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February 19, 2024

케냐 나이로비 호스텔 찾아 가는 길

해외 배낭 여행에서 제일 힘 드는 일중의 하나는 공항 이나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묵을 장소를 찾아가는 일이다. 유스호스텔을 애용한다. 값이 저렴하고 각국에서 온 젊은 배낭 족 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돔을 이용한다. 돔 이라고 하는 것은 방 하나에 침대를 여러 개 갖다 놓고 여러 사람이 같이 자는 방을 말한다. 침대는 보통 이층 삼층으로 되어있고 4인실 부 터서 20인실 까지도 있다. 이중에 침대 하나를 얻어서 자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가 따로 자는 방도 있고 혼숙 하는 방도 많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영국의 런던에 도착하였다. 아무리 컴퓨터를 검색해 보았으나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케냐까지 바로 가는 비행기는 없었다. 날이 따뜻한 케냐로 직접 가고 싶었지만 하는 수없이 추운 런던을 거쳐야 했다. 런던에서 3일을 머문 후 다른 회사의 비행기로 갈아타고 케냐를 향해서 떠났다.

나이로비 공항에 내리니 새벽 4시였다. 공항 바로 옆에 있는 음식점에서 눈을 잠 간 붙이려고 하자 새벽인데도 까만 여자 종업원이 와서 음식을 시켜 먹으라고 성화를 부린다. 배가 아직 고프지 아니하여서 음식을 시켜먹을 생각이 없었다. 구석의 빈 의자에 가서 주저 앉았다. 눈을 감았다. 또 이 여자가 와서 음식을 시켜 먹으라고 한다. 아직 시간이 되려면 멀었지만 하는 수 없이 6시에 떠나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갔다.

버스정류소에 흑인 중년 여자가 혼자 있었다. 말을 붙였다. ‘안녕 하세요’를 케냐말로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바리약콕’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외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를 그 나라 말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봉변이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지인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인사가 그 기본 이기 때문이다.

흑인 중년남자가 다가와서 나를 아는 체 한다. 누구냐고 했더니 아까 당신이 타고 온 터키항공 비행기를 자기도 타고 왔다고 말한다. 자기도 나이로비 시내로 가는데 나를 동행해 주겠다는 것이다. 백 년 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흑인 중년여자의 도움을 받아서 나이로비 시내에 가려고 마음 먹었었으나 흑인 중년남자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다 찌그러진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승객들은 나만 동양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지 흑인들이었다.

버스는 사람을 짐짝처럼 많이 태워서 숨쉬기도 어려웠다. 그 흑인 중년남자 에게 버스 비 라고 말하는 금액의 동전을 주었다.

시내버스는 고속도로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이로비 국제공항의 뒷동네를 통해서 갔다. 길은 포장이 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덩이가 군데군데 파져 있었다. 몸이 공중에 떴다가 가라앉을 때마다 어이쿠 어이쿠 하고 소리를 질러야만 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이로비의 뒷동네의 아침은 가관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검은 사람들이 먼지가 뽀얗게 이는 흙 길을 분주히 오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상 땅을 파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무엇인가 팔고 있었다.

버스가 얼마를 가다가 아주 서버린다. 손님들더러 내리라고 한다. 흑인 중년남자 에게 시내에 다 온 것 이냐고 물었더니 버스를 갈아 타야 한다고 말하였다. 흑인 중년남자는 다시 나에게 버스 비를 달라고 하였다. 아까 시내까지의 요금이라고 하는 금액을 주었는데 또 달라고 하여서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주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로 갔으면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시내를 3시간이나 걸려서 왔다.

버스 종점은 시내 중심에 있었다. 때는 이미 12시가 넘어서 배가 고팠다. 가로수 밑 그늘에 앉아서 비행기 에서 준 밥을 안 먹고 아껴서 가지고 온 것을 먹기 시작했다. 배낭과 끌고 다니는 가방을 모두 열어놓 속의 내용물들이 다 보이도록 진열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서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훔쳐 보고 있었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케냐타 병원 앞에서 내렸다. 예약한 호스텔은 마툼바토 길의 하우스 33번 이었다. 배낭을 메고 끌고 가는 가방은 끌고 가면서 모르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아니 하여서 끌고 가는 가방이 몹시 덜컥거렸다.

가게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하우스 33번지를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보았다. 배 짝 마른 흑인 중년남자가 똑바로 가다가 왼쪽으로 꼬부라져서 조금만 더 가면 나온다고 하였다.  조금 가다가 어떤 청년이 골목에서 나오길래 주소를 보여주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청년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왼쪽으로 나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고 하였다. 되돌아서 걷기 시작하였다.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지 아까 길을 가르쳐 주었던 흑인 중년남자가 뛰어왔다. 내 앞을 가로막고는 똑 바로 가라고 하였다.

길을 물으면 사람들 마다 다르게 가르쳐 준다. 어떤 사람은 이리 가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저리 가라고 말한다. 한 시간 넘게 해매 다가 간신히 하우스 33번을 찾았다. 대문에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문을 두드리니 사람이 나왔다. 말하기를 호스텔은 이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여기는 없다고 하였다. 나는 울었다.

이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승용차 한대가 왔다. 불법 택시다. 1200 케냐 쉴링을 내면 호스텔이 이사간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주고 불법 택시를 탔다. 조금 가더니 나더러 차에서 내리라고 한다. 다른 여행객이 또 그 호스텔에 찾아왔으니 태우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차를 불러서 나를 인계하겠다고 하였다.

당신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했더니 명함을 주면서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새 차가 왔다. 헌 불법택시기사는 새 불법택시 기사에게 돈을 주면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였다. 새 차를 타고 새 운전수와 함께 다시 먼 길을 떠났다.

새 불법택시는 상당시간 달렸다. 호스텔은 참으로 먼 곳으로도 이사를 갔구나 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한 시간 이나 걸려서 우리는 이사간 호스텔에 도착 하였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아마존에서 혈육의 정글을 엿보다

다음날 어제 걸었던 길을 반대방향으로 걸어보았다. 커다란 천막을 연결시켜서 만든 좌우가 터진 노천 시장이 있었다. 아마존 강에서 잡은 생선을 팔고 있었다. 고래만한 크기의 메기와 붕어를 합해 놓은 것 같은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이 삐라루꾸 라고 하였다. 길이가 1미터이고 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는다고 하였다. 배를 갈라서 벌여놓고 소금을 뿌려서 말리고 있었다.

과일가게에는 먹을만한 과일을 버린 것이 많았다. 주어서 먹고 있는데 개가 와서 내 앞에 섰다. 과일을 조금 떼어 주었다. 잘 받아 먹었다. 안심하고 개의 머리를 만졌다. 개가 소리를 지르더니 나를 물었다.

옆구리를 물렸는데 상처는 없고 개의 이빨 자국만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개에게 여러 번 물렸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상처받기 마련이다. 가지고 다니는 설사약을 먹었다. 설사약에는 항생제 성분이 들어있다.

배 타러 가는 날 나는 슈퍼마켓에서 물과 먹을 것을 잔뜩 샀다. 택시를 탔다. 대합실에 도착해보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배에다 짐을 싣고 있었다. 배의 밑 부분은 빈 공간이었고 거기에 화물을 싣고 있었다. 배는 화물선과 여객선을 겸하고 있었다.

승객들은 현지인이 대부분 이었다. 살색이 검은 혼혈 들이었다.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늙은 사람도 나 혼자였다. 중등학교 학생 정도의 여자아이가 부모와 같이 대합실에 있었다. 비록 검으나 참으로 예쁘게 생겼다

내 방에서 나오면 바로 갑판이었다. 해먹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갑판의 가운데 부분은 침실 화장실 샤워실 세면대 와 식수대 가 있었다. 이 구조물을 빙 둘러서 갑판이 360도로 되어있었다. 서양남녀 두 쌍이 해먹을 치고 있었다.

