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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미국, 첫 해외 출장길

나는 1960년대에 훼어챠일드 라는 한국주재 미국 전자회사에서 10년 동안 일 하였다. 그 당시의 한국은 몹시 가난하였고 기술이 낙후되어있었다. 이 회사는 한국의 저렴한 임금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부품을 가져와서 완성품으로 조립하였다. 조립 품은 트랜지스터와 반도체였다. 이 제품들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그 때의 한국은 이러한 제품을 만들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훼어챠일드 회사는 그 당시 같이 들어와 있던 모토롤라 회사와 더불어 한국의 최첨단 기술산업회사로 인정 받고 있었다. 그때의 대통령은 박정희 씨였는데 하루는 우리회사에 시찰을 왔다. 품질관리 과장이었던 나는 대통령을 생산라인으로 모시고 가서 반도체의 조립과정 및 어떻게 품질을 관리하고 있는지 설명해 드렸다.

반도체의 모든 조립은 현미경 밑에서 이루어 졌다. 조립공들은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꽃다운 아가씨들이었다. 이들의 하루 임금은 그것이 얼마이었는지 액수는 잊어버렸지만 그 당시의 곰탕 한 그릇 값과 같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것도 높은 임금이었고 또 아가씨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을 때였다.

나는 회사의 명령으로 홍콩지사와 미국의 본사에 출장을 갔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국정원격인 중앙정보부 라는 국가기관이 있었다. 이때는 해외에 나가는 모든 사람은 중앙정보부에 가서 먼저 교육을 받아야 했다. 반공에 대한 교육이었다. 호텔방에 불온 서류나 서적이 놓여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모르는 사람이 접근하면 공작원일지 모르니 피하라는 것 등 이었다.

그때는 회사에 들고 다니는 가방도 변변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홍콩에 가면 007가방을 하나 사올 요량으로 한국에서 떠날 때 보자기에 서류를 싸가지고 갔다. 홍콩 국제공항에 내리니 회사직원이 마중 나와있었다. 나는 차마 이분에게 007가방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밤에 호텔을 나섰다. 007 가방을 하나 사기 위해서였다. 나는 무작정 걸었다. 무작정 이라기보다도 내가 지금 오른쪽으로 돌았으니 돌아 올 때는 왼쪽으로 돌아야지 하는 식으로 머리 속에 가는 길을 외우면서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더니 어떤 가방가게에 도착하였다.

가게에 들어섰더니 어디서 ‘아야’ 하는 젊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나는 쪽을 보았더니 젊은 남녀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갔다. 한국여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여기서 일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한국에서 홍콩에 놀러 왔다가 여기에 취직하였다고 하였다. 한국손님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 온다고 하였다. 나는 가방을 하나 샀다.

나는 돌아올 때 오른쪽 왼쪽은 잊어버려서 호텔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하도 유명한 호텔이어서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나는 해외에 나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홍콩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포도가 하도 커서 자두만 하였고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서 먹는 것도 신비로웠다. 에버딘 이라는 곳에 가보았는데 수족관에 생선을 넣어두고 내가 먹고 싶은 고기를 손으로 가르치자 꺼내서 금방 튀겨 가지고 나왔다.

돌아올 때는 어떤 공동묘지에 들려보았다. 비석에 죽은 사람의 사진을 붙여놓고 생일과 죽은 날짜를 적어 놓았다. 어떤 남자와 여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밤 어떤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중앙정보부 교육이 생각나서 그 사람은 한국에 가버리고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미국에 출장 와서는 서부에서 동부까지 여러 곳을 다녀보았다. 그때 들린 도시는 로스앤젤레스, 산호세 , 샌디에고 , 뉴포트랜드, 뉴욕, 아틀란타 등지였다. 지사가 있는 곳에서는 회사직원이 나왔으나 그렇지 않은 곳은 혼자서 다녔다. 뉴욕에서는 훼어챠일드에서 일하던 정비공이 이민 와있어서 그 집에서 하루 밤 자고 그 다음날은 그의 부인이 안내하여 자유의 여신상에 가보았다. 아틀란타 에서는 나의 막내 동생이 이민 와있어서 그 집에서 일주일 묵었다.

