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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과수 폭포에서 흠뻑 젖다

다음날은 주 폭포를 향해서 걸어갔다. 하늘에서 오색 빛 찬란한색종이 들이 쏟아져 내렸다. 색종이를 뿌리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색종이인가 하고 자세히 보았더니 형형색색의 나비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나비들은 처음 보았다. 나비들이 나에게 와서 내려 앉는다. 머리 위에 앉고 팔에도 앉고 옷에도 앉는다. 털어버릴까 하다가 가만히 있었다.

주 폭포 가까이 가자 화장실이 나왔다. 화장실 주변의 땅은 온통 꽃밭이었다. 화장실에 무슨 꽃인가 싶어서 잘 보았더니 나비들이었다.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땅바닥에 내려와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도 도망을 안 간다. 나비들이 땅에서 철분이나 소금 같은 영양소를 섭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 폭포 바로 옆에 구경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물이 가까워서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첨언 하고 싶은 것은 이 폭포 입장 하는 곳 에서 멀지 안은 곳에 새 공원이 있었다. 900마리 이상의 새가 있고 종류도 150 가지가 넘었다. 뱀도 있고 도마뱀도 있고 악어도 있었다. 나비들을 기르는 커다란 철망으로 된 나비전시관도 있었다. 부리 큰 새가 내 팔에 와서 앉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 폭포 구경을 마치고 버스로 파라과이의 시우다드델에스테 라는 도시로 갔다. 이 도시는 브라질의 포스도이과수 라는 도시와 바로 연결되어있었다. 그 사이에 파라나 강 이 흐르고 그 강 위로 우정의 다리가 놓여있었다. 시우다드델에스테는 파라과이 에서 아순시온 다음으로 큰 도시다. 인구 35만이다. 이 도시에 간 목적은 이타이푸 댐과 국제시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과수 폭포 시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르헨티나 국경을 지나갈 때 손님들로 하여금 출국수속을 밟게 했다. 브라질은 경유만 하기 때문에 입국 수속이 필요 없었다. 브라질에서 우정의 다리를 지나서 파라과이로 들어갈 때도 입국수속을 밟지 아니 하였고 버스는 정거조차 하지 않았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서 목적했던 여관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부근의 어떤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호스텔은 다행히 근처에 있었다. 이 집에서는 밥은 안 주었지만 정수된 식수를 항상 냉장고에 넣어두고 공짜로 먹게 하였다.

가까운 곳에 재래시장이 있었고 그 안에 음식점도 많이 있었다. 음식 중에는 우리나라 순대처럼 닭 모가지를 비우고 그 속에 닭 내장을 다져서 양념에 버물러 넣고 찐 닭 모가지 순대가 있었다. 독주하고 같이 먹으니 맛이 일품이었다.

여장을 풀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국제시장으로 걸어서 갔다. 가는 도중에 이상한 것을 보았다. 중국의 공자공원이 있는 것이었다. 어떤 연유로 중국에서 먼 이곳에 공자공원이 있단 말인 가.

파라과이는 바다가 없다. 세계의 대부분의 모든 나라들은 자국의 항구를 통해서 수출품을 내 보내는데 파라과이는 항구가 없다. 따라서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국경이 닿아있는 시우다드델에스테를 수출창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전자제품 의류 등 모든 제품을 무관세로 들여와서 역시 무관세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팔고 있었다. 이 두 나라 사람들이 여기 와서 물건을 차떼기로 사갔다.

국제시장에서 가장 큰 백화점은 이름이 차이나 백화점이었다. 백화점 안에 들어가 보니 없는 것이 없었다. 전자제품이 가장 많았다. 제복을 입은 예쁜 현지 아가씨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 하였다. 국제시장의 상권은 중국사람들이 쥐고 있었다.