갑판 밑의 지하실에는 식당이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방송으로 알려주었다. 아침에는 빵과 커피가 공짜로 나왔다. 점심과 저녁은 사먹어야 했다. 갑판 위는 옥상이었다. 지붕이 없고 사방이 툭 터져있었다. 밤이면 올라가 별을 구경했다.

아마존 강은 바다였다. 물색이 누렇다 뿐이지 하나의 바다였다. 유속이 빨라서 배는 강의 오른쪽으로 붙어서 갔다. 강변에는 열대림이 우거져 있었고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였다.

강가의 군데군데 집이 있었다. 한 채씩 떨어져 있었는데 나무로 엮은 집이었다. 지붕은 야자수 잎사귀로 덮었는데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여객선이 멀리서 보이면 사람들이 카누를 타고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애기를 하나나 둘 태우고 나왔다.

배의 손님들이 물건을 비닐봉지에 싸서 물위로 던졌다. 봉지 속에는 옷이나 신발이나 장난감 또는 생필품을 넣는다고 하였다. 여자가 카누를 힘껏 저어서 봉지를 집어 올렸다. 유속이 빨라 저러다가 물에 빠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 되었다. 며칠을 가면서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보았지만 물에 빠지는 사람은 없었다.

장사꾼이 여객선 위로 올라왔다. 쾌속 모터보트가 배 옆으로 다가오더니 밧줄을 던졌다. 밧줄 끝에는 갈쿠리가 달려 있었다.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보트를 여객선 옆구리에 붙인 다음 밧줄을 타고 올라왔다. 무슨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가지고 올라온 박스를 열자 고래만한 고기들이 입을 쩍쩍 벌리고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 고기를 샀다. 저녁거리 인 것이다. 다음 항구에서 내릴 손님들도 고기를 샀다. 배는 도중에 있는 항구에 들렸다 갔다. 낮 시간에 닿는 항구도 있었고 밤에 서는 부두도 있었다. 내리고 타는 사람들이나 부두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 열심히 살고 있었다.

큰 항구에서는 배가 수 시간씩 머 물었다. 사람들이 내려서 나도 내렸다. 새우 복음을 사먹고 남아서 배로 가지고 왔다. 소금을 뿌려 짜게 만들어서 마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한 개씩 꺼내 먹었다.

항구에는 강가에 있는 음식점도 있었다. 이상한 것을 보았다. 시간이 되자 음식점 주인이 물고기가 든 상자를 들고 물가로 갔다. 물고기를 물속으로 던졌다. 분홍고래가 와서 고기를 받아 먹었다.

이 돌고래들은 원래 흰색인데 몸 속의 핏줄 때문에 분홍색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이름이 보또라고 했다. 달이 밝은 밤이면 미남으로 변해서 처녀들을 유혹하여 물속으로 끌고 들어 간다고 하였다.

벨렘 에서 마나우스 로 가는 도중에 있는 가장 큰 항구는 산타렘 이었다. 산타렘은 아마존 강의 붉은 물과 타파호 강의 검은 물이 만나는 곳이다. 서로 섞이지 아니하고 수 십 킬로미터를 나란히 흘러간다. 유속과 온도가 달라서 물이 섞이지 안는다. 길고 거대한 짐승 두 마리가 서로 몸을 기대고 흘러가는 것 같았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비가 자주 왔다. 비가 오지 않는 날밤 에는 옥상에 올라가 하늘의 별을 보았다. 한국에서는 북두칠성을 호주 에서는 남십자성을 보았지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두 성좌를 동시에 볼 수 있을지는 몰랐다.

이 날밤은 구름 한 점 없었다. 별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있었다. 하늘 북쪽을 보았더니 그 끝에 북두칠성이 있었다. 남쪽을 보았더니 하늘 끝에 남십자성이 보였다. 배는 적도를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5박 6일을 가다 보니 자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서로 알게 된 사람들도 있게 되었다. 어떤 젊은 어머니와 알게 되었다. 4, 5세쯤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나를 무척 따랐다. 이 아이 에게 이과수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인형을 주었다. 검으나 아름다운 여자아이 에게도 주었다.

배는 밤에 마나우스 항구로 진입하였다. 멀리서 보이던 불빛이 윤곽을 들어 내기 시작 했다. 밤에 보는 항구의 불빛은 아름다웠다. 항구에 도착하자 자정이 되었다. 손님들은 다 내렸지만 나는 내리지 아니 하였다. 밤에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사정을 말했더니 배에서 자도 좋다고 했다.

아침이 되었다. 밖으로 나갔더니 검으나 아름다운 소녀의 식구들도 갑판에서 자고 일어나서 짐을 싸고 있었다. 검으나 아름다운 소녀가 나를 보더니 급히 일어나서 배 모퉁이를 돌아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소녀는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비닐보따리를 들고 배를 내렸다. 부두 밖으로 나갔더니 딴 세상이었다.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길거리에는 손수레 음식점이 많이 있었다. 이름 모를 여러 가지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시내버스를 탔다. 아이스크림 집 앞에서 내렸다. 어렵지 않게 호스텔을 찾았다. 돔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층 침대로 20명이 잘 수 있는 방이었다. 침대마다 모기장이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모기에 안 물린 곳이 없었다.

이튿날 왔던 길을 되짚어서 걸어갔다. 내렸던 항구를 다시 보고 싶었다. 항구의 물은 검은 색이었다. 마나우스를 흐르는 강의 이름은 네그루 강 이라고 하였다. 네그루는 검 다는 뜻이다. 수 만년 동안 강 밑에 쌓인 나무 색갈이 검게 변해서 물에 석인 결과라고 하였다.

부두 바로 앞에 있는 백화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노천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마나우스 극장에도 가 보았다. 분홍색의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호스텔의 옆에 조그만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을 따라서 형성된 기다란 공원이 있었다. 낮에는 텅텅 비어있다가 밤이 되니 수십 개의 아마추어 축구팀들이 시합을 하였다.

하루는 네그루 강을 따라서 위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큰 다리를 하나 건넜다. 아름다운 넓은 강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상 가옥도 있었다. 수상 음식점도 있었다. 나무에는 검은 독수리 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큰길 아래로 경사진 언덕이 끝나는 곳에 작은 길이 보였다. 이상한 것을 보았다. 젊은 남자 아이 두 명이 검은 지갑을 손에 들고 이리 뒤져보고 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한 아이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다른 아이가 지갑을 빼앗아서 뒤져보았다.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빨리 돌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비행기를 타고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왔다. 그전의 호스텔을 찾아갔다. 종업원이 컴퓨터를 눌러보더니 예약이 안되어 있다고 했다. 빈 침대도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챙겨 두었던 영수증을 보여 주었다. 종업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인은 자기네 호스텔이 근방에 또 하나 있으니 그리로 가라고 하였다. 기분이 안 좋았지만 그리로 갔다. 가보고는 기분이 풀어졌다. 전 호스텔보다 규모가 크고 각국의 손님들도 더 많이 있었다. 아침식사도 더 훌륭하였다. 한국인 배낭여행 청년도 한 사람 만났다.

이 호스텔은 바로 산 밑에 있었다. 산은 나무 한 점 없는 바위산 이었다. 산의 중턱에 기둥이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이 기둥들은 바위가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놓은 것이었다. 무서웠다.

한 달간의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마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아프리카에서 한국 여인을 안아보다

아프리카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기가 쉽지 안았다. 딱 한 명 한국 사람을 만났다. 아루샤 에서 35 세 된 송혜숙 (가명) 이라는 여자를 만난 것이다. 그 여자는 스위스 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같은 대학교 학생 6명과 현장 답사를 왔다고 했다.

해외 배낭여행을 하다 보면 한국 사람은 만나기가 귀하기 때문에 호스텔 종업원 이나 다른 배낭 족 들이 호스텔에 묵는 다른 한국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 역시 호스텔에서 만난 알빈 이라는 학생이 미리 이야기 해 주었다. 그 여자의 사생활 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별거 하고 있었다.