한번은 공중전화를 쓰는데 동전을 더 넣으라는 녹음이 나온다. 나는 전화기를 놓으면 동전이 들어가 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동전을 구하러 갔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돈이 모자랄 경우 전화기를 놓으면 넣었던 동전이 도로 나온다고 하였다.

뉴포트랜드에 가서는 바다가재라는 것을 생전처음 먹어보았다. 나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가재의 눈알까지 다 빼서 먹었다. 체하여 그 날밤 몹시 고생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 하와이에도 들렷고 일본에도 갔다. 하와이의 밤거리에 대한항공 간판이 걸려있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일본의 아다미 온천장에 혼자 갔다. 여관에 가서 기생을 청했으나 여러 곳에서 거절당하였다. 나는 그들이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차별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급해진 나는 돈뭉치를 손에 들고 기생을 청하였다. 그래도 거절 당하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기생하고 노래하고 노는 것은 일대 일의 일이 아니라 다수 대 다수의 사건이라고 하였다.

시내의 제일 비싼 호텔에 여정을 푼 나는 분을 사기지 못했다. 호텔 전화 부에 있어서 안마 녀를 불렀다. 어떤 할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돈만 주고 내 보냈다.

몽골 Mongol

몽골 편

나는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서 한국으로 갔다. 이때 내 나이는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를 타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이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원래 내 몽골과 외 몽골로 되어있었으나 내 몽골은 중국에 흡수되었고 외 몽골만 소련의 힘을 얻어 독립하였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다.

우리는 5월의 어느 날 밤에 도착했는데 공항 밖으로 나가니 쌀쌀하였다. 환전을 한 다음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택시기사가 호스텔 주소 근처에 도착해서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기사는 이해할 수 없는 몽골말로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우리에게 내가 종이에 적어서 보여준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호스텔월드 라는 믿을만한 인터넷을 통하여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기사는 다른 여러 군데에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정신을 차려서 그렇다면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리가 묵는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 와서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물어서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시내로 갔다. 다행히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하나 있어서 이름 모를 몽고음식을 사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무작정 몽골로 왔던 터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던지 아니면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 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물어서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다. 비자 신청서를 받기는 하였으나 적는 내용이 아주 까다롭고 신청서를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나 비자가 나온다고 하였다. 더구나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우리는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나는 먼저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 부 터서 하소연하였다. 그 여자직원은 말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하면서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곳 해결되리라는 갓이었다. 나는 해결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산국가에도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여자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을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고비사막을 여행하려면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돈을 내면 된다고 하였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저렴하고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 한대와 운전수 그리고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말하였다. 늙은 나와 나의 마누라는 다른 여행사에 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 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놀라운 것은 백화점 안에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의 모든 반찬을 만들어서 파는 코너도 있었고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진열대에 있는 것은 한국에서 수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반찬은 누가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우리는 국영백화점으로 가서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삼분지 이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계약서도 없이 영수증만 받고 돈을 건 냈다. 내일아침 7시에 와서 가이드와 같이 먹을 거리도 사고 출발은 8시에 한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갔다. 차는 두껑이 있는 큰 짚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몽골의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 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우리는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선 것이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 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아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리가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고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였고 나침반도 없었다. 나는 기사가 무엇을 보고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마누라의 머리는 들어오는 흙먼지로 금새 머리가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었고 김치도 먹었고 된장국도 끓여먹었다. 일 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어느덧 황혼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마치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땅속으로 금새 사라졌다.

날은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아직도 우리가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 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여러 번 와 보았다.’ 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어느 몽골 원주민의 천막 집인 게르 앞에 섰다. 먼저 어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어른이 나왔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이 사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 말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손으로 가르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간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숙소는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해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으로 그 크기가 우리나란 전통적인 우물이 한 스무 개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게르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으나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사정을 말하고 우리는 그 건물의 어느 방에서 잤다.