이타이푸 발전소를 보러 갔다. 발전소는 브라질과 파라과이 국경을 이루는 파라나 강을 막아서 만들었다. 댐의 크기 저수량 발전량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였다. 1975년에 짓기 시작하여 10년 걸려 완공 하였다. 원자력 발전소 10개가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양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생산되는 전기는 파라과이 총 전기수요의 78% 브라질 총 수요의 26%를 충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타이푸 라는 이름은 발전소를 짓기 전에 강 가운데 섬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이 이타이푸였다. 지금은 물속에 잠겨서 없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발전소 직원들이 파업을 하고 있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옆에 있는 숲 속에 들어가 잤다.

취침이 끝난 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나 부자는 있게 마련이다.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 들어 갈려고 하였으나 입구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커다란 저택이 있었다. 경비원이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정을 말하고 경치가 아름다우니 좀 들어가 볼 수 없겠느냐고 청을 넣었다. 경비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호수로 갔더니 이것은 호수가 아니라 큰 강이 내륙으로 쑥 들어와 있는 곳이었다.

여자아이가 조그만 배를 타고 노를 젓고 있었다. 손짓으로 내게로 오라고 했다. 설마 했는데 이 여자아이가 진짜로 내게로 왔다. 좀 타보자고 했더니 배를 강가로 댔다. 한참을 어린 소녀와 놀았다. 인간도처 유 청산이라.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브라질 구세주 그리스도상 만나

2011년 72세의 나이로 1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 한 달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를 혼자서 배낭여행 하였다.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는 이과수 폭포와 아마존 강 이었다.

비행기로 로스앤젤레에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 하였다. 브라질은 쏘련 캐나다 미국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나라다. 리우데자네이루는 인구 700만으로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예약한 호스텔은 이파네마 해변에 있었다. 공항에서 직행버스가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갔는데 쉽게 호스텔을 찾았다. 방에는 침대가 3층으로 되어 있었고 6개가 있었다. 18명이 잘 수 있는 방이다. 이런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같은 방에서 에콰도르 에서 온 18세된 소년을 만났다. 데이빗 이라고 하였다. 내 침대는 일층이었고 소년의 것은 내 위의 삼층이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소년과 같이 버스를 타고 구세주 그리스도 상을 보러 갔다. 버스는 산 밑 까지만 가고 거기서 전용 미니버스를 타고 그리스도 상까지 올라갔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나도 예수처럼 팔을 쩍 벌리고 사진을 찍었다. 소년이 사진을 찍어서 후일 이 메일로 보내 주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리우데자네이루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세계삼대 미항 중의 하나로 손색이 없었다. 아래에 아름다운 로드리고 데 프레이타스호수가 보였다. 호수 주변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서 걷기가 좋다.

호수를 걸었더니 조정학교가 나왔다. 카누처럼 생긴 배를 사람이 뒤를 보고 앉아서 노 두 개를 젓는다. 배를 육지에서도 탈 수가 있다. 연습용 조정을 시멘트 바닥에 고정시켜 놓고 뙤약볕 아래서 노 젓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이파네마 해변과 코파카바나 해변은 연결되어 있다. 산 옆에 있는 것이 이파네마 해변이고 더 위로 올라가면서 코파카바나 해변이 된다. 바닷가의 모래는 곱고 아름답다. 물이 빠지니 모래가 거울처럼 변해서 산 모습이 환히 비쳤다.

일요일 시내를 걸어보았다. 성당이 문을 열었다.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성당 안에 꽉 차 있었다. 과학 전시관 에서 비행기 조종석을 만들어 놓고 아이들을 태워 주고 있었다.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어서 아이들이 그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콰도르 소년과 설탕 덩어리 라는 뜻의 슈거로프산에 갔다. 커다란 딸기처럼 생겼으며 리우데자네이루의 어디서라도 보인다. 걸어서도 정상에 올라 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 밤에 올라가면 아름다운 리우데자네이루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과수 폭포와 아마존 강 구경을 마친 다음에 다시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므로 3일밤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직원은 컴퓨터에 예약사실을 입력할 터이니 염려 말라고 하였다. 나는 영수증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보관해 두었다.

버스를 타고 상 파울로 갔다. 430킬로미로 6시간 걸렸다. 상 파울로는 인구 1200만으로 브라질에서 제일 큰 도시다. 전철을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갔다. 전철이 발달되어 있어서 어디든지 갈 수가 있었다.