여행 할 때 동양 여자 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늙은이를 무시하는 한국 젊은 여자들의 정서를 알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 거리에서 멕시칸 아가씨에게 예쁘다 라고 말하면 환하게 웃으면서 고맙다 라고 대답한다. 한국 아가씨에게 같은 말을 했다가 혼났다. ‘할아버지 지금 뭐 라고 그러 셨어요. 할아버지가 지금 몇 살인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면서 눈을 모로 뜨고 흘겨 보았다.

그 여자가 나 에게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내일은 일요일 이니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달라 달라 미니버스를 두 번 바꾸어 타고 그 여자가 한번 가본적이 있는 시골교회로 갔다. 개신교회 인데도 예배절차가 가톨릭 성당과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가대에 백인 여자가 흑인들 속에서 탄자니아 말로 같이 노래를 불렀다.

루터란 대학교 에도 갔다. 학생들이 민속음악과 춤을 선 보이고 있었다. 몇 명의 백인 남녀 학생들이 원주민인 흑인 학생들과 섞여서 같이 노래하고 춤 추고 있었다

돌아 올 때는 칼레비 라고 하는 필란드의 중년의 신사가 버스 정거장까지 짚 차로 태워다 주었다. 필란드 에는 3000개의 호수가 있다고 하였다. 여름이 되면 호수 가에 여자들이 일광욕을 즐긴다고 하였다. 옷을 모두 벗고 일광욕을 한다고 하였다. 해를 볼 수 있을 때 최대한으로 햇빛을 받는다고 했다. 여름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면서 이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송 여사 에게 물어 보았다.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과 천국을 어떻게 철석같이 믿는 것이냐 고. 그 여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고 어느 순간 매를 맞은 것처럼 온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것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나이로비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막 호스텔을 나갈 참 이었다. 송 여사가 눈을 비비고 나왔다. 작별인사를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식으로 서로 안는 인사를 하였다. 송여사가 옛날 한국 여자들이 하듯이 겸손의 몸짓으로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 여자 에게 말 하였다. 남편을 사랑 하시고 남편에게 사랑 받으세요 라고. 내가 괜한 말을 하지 않았나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영생을 생각하다

혼자서 배낭을 메고 외국을 여행해본 것은 이집트가 처음이었다. 2005년이었고 내 나이 66세였다. 환갑을 훨씬 지난 나이에 외국을 혼자서 여행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강도를 당할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둘째 아들이 그 당시 대한항공에 일하고 있었다. 어디 외국에 여행 가고 싶은 데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대한항공에 일한지가 오래되어서 가족 중 한 사람의 비행기 왕복표를 외국의 어느 나라던지 무료로 만들어 줄 수가 있다고 했다.

이집트를 택하였다. 7대 불가사의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피라미드를 보고 싶었다. 이집트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어떻게 배낭여행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현지 호스텔에 가면 젊은 배낭여행객들이 와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물어 보거나 같이 좀 다니자고 하면 되지 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였다.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가기 전에 카이로에 있는 한 호스텔에 3일밤을 예약을 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에서 비행기를 타고 두바이를 거쳐서 카이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환전소로 갔다. 한 중년남자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미화 100달러 한 장을 건 냈다. 이집트 돈을 수도 없이 많이 주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창이 있었고 밑으로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내가 받은 돈을 유리창 앞의 진열대에 좍 펴놓았다.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 장 한 장 세었다. 큰돈 한 장이 모자랐다. 환전 원을 쳐다보았다. 그는 씩 웃더니 큰돈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당신은 부자다.’ 라고 말했다.

대합실로 나왔다. 한 그룹의 한국 단체관광객들이 나왔다. 한국가이드 에게 카이로 시내까지만 버스에 같이 좀 타고 갈 수 없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가이드 말이 공항서 부 터는 현지가이드가 책임지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대합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한 중년남자가 팻말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유리창을 통해서 보였다. 팻말에는 카이로 시내 10불이라고 적혀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택시기사라고 하였다.

택시 승강장으로 갔더니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아랍 식 복장을 한 기사들도 많이 있었다. 택시에 오르려고 하자 경찰이 다가와서 여권을 보자고 하였다.

경찰은 자기 공책에 나의 모든 인적 사항을 적었다. 택시기사에게 운전면허를 달라고 하여 적었다. 택시의 번호판도 적었다.

오다가 기사가 말하였다. 경찰은 나의 안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적은 것이라고. 어찌해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택시기사가 가는 도중에 공범을 하나 더 태운 다음 사막으로 데리고 가서 짐을 뺐고 옷을 벗긴 다음 손님은 사막에 남겨두고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카이로는 공해가 심했다. 건물들과 회교사원들은 우중충한 회색이었다. 도중에 경찰이 차를 세우고 검문검색을 하였다. 기사가 오른 편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가르치면서 대통령 궁 이리고 했다. 공해가 심하니 가난한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다 같이 더러운 공기를 마실 수 밖에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가다가 기사가 왼쪽을 가르치면서 저기가 공동묘지인데 100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호스텔의 건너 편에는 맥도날드 햄버거 집이 있었다. 프론트에는 젊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숙박계를 쓰는데 이 아이가 뭐라고 하면서 나를 툭 치는 것이었다. 수속을 다 마치고 배낭을 들려고 하자 이 아이가 볼펜을 하나 주었다. 윗도리 주머니를 보았더니 있어야 할 볼펜이 없었다.

돔 방으로 안내되었다. 침대가 여덟 개 있었는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자전용 돔 방에는 여자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여자는 중년여자였고 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처녀는 페르시아 공주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통이 넓은 분홍빛 비단바지에 자주색 저고리를 받쳐입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랍국가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아가씨에게 같이 좀 다니자고 말해 볼까 하였으나 입이 떨어지지 아니 하였다.

아직도 이른 아침이라 이집트 박물관을 찾아갔다. 어떤 곳에 택시들이 많이 있었고 기사들도 있었다. 한 기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박물관에 가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박물관은 아침9시 까지만 개인 입장객을 받고 그 다음 부 터는 단체 입장객만 받는다고 했다. 구경꾼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그 사람 말을 믿지 아니하고 계속 걸었다. 길 건너 편에 커다란 주황색 건물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저것이 박물관 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거리에 경찰관 두 사람이 있어서 저것이 박물관 이냐고 물어 보았다. 이 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손을 홰홰 저었다.

양복을 입은 신사가 지나가서 물어 보았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차들은 무섭게 길 양쪽으로 전 속력으로 달렸다. 사람들은 차들 사이사이를 곡예사처럼 길을 건너갔다.

나도 한번 건너볼까 하고 시도해 보다가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 때 한 현지청년이 지나 가면서 저 앞의 그림가게로 들어가면 지하도가 있어서 건너갈 수가 있다고 했다. 반신반의 하면서 가게로 들어갔더니 지하도 같은 것은 보이지 아니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얼른 돌아서 나와 버렸다.

아까 그 청년이 되돌아 왔다. 길을 건너가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아침 9시까지만 개인 입장객을 받는다고 하면서 택시기사와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밤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인데 집이 마침 피라미드 부근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택시는 요금이 비싸니 버스를 타고 가자고 했다. 나는 망설였지만 그 청년이 거짓말 할 사람 같이 보이지 아니하여서 그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그의 이름은 ‘알리’ 라고 했다.

버스요금은 두 사람 것을 합해보아야 1000원도 안되었다. 얼마 가지 아니하여 길거리에 내렸다. 차는 손님이 원하는 어느 곳에서나 세워 주었다. 알리는 나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골목으로 들어갔다. 검은 옷을 입은 아낙네들이 먼지가 이는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같이 놀고 있었다.

알리는 계속 말을 하면서 나를 안심 시켰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 오늘 나를 안내해주면 사례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알리는 ‘돈이 뭐 그리 중요하냐’ 하면서 나를 안심 시켰다. 나는 참 친절한 이집트 청년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알리는 나에게 병물 도 사주었다.