다음 날 은 어디를 가는데 남자는 없고 게르 옆에서 어떤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작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망아지의 상처에 약을 바르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안는 것이다. 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나는 힘센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게르가 하나 있고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어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가이드가 뭐라고 설명을 하자 부부가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는데 말랑말랑 하였다. 젖통은 만지지 안고 젖꼭지만 위에서 아래로 죽 훑으니 젖이 아래로 분수처럼 쏟아졌다.

원주민 들의 게르는 짚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올 정도로 서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한참을 가니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짚차 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가이드 말이 산양들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하였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같이 앙상하게 죽은 나무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형형색색의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도 묶여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사막에서 돌을 주어다가 쌓여있는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또 다음날은 어디로 가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날씨가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우리더러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지만 나는 ‘에이 설마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그대로 갔다.

계곡 입구에는 봄날처럼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있었고 작은 개울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들어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고 절벽위로 이름 모를 맹금들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오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미리 챙겨가지고 온 우비를 입었지만 나와 나의 마누라는 비를 쫄딱 맞았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소낙비가 우박이 되어서 나의 머리를 강타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지만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이드 더러 그만 들어가고 돌아 가자고 보챘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몸소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하였다. 절벽은 그다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해질녘이 되자 절벽이 햇빛을 받아서 시뻘겋게 변하고 마치 장작더미에 성냥불을 갖다 댄 것처럼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가이드 말이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지만 공룡 알이 통째로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열심히 공룡 뼈나 알을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줍지 못하였다. 일확천금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도시답게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 비슷한 숙소에서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몽골의 전통 쑈 가 있었다.

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추는 몽골의 춤도 인상적 이었지만 가장 신기했던 것은 입을 크게 벌리지 아니하고 목청을 쥐어짜서 부르는 몽골의 전통음악인 흐미 라는 목 노래였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비한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자연의 소리인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 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까운 동산에 무슨 신전 같은 것이 있고 커다란 간판 같은 것도 보여서 가보기로 하였다. 올라 가보니 무슨 기념비 같은 것이 있었고 그 큰 간판에는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랍고 기분 나쁘게도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이 한때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올 때 영어가 그런대로 유창한 가이드 처녀에게 항의 하였다. 이 아가씨는 자기들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한국도 분명히 몽골의 식민지였다고 배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전술가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어떤 성이 항복을 하지 안으면 썩어가는 사람의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 서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나는 징기스칸이 항복을 하지 안는 성을 정복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여자 어린이 개 돼지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징기스칸이 썩은 시체까지 무기로 사용한 질 나쁜 사람인줄은 미쳐 몰랐다.

또 그는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모두서 잡아 죽여 버렸다고 하였다. 나는 키 작은 사람들이 성공한 예를 많이 알고 있다. 나폴레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요 히틀러나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징기스칸의 키가 얼마나 컷 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도 키 작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 량 할 수 있었다.

나는 키가 1미터 72 센티 미터이니 나도 키 작은 사람에 속한다. 나는 나를 자위한다. 나도 혹시 성공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다음날은 오다가 어떤 게르 에서 잤다. 갑자기 새 차게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우리는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몇 일을 더 묵은 뒤 서울로 왔다.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라오스 LAOS

방비엥으로부터 루앙프라방 가는 길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이었다. 거리로는 200킬로미터 이었지만 시간은 10시간이 걸렸다. 라오스에서 운행되고 있는 버스는 거의 모두 한국에서 수입한 옛날 관광버스였다. 길이 꼬불꼬불 할뿐만 아니라 외가닥 길이 대부분 이었다. 산 능선 위로 찻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능선이 너무 좁아서 버스 양쪽으로 산 골자기와 산밑의 강이 훤히 보일 정도 이었다. 버스는 시속 10 킬로미터로 갔다.

도로변에는 동네도 없었다. 어쩌다가 약간 넓은 곳이 나오면 집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농사지을 수 있는 땅도 없는데 이사람 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도로양편의 산비탈에 심어놓은 바나나가 전부였다. 화전을 일구는지 산의 곳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뿌연 하다.