호스텔에서 하루 밤을 자고 아침에 전천을 타고 시내 중심가로 갔다.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큰 건물 나오고 그 안에 재래시장이 있었다. 없는 것이 없었는데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과일 가게였다. 여러 가지 과일들을 한 개씩 한 개씩 쌓아 올려서 피라미드를 만들어 놓았다.

차이나 타운에 가 보았다. 큰길 옆에 조그만 광장이 있었다. 기념품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동양여자가 불고기를 구어서 팔고 있었는데 한국여자였다. 남편은 브라질 사람이었다.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중국의 길거리처럼 요란하게 꾸며 놓고 있었다.

호스텔에는 종류와 이름은 모르지만 하얀 개가 한 마리 있었다. 털이 짧고 중간크기에 귀가 쫑긋 하였다. 나는 주로 개와 놀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디 있다가도 불이 낳게 달려왔다.

상 파울로 에서 밤 버스로 포스도이과수에 갔다. 1100 킬로미터이고 13시간 걸렸다. 종점이 아닌 길거리에 나를 내려놓고 갔다. 운전수에게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라는 도시로 갈 것이니 버스 타는 가까운 곳에 내려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새벽 세시여서 추었다. 배도 고팠다. 상점이나 집들은 다 문이 닫혀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 까. 어떻게 해야 할 까. 그저 떨고 서있을 수만은 없어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이과수 폭포는 두 장소에서 보아야 만 한다. 아르헨티나 에서도 보아야 하고 브라질 에서도 보아야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폭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과수 폭포를 아르헨티나 쪽에서 먼저 보기로 결정을 해 둔 터였다.

날이 밝았다.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한다. 물어서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 시로 가는 버스정거장으로 갔다. 설명서에 보면 거리는 30 킬로미터 이고 한 시간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미니버스가 왔다. 어디서 탔는지 이미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요금을 지불했더니 무슨 전표를 하나 주었다. 버스가 아르헨티나 국경초소에 섰다. 내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입국수속을 마치고 서둘러 나왔다. 버스가 없다. 나를 두고 버스가 가버린 것이었다.

지나가는 승용차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나서 버스가 한대 왔다. 손을 들었더니 섰다. 돈을 줄려고 하였더니 아까 받았던 전표를 달라고 하였다.

버스 종점에서 내렸다.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 시에 온 것이다. 호스텔을 예약을 하지 않고 왔다. 그러나 어느 호스텔로 가야 할지는 설명서를 보고 미리 마음속에 정해 두었던 터였다.

호스텔을 정할 때 몇 가지 사항을 살핀다. 첫 번째는 가격 이다. 두 번째는 이 호스텔에 묵었던 사람들의 평가다. 다음에는 아침을 주는지 부엌이 있는지 위치가 편리한 곳에 있는지 하는 것을 따진다. 그러나100% 마음에 드는 호스텔은 찾기가 쉽지 아니하였다.

정류장에서 나와서 얼마 가지 아니해 호스텔 간판이 보였다. 들어갔다. 깨끗하고 정원도 있었다. 묵을 방을 가보았더니 시멘트 바닥에 단층 침대가 죽 놓여 있었다. 이만하면 되었고 또 피곤 했으므로 그냥 주저 앉았다. 이 호스텔에 3일 머 물었다.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고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갔다. 입장료를 아르헨티나 돈으로만 받았다. 아르헨티나 돈이 없다고 했더니 옆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가면 돈을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가게에 갔더니 돈을 그냥 환전해 줄 수는 없고 무엇이던지 기념품을 하나 사야만 거스름돈 형식으로 돈을 바꾸어 줄 수가 있다고 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 인형을 몇 개 샀다. 아르헨티나 쪽에서 폭포를 이틀 동안이나 보았다. 입장료도 두 번이나 냈다.