조금 더 가니 낙타들이 앉아 있었다. 알리가 “피라미드에 갈려면 낙타를 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낙타주인을 잘 아니까 싸게 해줄 테니 낙타를 타고 피라미드에 가자.” 고 하였다. 낙타 사무실로 들어갔다. 주인은 흰 아랍 식 옷을 입고 터번을 쓰고 있었다. 실제가격은 얼마인데 많이 깍 아 주겠다고 말했다.

낙타주인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참 용감한 사람이다. 카이로에서 관광객이 많이 죽는다고 신문에 났을 텐데 어떻게 혼자서 여기까지 왔느냐?” 고 하는 것이었다.

구경꾼은 나 혼자인데 네 개의 생명체가 나를 호위하였다. 알리 와 몰이꾼 한 사람 말 한 필과 낙타 한 마리였다. 낙타 등에 올라타자 낙타가 일어섰다. 동작이 어찌나 큰지 낙타에서 떨어질 번 했다. 몰이꾼이 나를 부축하였다.

나는 낙타를 타고 갔고 알리 와 몰이꾼은 걸어서 갔다. 낙타의 걸음은 느리고 폭이 컸다. 내 몸이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얼마 가지 안아서 배가 아파서 더 이상 낙타를 타고 갈수가 없었다. 몰이꾼이 낙타를 세웠다 그리고 나를 말로 옮겨 태웠다.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말이나 낙타를 타고 신이 나게 달린다. 나는 그것이 사실인지 의심하지 안을 수 없었다.

인가 끊어지고 모래사장이 나왔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이었다. 햇볕은 사정없이 내려 쪼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모래가 나의 얼굴을 때렸다.

나는 모자라도 쓰고 있었지만 알리 와 몰이꾼은 모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햇볕이나 바람을 무서워하지 안았다. 이들은 그 이글거리는 태양에 자기들 몸을 내 맡기고 있었다. 몰이꾼이 말을 빨리 몰아서 나를 즐겁고 무섭게 만들었다. 거대한 피라미드 가 장관을 들어내고 있었다.

낙타사무실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알리는 낙타 사무실 옆에 있는 향수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나 꽃에서 채취한 향수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 나는 늙었기 때문에 향수를 줄 사람이 없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주인은 끈질기게 향수를 사라고 권하였다.

알리는 나일강으로 가서 놀자고 하였다. 그 다음에 기차정거장으로 가서 왕들의 계곡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자고 했다. 기차표는 밤에만 판다고 하면서 지금 가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도 만나보고 자기 식구들도 만나보자고 했다. 이집트인 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였기 때문에 나는 알리 의 말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택시를 탔다. 알리 가 말했다. 여동생이 다음주 결혼하는데 잔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양주와 양담배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양주와 양담배를 좋아한다고 했다. 면세점에 들려서 양주와 양담배를 사달라고 했다. 돈은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출국할 때 지장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알리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가는 도중에 알리는 한 젊은 동양청년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에 한글로 한국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알리는 이 청년도 자기가 구경 시켜 주었는데 양주와 양담배를 사 주었고 자기집에도 갔었다고 하였다

면세점 안으로 들어갔다. 알리는 주인과 싸우는 것처럼 이야기 했다. 양주와 양담배를 사주어도 출국 시 지장이 없겠느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괜찮다고 하였다. 주인은 양주 두 병과 양담배 두 보루를 꺼냈다. 서류를 작성 하더니 나더러 싸인 하라고 하였다. 여권에 물품도장을 쾅쾅 찍었다.

알리는 양주와 양담배를 가게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밖에는 뚱뚱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리는 양주와 양담배를 이 사람에게 주었다. 무엇인가 받아서 자기 주머니 속에 넣었다. 우리는 다른 택시에 올랐다. 나일강으로 간다고 하였다.

왜 술과 담배를 안 가지고 가느냐 고 알리 에게 물어보았다. 알리는 지금 돈이 없어서 물건을 맡겨 두었다가 후에 집에 가서 돈을 가지고 와서 찾아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일강에 도착하였다. 알리는 면세점까지의 택시비와 여기까지 온 택시요금을 달라고 하였다. 달라는 대로 주고 나는 더 이상의 현찰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신용카드 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돈이 있는 줄을 알면 다 쓰게 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변은 시멘트 벽으로 처리가 되어있었다. 강물은 저만치 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배가 한 척 있었고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알리는 음식을 시키고 술도 시켰다. 한 사람이 배에서 내려서 뛰어갔다. 조 금후에 맥주 네 병과 생선 튀김이 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강물은 넓고 유속이 느렸다. 커다란 호수를 항해 하는 것 같았다. 붉은 연꽃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강 가운데 커다란 섬이 있었다. 이 섬에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부자들이 사는 게지 섬이라고 하였다.

술과 음식을 먹었다. 사공은 음악을 틀었다. 알리 와 나는 노래 부르고 춤 추었다. 사공은 우리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었다. 사공이 돈을 달라고 하면 나는 면 모르는 일이라고 고 말하라고 하였다. 자기에게 이야기 하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돈을 알리가 내겠다는 뜻인가 하고 잘못 생각하였다.

강변에 닫자 알리가 나더러 미화 300달러를 달라고 하였다. 나는 아까 너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지 안았느냐고 했다. 알리는 나를 은행으로 데리고 갔다. 은행은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알리는 나를 금전 자동 출납 기로 데리고 갔다. 돈을 뽑으라고 했다.

금전 출납 기의 화면의 글자가 너무 작았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두 개의 글자가 동시에 찍혔다.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때 순찰 돌던 경관 두 명이 와서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말했다. 순경에게 말해 보았자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리 에게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내일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서 주겠다고 말했다. 알리는 밤에 여는 은행이 있으니 가보자고 했다. 그 은행도 문이 닫혀있었다. 알리는 한 그림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림가게 주인은 돈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밤은 깊었다. 지친 나는 바지안쪽 비밀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서 주어버릴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알리 와 사공이 내 몸에 거액의 돈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냥 보내 줄 지가 의심스러웠다.

알리가 택시를 잡았다. 사공도 택시에 탔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이대로 끌려 다니는 것이 나은지 반항해 보거나 탈출을 시도해 보는 것이 옳은지 생각에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알리 가 나를 이렇게 끌고 다니는 것은 내 몸에 현찰이 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해치려고 하겠는가 라고..

한참을 가다가 어디선가 섰다. 낯익은 곳이었다. 아침에 낙타를 탔던 곳이었다. 밤이 되어서 태양도 지고 서늘해 졌다.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아랍 식 복장을 한 노인들이 죽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알리는 향수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낙타 주인에게 내 신용카드로 300불을 뽑아달라고 했다. 60불의 커미션을 주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돈을 받고 나서 손가락으로 알리를 가르치면서 ‘아는 사람이냐?’ 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이 대답했다. “알리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다.”

알리 에게 이제 셈이 다 끝났으니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알리가 택시를 잡았다. 사공은 돈을 다 받았는데도 또 같이 택시를 탔다. 세 사람이 탄 택시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집트에 고속도로가 있는 줄 미쳐 몰랐다.

택시는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달렸다. 호스텔로 가는 줄 알았는데 택시가 한 시간 이상을 달렸다. 알리 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다. 알리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나의 운명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한참을 더 가다가 차가 고속도로에서 내렸다. 맨 흙의 넓은 광장이 있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백열등을 수백 개켜놓고 수레에 물건들을 가뜩 싣고 팔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였다. 먼지가 뽀얗게 일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야시장이었다.

알리는 또 돈을 달라고 하였다. 아까 받은 돈 중에서 저를 주고도 우수리 돈이 나에게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머니의 돈을 털어서 다 주었다. 알리 가 택시를 잡았다. 운전수에게 얼마인지 모를 돈을 주었다. 나더러 택시를 타라고 하였다. 나는 알리 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다. 알리는 자기는 자기집에 다 왔으니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나의 볼에다 대고 뽀뽀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친구여 고맙다. 잘 가시오.”라고.