루앙프라방은 절의 도시다. 옛날에는 절이 60개나 되었는데 많이 불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20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루앙프라방 이라는 말 자체가 신성한 부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구 도시 지역은 전체가 유네스코 에 인류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다고 한다.

남간강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니 산으로 올라가는 아주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순전히 돌산인데 이 돌들을 교모 하게 이용해서 절을 지어 놓았다. 암석들이 기울어져 있었고 석탑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석굴 안에는 배 나오신 앉아계신 부처님 도 있었다. 절의 이름이 왓촘씨 절 이라고 한다. 들어 갈 때 입장료 20000킵을 받았다. 이 절의 특징은 부처님께서 이 산에 오신 적이 있는데 부처님의 발자국 하나가 돌에 찍혀서 지워지지 아니하고 지금도 남아 있었다.

누각 같은 것을 지어서 부처님 발자국을 비바람을 부 터서 보호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부처님 발자국을 보았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컸다. 이렇게 큰 발을 가지신 부처님은 얼마나 크셨을 까. 또 부처님 손 바닥은 얼마나 컷을까. 여의봉을 휘두르며 재주를 부리는 손오공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간강을 따라서 나있는 킹키싸라쓰 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메콩강을 만나게 된다. 메콩강을 마주하고 아주 큰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와씨엥똥 절 이라고 한다. 동남아의 절은 다 아름다운데 라오스의 절들은 특히 더 아름답다. 지붕에는 금색 찬란한 번개모양의 기다란 문양을 세워 놓아서 절이 금방 하늘로 날아 오를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이 절에는 길이가 백 미터나 되는 긴 카누 같은 배를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열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극락 강을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라고 한다. 나는 그 배에 올라 가보았다. 내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극락에 가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도 나는 배에서 내려서 나무 그늘을 찾아가서 낮잠을 잤다. 낮잠이 극락보다 급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름 모를 꽃 잎들이 하염없이 내 가슴위로 내렸다.

시내에는 또 다른 절도 있었는데 이 절에는 황포승복을 입은 동자 스님들이 많이 있었다. 시내에는 재래 시장도 있었다. 어떤 현지인이 바나나 잎으로 싼 떡을 하나 산다. 나도 하나 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떡은 다른 떡에 비해서 값이 상당히 비쌌다. 호스텔에 와서 먹으려고 바나나 잎사귀를 벗겨보니 떡이 아니었다. 벌집의 하얀 애 벌래 가 들어있는 부분을 찐 것이었다. 나는 눈 딱 감고 맥주하고 해서 먹었다. 맛 있었다.

이 호스텔에는 젊고 아름다운 일하는 아가씨가 세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두머리 격인 조그맣고 예쁜 끼엘레 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25살 이라고 한다. 아이가 몇이나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 아이가 있다고 한다. 큰 아이가 몇 살 이냐고 물었더니 열 한 살이라고 하였다. 나는 잠 간 의아해 졌다. 그리고 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25에서 11을 빼면 얼마가 될 까. 이 아가씨가 도대체 몇 살에 애기를 낳은 거야.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이 아가씨가 웃는다.

거리의 곳곳에는 당신 몸을 가리시오 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라오스는 너무 더워서 서양 여자 아이들이 거의 벗고 다녔다. 또 거리의 어떤 곳에 하얀 거물이 있었는데 담장이 굉장히 높았다. 이 담장 높은 건물에서 늙고 아름다운 서양여자가 근사한 차를 타고 나온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경비원 에게 여기가 무엇 하는 곳이냐고 물어 보았다. 옛날에는 감옥 이었는데 개조해서 지금은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루 밤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미화 1000달러라고 한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머무는 호스텔은 하루 밤에 3달러였기 때문이었다.