아르헨티나 쪽 폭포는 주 폭포로 가기 전에 작은 폭포들이 여러 개 있었다. 이 폭포들도 주 폭포에 비해서 작다는 것뿐 이지 상당히 큰 편이었고 아름다웠다. 첫날은 이 작은 폭포들만 보고 돌아왔다. 특이 한 것은 이 폭포수 물속에 새들이 살고 있었다. 제비처럼 생긴 새들 이었는데 폭포 물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폭포수가 쏟아지는 뒤쪽의 빈 공간의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적들로 부 터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2007년 68세로 인도 여행을 가다

이집트와 터키 여행에서 겁 먹은 나는 다시는 혼자서는 배낭여행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신문에 글을 썼다. 인도에 같이 여행갈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결과로 2007년 68세의 나이로 1월 한달 간 인도와 네팔을 둘이서 배낭여행 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의 인디라간디 국제공항에 내렸다. 인도는 한반도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나라다. 인구는 13억으로 중국 다음으로 많다. 델리와 뉴델리는 같은 지역으로 뉴델리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11년에 델리의 한 부분을 도시계획을 하여 20년에 걸쳐서 완성한 새 도시다.

뉴델리의 관광객 숙소가 모여있는 곳으로 가서 싸구려 여인숙에 짊을 풀었다. 밖으로 나갔더니 거리가 난장판이었다. 사람 소 돼지 염소 닭 들이 오토바이 사륜차 삼륜차 인력거 들과 맞물려서 돌아 가고 있었다.

어떤 골목으로 들어 섰더니 큰 가마솥에 생우유를 가득 채우고 슬슬 끓이고 있었다. 우유만 팔기도 하고 빵을 끼워서 팔기도 하였다. 길거리 에서 수레에 화로를 얹고 화로에 계란을 후라이를 해서 빵 조각에 끼워서 파는 오물렛 이 있었다. 값이 저렴하고 맛이 있어서 매일 사 먹었다.

오토바이에 치었다. 앞에서 오는 오토바이가 차를 피하려고 꺽는 바람에 핸들이 내 왼쪽 옆구리를 치고 지나갔다. 욱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양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감싸 안았다. 오토바이 청년은 고개를 돌려서 한번 쳐다 보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한 호텔에 있는 여행 에이전트를 찾아갔다.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표를 사러 왔다고 했더니 컴퓨터를 눌러본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앞으로 일 주일 분의 기차표가 매진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기차표를 기다리는 동안에 골든 트라이 앵글 즉 황금의 삼각지를 가 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황금의 삼각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델리 와 아그라 와 자이퍼 세군데를 둘러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에 오는 99%의 관광객들은 이 세 곳을 가보기 위해서 온다고 말하였다. 덧붙이기를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에는 일년에 500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 온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차역에 가면 혹시 기차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차 정거장을 향해서 걸었다. 기차역이 가까워 지자 어떤 젊은이가 다가왔다. 말하기를 기차역에 가 보아야 표가 없으니 자기를 따라오면 표를 아주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청년을 따라 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면서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재빨리 돌아서서 도망쳐 나왔다.

기차역에 갔더니 기차표가 얼마던지 있었다. 바라나시는 800킬로미터요 12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밤이 되니 엄동설한이었다. 기차의 창문이 닫히지 아니하여서 칼날 같은 찬바람이 들어 왔다. 호스텔의 주변에 있는 가게들이 왜 슬리핑 백을 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한잠도 못 자고 덜덜 떨면서 바라나시 역에서 내렸다. 오토바이 손잡이에 찔렸던 옆구리가 아파오고 눈물 콧물이 쉴새 없이 쏟아졌다.

바라나시에는 겨우 혼자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많이 있었다. 한참 가니 호텔이 나왔다. 방 값을 물어보았더니 너무 비쌌다. 돌아서서 나오려고 하자 값을 깎아 주었다. 피곤하였으므로 더 찾아 보지 아니하고 짐을 풀었다. 갠지스강으로 갔다.