방에는 오늘밤에도 아무도 없었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써 여덟 시였다. 프론트로 갔다. 허둥대는 것을 본 어제의 그 청년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홉 시 가 지나면 박물관에 못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가 그러 드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박물관에는 돈만 내면 아무 때나 들어갈 수가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인산인해였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많이 보였다. 피라미드 속에는 죽은 왕이 저승에서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만들어 넣어두었다. 이 물건들을 꺼내서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커다란 배도 있었고 여자들이 아이 낳을 적에 사용하는 의자도 있었다. 이집트 여자들은 엉거주춤 서서 애기를 낳았다.

동물의 미이라도 수없이 많이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더니 어떤 것은 가짜 미이라 임이 판명되었다. 모양만 동물이지 나무 가지 등 거짓물건을 속에 넣고 미이라를 만든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기꾼은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그것도 감히 정부를 상대로 해서.

왕들의 미이라도 있었다. 투탕카멘 의 금으로 만든 가면은 인상적이었다. 왕의 미이라의 가슴에는 금으로 만든 풍뎅이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풍뎅이는 소 똥을 동그랗게 뭉친 다음 그 안에 알을 하나 낳고 죽는다. 알은 소 똥을 먹고 자란 다음 성충이 되어 밖으로 나온다. 죽은 풍뎅이 옆에 새로운 풍뎅이가 있으니 이집트 사람들은 풍뎅이가 부활 한 것으로 믿었다. 왕이여 부활 하소서.

나는 이집트에 정이 떨어 졌고 무서워 졌다. 호스텔 청년에게 부탁하여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청년은 택시비를 먼저 달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택시가 왔다. 청년이 택시기사에게 직접 돈을 주었다. 그라고 기사에게 공항까지 나를 태워다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한국남자가 한 사람 있었다.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분은 중국사람이었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답답한 심정을 한국여자 승무원에게 털어 놓을 수가 있었다. 한 달로 예정하고 떠났던 나의 최초의 해외 배낭여행은 이틀 만에 끝나고 말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돌아왔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케냐 나이로비 공원에서 낮잠자기

아루샤에서 달라 달라 미니버스를 타고 5시간에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승객은 현지인들 이었고 나 혼자만 외국인 이었다. 정거장에 내리자 사람들이 벌떼 같이 달려 들었다. 택시를 타고 가자느니 싸고 좋은 호텔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손님잡이 들이었다.

이들이 잡아주는 택시를 타면 돈을 더 주어야 한다. 손님을 데려다 주고 택시기사로부터 팁을 받기 때문이다. ‘아바리 약콕? (안녕 하세요?)’ ‘앗살람 알라이쿰 (회교 인사)을 연발 하였다. 이들은 나를 놓아 주었다.

근처의 공원으로 갔다. 남은 양고기 싸온 것을 먹기 시작 했다. 가방 과 배낭을 풀어 해치고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하면서 속을 다 보여 주었다. 돈 될 만한 것은 없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은 안 보는 척 하면서도 나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보고 있었다.

잔디 위에 누웠다. 배낭은 머리에 베고 가방은 두 다리를 올려 놓았다. 잘 때는 몸의 어딘가에 물건이 닿도록 해야 했다. 누가 가방을 건드리는 바람에 눈을 떴다. 애가 공을 가지고 놀다가 부딪친 것이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길거리로 나섰다. 호스텔로 가자면 택시를 타야 했다. 택시는 위험하다. 운전수 외에 사람이 타고 있는 택시는 타지 말아야 한다. 도중에 운전수가 사람을 태우면 차에서 내려야 한다.

1200 케냐 쉴링에 흥정을 끝내고 택시에 올랐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나이로비 호스텔 여자 직원의 충고

호스텔은 세인트 헬렌 컨테이너스 니야시 라는 긴 이름의 길에 있었다. 카렌 과 갤러리아 사이만 왔다 갔다 하는 란카나 라는 이름의 마타투 미니버스 가 있었다. 호스텔 여자직원이 한번 타는데 20 쉴링 이 라고 가르쳐 주었다. 카렌 과 갤러리아 에 여러 번 갔다. 수퍼마켓 도 있고 돈 바꾸는 데 도 있고 음식 도 살수가 있었다.

버스를 탈 때 마다 여직원이 가르쳐 준 대로 20쉴링씩만 주었다. 어떤 조수는 10쉴링 을 더 달라고 하였다. 돈을 더 주기를 거절 하였다. 이 말을 여직원 에게 하였더니 돈 을 더 줄 필요가 없다고 재차 말하였다. 계속해서 싸워 가면서 까지도 20쉴링 만 주었다. 그래도 불상사는 없었다.

마사이 마라 사파리 갈 때 이 일이 생각나서 운전수 인 앙리 옥쿡 에게 물어 보았다. 그리고 놀랬다. 하루 중의 시간대에 따라서 요금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덧붙이기를 내가 만약 젊은 사람 이었으면 나를 차에서 끌어 내렸을 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이 버스를 타면 무조건 30쉴링씩 주었다.

버스는 손을 들면 아무데서나 손님을 태웠고 늘 만원이었다. 갤러리아 에 가서 술 과 먹을 것을 사가지고 버스를 탔다. 비닐봉지 하나가 거의 찰 정도였다. 봉지를 발 밑에 내려 놓았는데 이리 저리 움직였다.

옆에는 검은 늙은 할머니 가 타고 있었다. 할머니가 내 비닐 봉지를 집어 올리더니 자기 무릎 위 에 올려 놓았다. 봉지에서 먹을 것을 꺼내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할머니가 봉지의 끈을 꼭꼭 묶는다. 물건이 쏟아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봉지를 나의 무릎 위에 올려 놓는다. 봉지를 내 무릎에 대고 두 손으로 꼭꼭 누른다. 다시는 내려놓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를 쳐다 보고는 씩 웃는다.

카렌에 갔을 때다. 슈퍼마켓 에 가서 맥주 한 병 과 먹을 것을 샀다. 파킹 장 주변에 있는 상점의 계단에 가서 앉았다. 셔터 가 내려져 있었고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그늘이 좋았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술도 마셨다. 젊은 애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양 할아버지가 신기했던지 계속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가 먹고 있는 맥주병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이것을 보았는지 중년 남자가 와서 애들을 쫓아버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 주었다.

묵는 호스텔은 카렌 이라고 하는 부촌에 있었다. 나이로비 시내로 나가려면 차를 두 번 타야 했다. 란카나 미니버스를 타고 갤러리아 까지 갔다가 길을 건너서 마타투 라고 하는 미니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나이로비의 시내버스는 나이로비 기차역에 모인다. 시내의 중심이고 버스 종점이기 때문이었다.

호스텔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시내에서 멀리 있어서 주변 환경이 깨끗하고 공기가 시내보다 훨씬 맑았다. 호스텔에는 큰 정원이 있었고 커다란 나무들도 심어져 있었다. 큰 나무 두 그루 사이로 해 먹이 매어져 있어서 앉아서 놀기도 하고 낮잠도 잘 수 있었다.

호스텔 여주인은 상당한 인텔리였다. 케냐 정부기관 에서 근무 하였다고 하였다. 호스텔은 자기 것이 아니고 세 내어서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상재가 있는 여자였다. 정부에 일할 때 공무로 한국에 가본적이 있다고 하였다.

놀란 것은 한국이 옛날에는 케냐보다 더 가난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의 오른팔을 공중으로 치켜 올리면서 붕 하고 소리를 냈다. 그렇게 한국의 경제가 떠 버렸다는 것이었다.

호스텔에는 스꾸비 라는 이름의 개가 있었다. 수놈인데 환관 수술을 받았다. 상당히 큰 개였다. 오라고 해도 오지도 않고 슬슬 피하였다. 친해지려고 계속 노력 하였다. 개하고 친해지는 방법은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최고다.

밥 먹을 때 주인 몰래 고기를 조금씩 주었다. 친해졌다. 밥 먹으러 가서 테이블에 앉으면 스꾸비가 어느 틈에 나타났다. 자기의 턱을 나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마사이 마라 야생동물 국립공원에 갔다가 삼 일만에 돌아 왔는데도 잊지 않고 반가워 하였다. 꼬리를 흔들고 펄쩍 펄쩍 뛰었다.