또 어디를 갔더니 김삿갓식당 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한국말과 영어로 쓰여있었다. 나는 루앙 프라방에 한국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떤 중년이 좀 지난 남자분이 나왔다. 나는 혼자 루앙 프라방에 놀러 왔다고 말하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이 분은 원래 한국에서 간판 제작소를 운영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마사지 업소를 운영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했다. 그 뒤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이 적성에 안 맞아서 혼자서 월남의 사이공으로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 음식점을 개업 하셨다고 한다. 돈을 좀 벌어서 가족을 모두 사이공으로 이주 시켰다고 한다.

마누라와 자식들은 사이공에 남겨두고 혼자 루앙 프라방에 와서 김삿갓 식당을 차렸다고 한다. 손님들이 현지인들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한다. 많이는 오지는 않지만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가끔 온다고 했다. 그러면 적자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하였다. 음식은 현지 여자들을 가르쳐서 만들고 있지만 중요한 요리는 자기가 직접 한다고 하신다. 나에게 커피를 한잔 주셨다

내가 감옥을 개조해서 만든 호텔 이야기를 하였다. 하룻밤 숙박료가 1000달러면 너무 비싼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말씀 하신다. 그 전에 일본의 황태자가 여기 구경 온 적이 있는데 그분이 머 물었던 호텔은 방값이 하룻밤에 미화 3000달러였다고 말씀 하신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 분 이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 한마디가 있다. 우리는 여기 100년을 살아도 이방인 입니다. 나는 그 분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는 무수한 인종들이 살고 있고 너나 나나 다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루앙프라방은 이번 나의 동남아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처음에 도착했던 하노이로 돌아갔다.

케냐와 탄자니아

아프리카 여행 개요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가보는 것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은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11년 동안의 해외 배낭여행 중 아프리카 여행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나는 아프리카에 있는 이집트와 모로코는 벌써 갔다 왔지만 이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중동국가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아랍인들이요 종교는 이슬람교 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 까.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머리 속에 늘 그리는 아프리카 여행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여 요하네스버그 빅토리아폭포 빅토리아호수 그리고 탄자니아 와 케냐를 차례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77세가 되어버려서 나의 몸이 더 이상의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허용해 줄 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또 나는 진짜 아프리카 국가에 갔다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때 되도록이면 나의 모습을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새카만 아프리카에 서 이 일이 가능할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아니하였다. 또 아프리카를 가려면 영국 런던에서 머물렀다가 비행기를 바꾸어 타야 하는데 영국의 일월은 너무 추워서 추위를 몹시 타는 늙은 노인인 나는 도저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나의 신상을 위해서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한 마디 말이 나의 가슴을 후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해본 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나는 나의 마지막 혼자서 하는 해외 배낭여행의 목적지를 케냐와 탄자니아로 정하고 또 모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케냐와 탄자니아

2015년이 힘차게 밝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용감하게 77세가 되었다. 나는 1월 1일부터 31일 일 까지 한 달간 혼자서 배낭을 메고 아프리카 의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였다. 작년에는 석 달 동안 동남아를 여행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무릎이 많이 좋아져서 지팡이는 짚지 아니하였다. 나는 1939년 생이다. 늙은 노인인 내가 혼자서 배낭을 메고 해외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 훼어챠일드 라는 미국전자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그때 출장으로 홍콩과 미국을 가 보았다. 그 회사를 그만둔 후에 살 곳을 찾아서 또는 일 거리를 찾아서 호주 사우디 아라비아 태평양 섬 등을 전전 하였다. 그 뒤에 미국에 정착한 후로는 해외 여행의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마크 투웨인 의 말 을 접하게 된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 지면 해 본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더 후회하게 된다. 가 그것이다. 나는 늦었지만 여행을 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혼자서 여행한다. 단체 여행도 가보았고 둘이서 하는 것도 해 보았다. 단체 여행은 가이드만 따라 다녀야 되고 보여 주는 것만 보아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따라 다니는 것 같다. 둘이서 하는 여행은 현지인 이나 다른 여행객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 들어서 보는 것 외에는 별로 배우는 것이 없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백 번도 더 망설인다. 밥은 어디서 먹을지 감기는 걸리지 않을지 설사 병에는 걸리지 않을지 변비는 걸리지 않을지 개에게는 물리지 않을지 길은 잃어 버리지 않을지 내가 잘 곳을 어떻게 찾아 가야 할지 도둑은 맞지 않을지 차에 치이지는 않을지 내가 가는 곳에 병원은 있을지 강도는 당하지 않을지 등등 걱정이 태산 같다. 나는 배낭을 메고 떠나는 날까지 매일 밤 잠을 못 잔다.