강변을 따라서 가트 라는 시멘트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계단이 높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물에 까지 닿아있었다. 사람들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깊이가 허리 정도 밖에 차지 않았다. 사람들은 물로 몸을 씻고 얼굴을 씻고 머리도 감았다. 그리고 이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강을 어머니 강 이라고 불렀다. 강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나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더 내려가니 커다랗고 하얀 건물이 나왔다. 이 건물 부근의 강변에서 하루에 300구의 시체를 태운다고 하였다. 연기가 자욱하고 시체 타는 냄새도 났다. 건물에는 누가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건물에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으러 온다고 하였다.

시체를 태워야만 영혼이 몸 밖으로 나오고 극락으로 갈 수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빨리 태워야만 깨끗하고 싱싱한 영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먼데서 시체를 운반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 건물에 와서 죽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다음날 다시 강으로 갔다. 이번에는 강변에 있는 조그만 배 하나를 세 내었다. 육지에서는 사람을 태우는 곳으로 못 들어가게 하였다. 화장을 가까이서 보려면 배를 타고 보아야 했다.

시체를 알록달록한 천으로 싸서 들것에 들고 나왔다. 갠지스 강 물속에 시체를 세 번 담갔다가 꺼냈다. 쌓아둔 나무더미 위에 사람을 올려 놓았다. 발 하나가 천 밖으로 튀어 나와 있었다. 나무에 불을 질렀다. 시체가 다 탈 때까지 나무를 빼내거나 더 보태지 않았다.

시체는 다 타지 않고 남는 부분이 있었다. 여자는 엉덩이 살이 남고 남자는 가슴 부분이 남는다. 그러면 부분을 재와 같이 삽으로 떠서 갠지스 강으로 넣어버렸다. 시체가 어머니 품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갠지스 강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이 심한 강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탄 배 말고도 배 여러 척이 떠 돌아 다녔다. 황토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며 열심히 염불을 외었다. 다른 배 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목청껏 찬송가를 불렀다.

어떤 배가 우리의 배로 왔다. 한 사람이 배 위로 올라왔다. 화장할 때 태우는 나무는 비싼데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도 화장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돈을 주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진짜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인지 당신이 가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자기를 믿으라고 하였다.

바라나시는 밤에도 더워서 호스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못 생긴 남자가 나더러 자기의 신발에 입을 맞추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인도의 사회 계급 중에서 가장 높은 브라만 이라고 하였다.

무릎을 꿇고 이 사람의 발에 키스하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나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외국사람이니 안 해도 좋다.”고 말하였다. 나도 브라만이 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죽은 다음에 환생하는 길 밖에는 없다고 하였다. 죽어서 브라만 남자의 아내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죽어서 벌레의 뱃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그것은 자기의 업보이니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업보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것 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전생의 업을 살고 있는 것 이라고 하였다.

비행기로 바라나시에서 네팔의 수도인 카투만두로 갔다. 한 시간 걸렸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스텔에 묵었다. 종업원들은 현지인 들이었다. 미역국을 시켜 먹었다. 생일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미역국을 먹고 설사병에 걸렸다. 아픈 옆구리에 독감에 설사까지 겹쳐서 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카투만두의 골목길에서 감자 찐 것도 사 먹었다. 값이 싸고 맛이 있었다. 이 음식점은 감자 찐 것 말고도 네팔 토속음식도 만들어 팔았다. 골목길은 하도 좁아서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았다. 주인은 젊은 네팔 청년이었고 일하는 어린 남자 아이들이 셋이 있었다. 아이들이 왜 학교에 가지 아니 하는지 궁금 했지만 물어 보지 아니 하였다.

호스텔에서 가까운 곳에 카투만두의 본전통인 덜발 광장이 있었다. 힌두교 탑과 사원과 왕궁이 있었다. 힌두교 탑에는 보호 철책이 없어서 사람들이 올라가서 계단에 앉기도 하고 만져 보았다.

버스를 타고 포카라 로 갔다. 카투만두에서 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고 인구 30만명으로 네팔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여기에 히말라야 산의 14봉오리 중 3봉오리가 있다.