방에는 침대가 여섯 개가 있었다. 이스라엘 청년 둘이 하루 밤을 자고 떠났다. 케냐산으로 간다고 했다. 케냐에는 세계 등산 인들이 즐겨 찾는 높은 명산들이 많이 있었다. 케냐산의 높이는 5000미터로 2800미터의 백두산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루는 불란서 청년이 들어왔다. 걱정이 태산이다. 케냐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밟는데 이민국 직원이 입국을 거절 하였다고 하였다. 여권의 만료 기한이 6개월이 채 안된 다는 것 이었다. 어느 나라를 가던지 여권의 유효기간은 최소한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청년은 불란서 여권유효기간은 10년 인데 여권을 작년에 발급 받았다고 하였다. 자기는 케냐에 올 때까지 여권의 만기일에 신경도 쓰지 안았고 쳐다 보지도 안았다고 하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 까.

청년은 8년전에 여권을 만들었다. 배낭여행을 하도 많이 다녀서 입국도장을 찍을 공간이 여권에 남아있지 안았다. 자기나라 외무부에 가서 말 했더니 새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고 하였다. 문제는 새 여권의 만기일이 구 여권의 만기일과 같았던 것이었다.

청년은 불란서 대사관에 가서 여권을 고치는 조건으로 입국을 허가 받았다고 했다. 저녁에 만났는데 풀이 죽어 있었다. 대사관이 만기일을 고쳐 주거나 연기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남미 3개국의 국경마을에서 세상을 보다

브라질 과 파라과이 그리고 아르헨티나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곳에도 갔다. 시내 버스를 타고 기사에게 뜨리 보더스 마크 에 간다고 말하면 된다. 40분쯤 가다가 길가에 내려주었다. 여기서 30분쯤 걸어가니 마크가 나왔다. 세 나라의 국경은 강 가운데서 만나고 있었다.

이집트에 있는 오벨리스크 같은 첨탑이 세워져 있었다. 별로 크지도 않았고 높지도 아니 하였다.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브라질 세 나라가 합의하여 이 탑을 만들었다. 브라질 국기의 상징인 노랑색과 파랑 색이 위 아래로 칠해져 있었다. 주변을 조그만 공원처럼 꾸며 놓았다. 식당 겸 기념품 파는 가게가 있었다. 건물은 2층으로 옥상에 올라가서 강을 볼 수도 있었다.

걸어서 버스 타는 곳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농가가 하나 있었다. 오리도 있고 닭도 키웠다. 집 앞에 개들이 여러 마리 있었다. 나를 보고 꼬리를 쳤다. 거기 앉아서 싸가지고 간 점심을 먹었다. 음식을 개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개들하고 한 시간 놀다가 헤어져서 왔다.

비행기를 타고 벨렘 으로 갔다. 상 파울로 에 들려서 손님들을 내리고 타게 한 다음 다시 떠났다. 벨렘은 브라질의 동북쪽에 있는 도시다. 벨렘은 베들레헴 이라는 뜻이다. 아마존 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곳에 있다. 아마존 강이 그 많은 양의 물을 쏟아내는 곳이다.

공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갔다. 주소를 차장에게 보여 주었다. 한참을 달려서 시내의 어느 곳에 나를 내려주었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 중에서 제일 힘 드는 부분은 택시를 타지 않고 호스텔을 찾아가는 일이다. 날은 덥고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길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주소를 보여주고 호스텔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이 길로 위로 올라가다가 큰길을 만나면 거기서 좌 회전을 하라고 하였다. 길을 돌아서 얼마 안가니 호스텔이 나왔다. 이렇게 쉽게 호스텔을 찾아 본 것은 처음 이었다.

호스텔은 아침밥을 안 주었다. 호스텔 부근에 음식점이 많이 있었다. 데스크 에서 일하는 젊은이 에게 마나우스 가는 배를 어디서 타느냐고 물어 보았다. 자기도 잘 모르니 바닷가로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아마존 강을 여행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나우스 에서 아마존 강을 흘러내려 가는 것 이다. 유속을 따라 가기 때문에 배가 빨라 3박 4일 이면 벨렘에 도착한다. 이때는 배가 강의 중앙으로 가기 때문에 강가밀림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베렘 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 것이다. 물살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배가 강가로 붙어서 간다. 마나우스 에 도착하려면 5박 6일이 걸리지만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마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버스를 타고 벨렘 항구의 맨 끝까지 갔다. 해군기지가 있었다. 거기서 부 터 죽 걸어서 역행으로 내려 오면서 선창이 있는 곳 마다 들어가 마나우스 가는 배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점심때가 되도록 걷고 물었다. 마나우스가는 배는 여러 척이 있었고 출발 날짜와 떠나는 장소가 배에 따라서 달랐다. 배는 선창에 정박해 있어서 구경 할 수가 있었다.

출처: https://twistedsifter.com/2012/05/famous-tripoints-around-the-world/

조금 더 걸었더니 선창이 나왔다. 배에는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배의 갑판 위에 주렁주렁 해먹을 매달아 놓고 있었다. 커다란 화물선이었고 배는 낡아 보였다. 이 배는가는 도중에 산타렘 에서 하루 자고 배를 바꾸어 타야 한다고 했다. 직접 가는 배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더 위로 올라 가보라고 하였다.

한참을 걸었더니 건물이 있는 선창이 나왔다. 여객선 부두였다. 마나우스로 가는 제일 좋은 배가 여기서 떠난다고 있었다 쓰여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여객선이 정박해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찾았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배는 모래 떠난다. 매표소는 문을 닫고 있었다. 중년 남자가 손에 수첩을 들고 다가왔다. 배표를 판다는 것이었다. 뱃삯은 벽에 크게 붙어 있었다. 남자에게 표를 사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가짜 매표상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복을 입고 제모를 착용한 순찰요원이 있었다. 이 사람에게 표를 사도 괜찮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괜찮다고 하였다.

표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저렴 한 것으로 갑판위에 해먹을 치고 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독침실이다. 70 노구에 해먹을 치고 자면 허리도 아플 것이고 떨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가 열대 지방 이라고는 하지만 밤에는 쌀쌀하다. 5박 6일을 가야 한다. 눈 딱 감고 1인용 단독 침실 표를 샀다.

걸어 오다가 길 건너를 보았더니 하얗고 아름답고 깨끗한 성당건물이 보였다. 까떼드랄 데 쎄 즉 ‘깨달음의 성당’ 이라고 하였다.

외국에 일단 도착해서 여장을 풀면 반드시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서 한쪽 손에 들고 걸었다. 현지 사람이 무엇을 사가지고 집에 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내가 들고 다니는 봉지 속에는 물 한 병과 술 한 병과 점심이 들어있다. 더워서 윗도리를 벗어서 봉지 속에 넣고 걸었다.

어느 곳에 하얀 개 한 마리가 강아지 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접근 해서 개를 달래고 강아지 한 마리를 들어 올렸다. 강아지는 냄새가 좋다. 강아지를 데리고 한참 놀다가 내려놓고 일어섰다. 옆에 두었던 비닐봉지가 없어졌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누가 가져갔느냐고 물어 보았다. 다들 모른다고 했다. 봉지의 와이샤쓰 주머니 속에 돈이 들어 있었다.

한참을 안가고 앉아서 주변을 살폈다. 한 남자가 비닐봉지를 나무 뒤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무 뒤로 가서 비닐봉지를 가지고 왔다. 술병이 없어졌다. 돈은 그대로 있었다. 이 사람은 술병만 보았지 종이 속의 돈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 기쁜 표정도 짓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브라질 파라과이 이타이푸댐에 서다

좀 걸었더니 동네가 나왔다. 사람들이 나를 보더니 자기들끼리 수근거린다. 어떤 아이 엄마가 반색을 하면서 내게로 왔다. 자기 집에 가서 차를 한잔 하자고 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나더러 영화 가라데 키드에 나오는 팻 모리따라는 배우가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이 말을 외국여행 때 하도 많이 들어서 이골이 난 터이지만 파라과이 이역 땅에서 이 말을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이타이푸 구경은 못했지만 즐거운 하루였다.

