하고 하루를 더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여행지에서 가장 즐거운 곳이 재래시장이라고 말한다. 사람 사는 풍경 자체가 바로 감동이고 행복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여전히 다음 여행계획을 짜며 하루하루를 설렘 속에 산다. 내년 1월쯤엔 러시아를 거쳐 북유럽 어느 작은 시골길을 걷고 있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여행을 하며 우리가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이라고. 어쩌면 그가 그토록 치열하게 세상을 떠돌며 손에 쥐고 싶은 것은 사람 사는 냄새 가득한 정겨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오늘도 그는 그도 어쩔 수 없는 갈망을 배낭에 가지런히 담아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누가 그를 말리겠는가. 길 위에서 이토록 반짝이며 아름다운 청년을.
<미주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