호스텔 남자주인은 한국말을 잘 하였다. 한국에서 3년 동안 일해서 모은 돈으로 호스텔을 지었다고 하였다. 다음날 이분을 가이드로 해서 산 구경을 했다. 산은 먼 거리에 있었는데도 마치 절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길가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사먹었다. 여주인이 숟가락을 집어 주었다. 포장 안된 길가 음식점이어서 숟가락에 먼지가 많이 묻어있었다. 여자가 자기 바른손의 엄지와 둘째 손가락으로 숟가락을 쓱 훑은 다음에 건네 주었다. 못 본 것처럼 하고 받아서 밥을 먹었다.

카투만두로 돌아와서 무척 고생했다. 너무 더워서 포카라로 갈때 반 바지를 입고간 것이 큰 잘못이었다. 무릎 아래로부터 발가락까지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모기가 물었다. 슬리퍼를 신고 갔기 때문에 더 심했다. 버스의 의자 밑으로 모기가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감기에 설사에 옆구리 아픔에 모기 병까지 걸렸다.

비행기로 바라나시로 돌아와서 아그라로 갔다. 600킬로미터요 12 시간이 걸렸다. 아그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타지마할이 있는 곳이다. 무굴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의 세 번째 부인인 뭄타즈 마할과 그녀의 아기 무덤이다. 뭄타즈가 열네 번째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슬픔에 잠긴 황제는 2 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뭄타즈 마할 과 아기가 묻힐 무덤을 짓기 시작하였다. 22년 만인 1653년에 완공 하였다.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당시의 돈으로 미화 50만불이 들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미화 8억 2천 7백 만불 이다.

타지마할의 꼭대기에 있는 둥근 돔에는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수정 등 28종류의 수없이 많은 보석이 박혀 있다. 샤 자한 황제는 타지마할이 완공된 후에 공사에 참가했던 모든 인부들의 손목을 잘랐다. 타지마할 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을 못 짓게 하기 위해서였다.

건물을 전면에서 바라보면 건물 앞 연못에 그림자가 비쳐서 타지마할이 두 개인 것처럼 보였다. 인간이 만든 참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감기로 눈에 눈곱이 끼어서 눈곱을 손으로 뜯어내면서 보았다.

신발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 갔다. 쇠 창살로 한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계속 밀려오기 때문에 설 수가 없었다. 몇 바퀴를 도니 왕비와 아기가 누워 있는 관이 나왔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큰 관 하나와 작은 관 하나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아그라를 떠나서 뉴델리로 돌아왔다. 완행 기차를 탔다. 기차가 역을 벗어나니 철로 변에 많은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옆에는 조그만 물 양동이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씻는 물이다. 여자들도 남자들 사이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다리 위에는 가족단위의 무 숙자 들이 살고 있었다. 어떤 애가 다리 난간 사이의 틈 사이로 엉거주춤 앉아서 일을 보았다. 팬티를 입지 않아서 아랫도리가 다 들어난 아이는 일을 마치고는 닦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금새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소 양 닭 들은 일종의 청소부였다. 길에 버려진 채소 보로박스 쓰레기 등을 먹어 치웠다. 소들은 젖이 탱탱 부어 있었다. 밤이 되면 주인이 와서 소젖을 짜간다고 하였다. 영악한 사람들이다.

병 물을 사서 다 마시고 빈 병을 버릴 때 두껑을 병에 닫지 말고 따로따로 버리라는 주의 사항이 가게마다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빈 병에 수도 물을 채우고 본드로 뚜껑을 붙여서 새 병 물인 것처럼 판다고 했다. 영악한 사람들이다.

옆에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현지인이나 다른 배낭 족 들과 이야기 할 기회가 줄어 든다.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배낭여행은 혼자서 하는 것이 정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병원에 한 달간 입원 했었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청춘 받친 사우디 아라비아를 가다

나는 1970년대에 우진 건설 회사의 총무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현장에 투입되었다. 일년간 젯다, 리아드 그리고 타이프 에서 일했다.

젯다는 항구도시였다. 거기에 우진 건설에 하청을 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회사가 있었다. 사무실에는 중년신사 한 사람과 전화기 한 대 뿐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공사가 생기면 왕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 사람들이 한국의 큰 회사에 일을 맡긴다. 한국의 큰 회사는 얼마를 떼고 작은 회사에 하청을 주었다.