다음날 우정의 다리를 걸어 건너서 브라질로 갔다. 다리 바로 직전에 파라과이 이민사무실이 있었다. 들어가서 파라과이에 왔었다는 도장을 찍어 달라고 하였더니 안 된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고 하였더니 미국여권은 파라과이 도착 전에 파라과이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 여권을 보니 비자도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파라과이 비자도장이 없으니 입국했었다는 도장도 찍어 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다리 밑을 내려다 보았더니 저 깊은 곳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은 푸르고 깊었다. 다리는 길었고 중간 중간에 오목하게 파진 곳이 있어서 쉬어갈 수 있었다. 사가지고 온 닭 모가지순대와 럼주를 푸른 물을 바라보며 취하도록 먹었다.

다리를 건너가 브라질 이민국 사무실에서 입국수속을 마쳤다. 시내버스를 타고 미리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갔다. 어떤 손님이 나더러 버스를 잘못 탓 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조수가 괜찮다고 하였다. 자기가 내려 주는 데서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고 하였다.

버스를 내렸는데 한적한 곳이었다. 조금 가니 남자노인 두 사람이 가게 앞에 앉아서 술을 먹고 있었다. 종이를 꺼내 들고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가는 길은 길 가운데 중앙선에 잔디를 심어놓고 큰 나무들도 있었다. 차들이 별로 다니지 않았다. 잔디 위로 올라가서 걸었다.

할머니 한 분이 집 앞에 있었다. 종이를 꺼내 들고 물어 보았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힘들고 걷기도 싫어졌다. 여기서 좀 자자고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다. 조금 더 가니 승용차 한대가 지나았다. 손을 들었더니 섰다. 젊은 청년이 타고 있었다. 길을 물었더니 차를 타라고 하였다.

차가 골목길로 들어서니 호스텔이 나왔다. 돔 방의 바닥은 나무 판자였고 신발을 벗고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단층침대였다. 많은 서양 젊은이들이 와 있었다. 동양 사람은 나 뿐이었고 노인도 나 혼자였다.

내가 왔던 길에서 반대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큰길이 나오고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버스는 다른 데서 출발해서 오는데 손을 들면 태워주었다. 포스이과수의 모든 시내버스는 어디서 출발하던지 모두 종합 터미널로 모인다. 여기서 자기가 가는 곳의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아주 편리한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스텔에 짊을 풀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이타이푸 발전소에 갔다. 입장 표는 공원에서 팔았고 대형버스로 사람을 싣고 발전소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원을 따라다녀야 했다. 댐 밖의 경치도 구경 시켜주었고 발전소 안의 설비와 발전소 운전통제소도 보여주었다. 통제서는 안으로 들어 갈 수는 없고 대형 유리를 통해서 밖에서 구경하였다.

브라질과 파라과이 양국이 발전소에 대한 권한을 반반씩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발전소의 모든 시설은 두 나라가 같이 운영 하는데 시간을 반반으로 나누어서 한다고 하였다.

구경이 끝나니 차에 태우고 댐의 중간에 있는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국경이 닿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렸지만 국경선을 넘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이과수 폭포에 갔다. 정문을 들어가면 입장객들은 공원버스를 타고 폭포로 가야 한다. 한참을 달려서 폭포 앞에 내려놓았다. 판자 길을 따라가면 폭포 밑에 다다르게 된다. 가까운 곳에서 폭포를 올려다 보게 되어 있었다. 규모가 대 단 하여서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더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폭포구경을 마치고 위로 올라가니 음식점도 있었고 폭포를 같은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었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브라질 이과수 폭포에서 흠뻑 젖다

다음날은 주 폭포를 향해서 걸어갔다. 하늘에서 오색 빛 찬란한색종이 들이 쏟아져 내렸다. 색종이를 뿌리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색종이인가 하고 자세히 보았더니 형형색색의 나비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나비들은 처음 보았다. 나비들이 나에게 와서 내려 앉는다. 머리 위에 앉고 팔에도 앉고 옷에도 앉는다. 털어버릴까 하다가 가만히 있었다.

주 폭포 가까이 가자 화장실이 나왔다. 화장실 주변의 땅은 온통 꽃밭이었다. 화장실에 무슨 꽃인가 싶어서 잘 보았더니 나비들이었다.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땅바닥에 내려와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도 도망을 안 간다. 나비들이 땅에서 철분이나 소금 같은 영양소를 섭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 폭포 바로 옆에 구경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물이 가까워서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첨언 하고 싶은 것은 이 폭포 입장 하는 곳 에서 멀지 안은 곳에 새 공원이 있었다. 900마리 이상의 새가 있고 종류도 150 가지가 넘었다. 뱀도 있고 도마뱀도 있고 악어도 있었다. 나비들을 기르는 커다란 철망으로 된 나비전시관도 있었다. 부리 큰 새가 내 팔에 와서 앉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 폭포 구경을 마치고 버스로 파라과이의 시우다드델에스테 라는 도시로 갔다. 이 도시는 브라질의 포스도이과수 라는 도시와 바로 연결되어있었다. 그 사이에 파라나 강 이 흐르고 그 강 위로 우정의 다리가 놓여있었다. 시우다드델에스테는 파라과이 에서 아순시온 다음으로 큰 도시다. 인구 35만이다. 이 도시에 간 목적은 이타이푸 댐과 국제시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과수 폭포 시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르헨티나 국경을 지나갈 때 손님들로 하여금 출국수속을 밟게 했다. 브라질은 경유만 하기 때문에 입국 수속이 필요 없었다. 브라질에서 우정의 다리를 지나서 파라과이로 들어갈 때도 입국수속을 밟지 아니 하였고 버스는 정거조차 하지 않았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서 목적했던 여관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부근의 어떤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호스텔은 다행히 근처에 있었다. 이 집에서는 밥은 안 주었지만 정수된 식수를 항상 냉장고에 넣어두고 공짜로 먹게 하였다.

가까운 곳에 재래시장이 있었고 그 안에 음식점도 많이 있었다. 음식 중에는 우리나라 순대처럼 닭 모가지를 비우고 그 속에 닭 내장을 다져서 양념에 버물러 넣고 찐 닭 모가지 순대가 있었다. 독주하고 같이 먹으니 맛이 일품이었다.

여장을 풀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국제시장으로 걸어서 갔다. 가는 도중에 이상한 것을 보았다. 중국의 공자공원이 있는 것이었다. 어떤 연유로 중국에서 먼 이곳에 공자공원이 있단 말인 가.

파라과이는 바다가 없다. 세계의 대부분의 모든 나라들은 자국의 항구를 통해서 수출품을 내 보내는데 파라과이는 항구가 없다. 따라서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국경이 닿아있는 시우다드델에스테를 수출창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전자제품 의류 등 모든 제품을 무관세로 들여와서 역시 무관세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팔고 있었다. 이 두 나라 사람들이 여기 와서 물건을 차떼기로 사갔다.

국제시장에서 가장 큰 백화점은 이름이 차이나 백화점이었다. 백화점 안에 들어가 보니 없는 것이 없었다. 전자제품이 가장 많았다. 제복을 입은 예쁜 현지 아가씨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 하였다. 국제시장의 상권은 중국사람들이 쥐고 있었다.

이타이푸 발전소를 보러 갔다. 발전소는 브라질과 파라과이 국경을 이루는 파라나 강을 막아서 만들었다. 댐의 크기 저수량 발전량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였다. 1975년에 짓기 시작하여 10년 걸려 완공 하였다. 원자력 발전소 10개가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양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생산되는 전기는 파라과이 총 전기수요의 78% 브라질 총 수요의 26%를 충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타이푸 라는 이름은 발전소를 짓기 전에 강 가운데 섬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이 이타이푸였다. 지금은 물속에 잠겨서 없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발전소 직원들이 파업을 하고 있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옆에 있는 숲 속에 들어가 잤다.