젯다는 무척 더웠다. 마켓에 가서 시장을 보아왔다. 물건을 안으로 들여놓고 잤다. 아침에 나가 보니 문 앞에 쌀 한 가마가 그대로 있었다. 더워서 깜박 잊어버리고 들여놓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코란에 보면 도둑질한 사람은 손목을 자르게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손목이 잘린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사우디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안을 뿐만 아니라 손목을 자르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상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루는 픽업트럭 한 대를 사러 갔다. 흥정을 끝내고 주인에게 말했다. 인샤알라(하느님의 뜻) 라고 말하지 말고 약속한 시간에 차를 준비해 두라고. 주인은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차를 팔지 안겠다고 말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인데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과는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약속 시간보다 늦게 와도 그것은 인샤알라 인것이다.

대형트럭을 빌리기 위해서 사우디 사람과 같이 트럭 집합소로 갔다. 트럭이 죽 늘어서 있었고 운전수들도 있었다. 운전수들이 나를 보더니 추근대는 것이었다. 사우디 직원이 나더러 저리 가있으라고 말하고 자기가 흥정을 끝냈다. 한번은 아는 사람의 가게에 갔더니 미소년을 소개 시켜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거절하였다.

사우디에 제일 많이 다니는 승용차는 벤츠다. 운전석에는 흰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있고 그 옆 좌석과 뒷좌석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얼굴과 몸을 가린 여자 네 명이 앉아있다.

사우디 남자는 네 여자까지 의 처를 거느릴 수 있다. 회교도의 경전인 코란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전쟁이 심하여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 길거리에는 과부들과 어린아이들이 넘쳐났다. 마호멧은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처와 자식들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과부와 그들의 자식들을 데려다가 밥도 주고 옷도 주어라. 이 좋은 가르침이 오늘날 남용되고 있는 것이었다.

젯다에는 샤라시틴 이라는 큰 길이 있었다. 한번은 이 길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 여자는 그 손을 보고 목소리를 들어 보아서 나이가 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 도중에 이 여자가 검은 얼굴 천을 들어 올리고 맨 얼굴을 드러내었다. 여자들은 나이가 들면 대담해 지는 것인 가.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인 리아드 의 외곽지대 에서도 일했다. 작업장은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날이 워낙 더워서 하루에 두 번으로 나누어 일하였다.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일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점심 먹고 자다가 일터로 가서 3시부터 7시까지 일했다.

일터에 오갈 때는 차에 에어컨디션이 없어도 창문을 닫고 다녔다. 창문을 열면 불 바람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작업장에 갔다가 볼일이 생겼다. 화장실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멀리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 가서 일을 보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누가 내 뒤에 장작불을 갔다 대는 줄로 착각했다. 일이 아직 다 끝나지 안았지만 바지를 올리고 뛰어서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나는 왕족들의 여름 별장이 있는 타이프 에서도 일했다. 고산지대여서 덜 더웠다. 어디를 가다가 시원한 바람이 올라오는 계단이 있어서 앉았다. 불란서 회사가 짓고 있는 사우디 여름왕궁 건물이었다. 한 백인이 오더니 가라고 했다.

나는 이 불란서 사람에게 ‘봉줄. 꼬만 딸래부?’ 라고 인사를 했다. 이 분이 왕궁 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화장실의 수도꼭지와 변기가 금으로 되어있었다. 회의실 의자의 등받이가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경비실도 구경시켜 주었다. 주변을 살필 수 있는 모니터가 죽 걸려있었다. 내가 앉아있던 계단도 보였다. 십장이 설명하였다. “왕궁건물의 처마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있다. 사람이 접근하면 경고 방송이 나가고 그래도 접근하면 기관총이 발사된다. 왕궁은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어디를 가다가 해가 너무 뜨거워서 건물 모퉁이의 그늘로 들어섰다. 그늘 속에는 검은 개들이 여러 마리 누어 있었다. 뛸까 하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개들 사이를 걸었다. 개들은 나를 해치지 않았다. 사우디 사람들은 개를 집안에서 기르지 안는다고 했다. 먹이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 것일까?