취침이 끝난 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나 부자는 있게 마련이다.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 들어 갈려고 하였으나 입구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커다란 저택이 있었다. 경비원이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정을 말하고 경치가 아름다우니 좀 들어가 볼 수 없겠느냐고 청을 넣었다. 경비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호수로 갔더니 이것은 호수가 아니라 큰 강이 내륙으로 쑥 들어와 있는 곳이었다.

여자아이가 조그만 배를 타고 노를 젓고 있었다. 손짓으로 내게로 오라고 했다. 설마 했는데 이 여자아이가 진짜로 내게로 왔다. 좀 타보자고 했더니 배를 강가로 댔다. 한참을 어린 소녀와 놀았다. 인간도처 유 청산이라.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브라질 구세주 그리스도상 만나

2011년 72세의 나이로 1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 한 달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를 혼자서 배낭여행 하였다.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는 이과수 폭포와 아마존 강 이었다.

비행기로 로스앤젤레에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 하였다. 브라질은 쏘련 캐나다 미국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나라다. 리우데자네이루는 인구 700만으로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예약한 호스텔은 이파네마 해변에 있었다. 공항에서 직행버스가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갔는데 쉽게 호스텔을 찾았다. 방에는 침대가 3층으로 되어 있었고 6개가 있었다. 18명이 잘 수 있는 방이다. 이런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같은 방에서 에콰도르 에서 온 18세된 소년을 만났다. 데이빗 이라고 하였다. 내 침대는 일층이었고 소년의 것은 내 위의 삼층이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소년과 같이 버스를 타고 구세주 그리스도 상을 보러 갔다. 버스는 산 밑 까지만 가고 거기서 전용 미니버스를 타고 그리스도 상까지 올라갔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나도 예수처럼 팔을 쩍 벌리고 사진을 찍었다. 소년이 사진을 찍어서 후일 이 메일로 보내 주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리우데자네이루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세계삼대 미항 중의 하나로 손색이 없었다. 아래에 아름다운 로드리고 데 프레이타스호수가 보였다. 호수 주변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서 걷기가 좋다.

호수를 걸었더니 조정학교가 나왔다. 카누처럼 생긴 배를 사람이 뒤를 보고 앉아서 노 두 개를 젓는다. 배를 육지에서도 탈 수가 있다. 연습용 조정을 시멘트 바닥에 고정시켜 놓고 뙤약볕 아래서 노 젓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이파네마 해변과 코파카바나 해변은 연결되어 있다. 산 옆에 있는 것이 이파네마 해변이고 더 위로 올라가면서 코파카바나 해변이 된다. 바닷가의 모래는 곱고 아름답다. 물이 빠지니 모래가 거울처럼 변해서 산 모습이 환히 비쳤다.

일요일 시내를 걸어보았다. 성당이 문을 열었다.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성당 안에 꽉 차 있었다. 과학 전시관 에서 비행기 조종석을 만들어 놓고 아이들을 태워 주고 있었다.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어서 아이들이 그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콰도르 소년과 설탕 덩어리 라는 뜻의 슈거로프산에 갔다. 커다란 딸기처럼 생겼으며 리우데자네이루의 어디서라도 보인다. 걸어서도 정상에 올라 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 밤에 올라가면 아름다운 리우데자네이루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과수 폭포와 아마존 강 구경을 마친 다음에 다시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므로 3일밤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직원은 컴퓨터에 예약사실을 입력할 터이니 염려 말라고 하였다. 나는 영수증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보관해 두었다.

버스를 타고 상 파울로 갔다. 430킬로미로 6시간 걸렸다. 상 파울로는 인구 1200만으로 브라질에서 제일 큰 도시다. 전철을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갔다. 전철이 발달되어 있어서 어디든지 갈 수가 있었다.

호스텔에서 하루 밤을 자고 아침에 전천을 타고 시내 중심가로 갔다.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큰 건물 나오고 그 안에 재래시장이 있었다. 없는 것이 없었는데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과일 가게였다. 여러 가지 과일들을 한 개씩 한 개씩 쌓아 올려서 피라미드를 만들어 놓았다.

차이나 타운에 가 보았다. 큰길 옆에 조그만 광장이 있었다. 기념품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동양여자가 불고기를 구어서 팔고 있었는데 한국여자였다. 남편은 브라질 사람이었다.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중국의 길거리처럼 요란하게 꾸며 놓고 있었다.

호스텔에는 종류와 이름은 모르지만 하얀 개가 한 마리 있었다. 털이 짧고 중간크기에 귀가 쫑긋 하였다. 나는 주로 개와 놀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디 있다가도 불이 낳게 달려왔다.

상 파울로 에서 밤 버스로 포스도이과수에 갔다. 1100 킬로미터이고 13시간 걸렸다. 종점이 아닌 길거리에 나를 내려놓고 갔다. 운전수에게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라는 도시로 갈 것이니 버스 타는 가까운 곳에 내려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새벽 세시여서 추었다. 배도 고팠다. 상점이나 집들은 다 문이 닫혀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 까. 어떻게 해야 할 까. 그저 떨고 서있을 수만은 없어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이과수 폭포는 두 장소에서 보아야 만 한다. 아르헨티나 에서도 보아야 하고 브라질 에서도 보아야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폭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과수 폭포를 아르헨티나 쪽에서 먼저 보기로 결정을 해 둔 터였다.

날이 밝았다.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한다. 물어서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 시로 가는 버스정거장으로 갔다. 설명서에 보면 거리는 30 킬로미터 이고 한 시간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미니버스가 왔다. 어디서 탔는지 이미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요금을 지불했더니 무슨 전표를 하나 주었다. 버스가 아르헨티나 국경초소에 섰다. 내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입국수속을 마치고 서둘러 나왔다. 버스가 없다. 나를 두고 버스가 가버린 것이었다.

지나가는 승용차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나서 버스가 한대 왔다. 손을 들었더니 섰다. 돈을 줄려고 하였더니 아까 받았던 전표를 달라고 하였다.

버스 종점에서 내렸다.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 시에 온 것이다. 호스텔을 예약을 하지 않고 왔다. 그러나 어느 호스텔로 가야 할지는 설명서를 보고 미리 마음속에 정해 두었던 터였다.

호스텔을 정할 때 몇 가지 사항을 살핀다. 첫 번째는 가격 이다. 두 번째는 이 호스텔에 묵었던 사람들의 평가다. 다음에는 아침을 주는지 부엌이 있는지 위치가 편리한 곳에 있는지 하는 것을 따진다. 그러나100% 마음에 드는 호스텔은 찾기가 쉽지 아니하였다.

정류장에서 나와서 얼마 가지 아니해 호스텔 간판이 보였다. 들어갔다. 깨끗하고 정원도 있었다. 묵을 방을 가보았더니 시멘트 바닥에 단층 침대가 죽 놓여 있었다. 이만하면 되었고 또 피곤 했으므로 그냥 주저 앉았다. 이 호스텔에 3일 머 물었다.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고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갔다. 입장료를 아르헨티나 돈으로만 받았다. 아르헨티나 돈이 없다고 했더니 옆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가면 돈을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가게에 갔더니 돈을 그냥 환전해 줄 수는 없고 무엇이던지 기념품을 하나 사야만 거스름돈 형식으로 돈을 바꾸어 줄 수가 있다고 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 인형을 몇 개 샀다. 아르헨티나 쪽에서 폭포를 이틀 동안이나 보았다. 입장료도 두 번이나 냈다.

아르헨티나 쪽 폭포는 주 폭포로 가기 전에 작은 폭포들이 여러 개 있었다. 이 폭포들도 주 폭포에 비해서 작다는 것뿐 이지 상당히 큰 편이었고 아름다웠다. 첫날은 이 작은 폭포들만 보고 돌아왔다. 특이 한 것은 이 폭포수 물속에 새들이 살고 있었다. 제비처럼 생긴 새들 이었는데 폭포 물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폭포수가 쏟아지는 뒤쪽의 빈 공간의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적들로 부 터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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