사우디 장례 법은 사람이 죽으면 24시간이내에 묻게 되어있다. 날이 덥기 때문에 부패가 쉽게 오기 때문이었다. 동네밖에 있는 것은 모래뿐이다. 모래 속에 시체를 묻는다. 밤에 개들이 모래를 파고 송장을 꺼내 뜯어먹는 것이다.

길을 가다 보면 왕족이나 귀족들의 집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한쪽 담의 길이가 1킬로미터에 달했고 담이 모두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담의 한쪽 구석에는 수도꼭지가 하나 달려있었다. 물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배려다. 담 옆에는 쓰레기가 수북하였다. 집안에서 밖으로 던져서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거리의 교통신호등 앞에는 시멘트로 야트막한 둑을 만들어 놓았다. 빨간 불이던 파란 불이던 차가 일단 정지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어 놓았다. 빨간 불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 들이 파란 신호등이 켜지면 일제히 경적을 울리면서 출발하였다.

나는 시원한 밤이 되면 저녁을 먹고 금은방으로 놀러 갔다. 벌거벗은 백열등을 환하게 켜놓았다. 불빛아래에 금은보석들이 반짝반짝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사우디 여자들이 들어와서 두건을 벗었다.

금은보석을 잘 살펴보고 고르기 위함이었다. 나는 금은보석을 보는체하지만 실은 옆 눈으로 옥같이 하얗고 꽃처럼 예쁜 얼굴들을 보았다. 1년간의 사우디아라비아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2014년 동남아 5개국 여행

2014년 1월 1일부터 3월 31일 까지 석 달간 76세의 나는 혼자서 배낭을 메고 동남아 5개국을 여행 하였다. 다리가 아파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가본 나라는 월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보르네오섬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였다.

로스앤젤레스 에서 비행기를 타고 중국의 광저우 에 도착하였다. 10시간을 머문 다음 비행기를 바꾸어 타고 월남의 하노이에 도착 하였다. 비행기 회사에서는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쉴 수 있는 호텔을 제공 하였다.

호텔에만 있자니 심심해서 밖으로 나갔다.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어디 있는지 값이 얼만지 알아보았다. 호텔에 돌아와서 미화 5달러를 바꾸었다. 10달러가 환전의 최소 단위라고 말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중국에 언제 다시 올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5불을 바꾸어 주었다.

고량주 한 병과 배추 절인 것 반 포기를 샀다. 음식점으로 가서 마시고 먹었다. 호텔에 돌아와서 골아 떨어졌다.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 했다. 누가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눈을 떴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사람이 올라 온 것이었다.

월남은 길게 생긴 나라다.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하노이 하롱베이 동호이 후에 호이안 다낭 달라트 그리고 호지민 시였다.

사이공에서 비행기를 타고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풀 에 도착 하였다. 버스로 싱가포르 에 갔다. 비행기를 타고 보르네오 섬의 쿠칭 시로 갔다. 쿠칭 에서 비행기로 쿠아라룸풀 로 갔다. 쿠아라룸풀 에서 비행기로 사이공으로 돌아왔다.

사이공 에서 버스로 캄보디아 의 프놈펜으로 갔다. 버스로 씨엠리프로 갔다. 앙코르왓트 를 구경하고 비행기로 라오스의 팍세 로 갔다. 버스로 라오스 의 수도인 비엔티안 으로 갔다. 버스로 방 비엥 으로 갔다. 방 비엥은 산수가 아름다웠다. 거기서 절 의 도시인 루앙 프라방 으로 갔다.

루앙 프라방 에서 비행기로 하노이 에 돌아왔다. 하노이 에서 싸파 로 갔다. 싸파 에서 다시 기차로 하노이 에 돌아왔다. 하노이 에서 비행기를 타고 광저우 를 거쳐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참으로 길고도 긴 삼 개월 간의 여정 이었다. 힘들고 지쳤지만 그래도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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