그래도 나는 결국 여행을 떠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늙었으니 곧 죽을 것이다. 집에 가만이 편하게 있어도 죽고 고생 하면서 여행해도 죽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죽기 전에 세상을 보자. 사람을 만나자. 저승에 가서 말 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만들자.

나의 어린 손주는 나를 거지 여행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나는 뉴욕에 갔을 때 무숙자 수용소 에서 열흘을 잔 적이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부근의 호텔 방 값은 하루 밤에 보통 400불을 상회한다. 네 사람이 자는 호스텔 방 도 침대 하나에 100달러씩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거지 수용소를 찾아갔다.

외국 여행 때 비행기표나 호스텔 침대 값은 깍 아 주지 않는다. 오직 절약할 수 있는 길은 교통비와 음식이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 하고는 택시를 타지 않는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 할 때나 국경을 넘을 때에는 되도록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어떤 호스텔 에서는 아침 식사가 나온다. 아무리 거친 음식 이라도 다 먹도록 한다. 어떤 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마켓이 어디 있는지 또는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음식점이 있는 곳을 찾아 내야 한다. 관광객 상대 업소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 에서 미화 50전 하는 밥을 사서 세끼로 나누어 먹은 적이 있다. 혹자는 말한다. 도상국가나 가난한 나라에 가면 돈을 써야지 그 나라 경제가 살아 날것이 아니냐 라고.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나 같은 돈 없고 늙은 노인에게는 해당 무 다. 나는 돈을 아끼고 아끼어서 100개국을 여행하였다.

되도록 현지 말을 좀 배우고 현지인처럼 행동하고 현지인 같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강에 유의하고 교통사고나 강도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야 한다.

나는 1월 1일부터 1월31일 까지 한 달간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를 혼자서 배낭여행 하였다. 로스 엔젤레스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런던과 이스탄불을 거쳐서 나이로비에 도착하였다.

마사이마라 야생동물 국립동물원에서 밤새 사냥한 들소를 뜯어 먹고 있는 사자를 보았다. 근처에서 자기들의 식사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십 마리의 하이네나 도 보았다. 그 용맹하다는 마사이족 마을에도 가보았고 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서 주민의 99%가 무슬림 이라는 인도양의 잔지바르섬에 도 가보았다.

킬리만자로 산에도 가보았다. 포터를 동반한 사파리를 따라가려면 미국 돈 2000달러가 든다. 난 단돈 10불에 다녀왔다. 무릎이 아파 정상등정을 포기하고 킬리만자로 입구인 론드로스 게이트 까지만 갔다 온 것이다. 갈 때는 현지주민들이 이용하는 달라달라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오 가는 길 은 비포장이 많아 차가 몹시 흔들렸고 힘이 들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숙소인 유스호스텔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이 되었다. 사람을 짐짝처럼 많이 태워서 현지주민 여자와 코가 닿을 정도였다. 어떤 젊고 아름다운 궁둥이가 큰 여자가 내 무릎 위에 털썩 앉는 바람에 나는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년에 혼자서 아프리카를 배낭여행 한다는 것은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참으며, 사랑해서는 안될 여자를 사랑하는 일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재미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 후의 느낌

나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가기 전에 이미 다른 아프리카 국가를 가본적이 있다. 이집트 와 모로코를 가 보았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고 하기 보다는 아랍국가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종이 아랍인들 이고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나는 이미 거의100여개국을 여행 하였지만 진짜 아프리카 여행은 미루고 또 미루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지방을 여행하게 되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또 되도록이면 가난한 거지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혼자서 생전 모르는 곳을 걸어 다니기 때문에 봉변이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마이카 에 갔을 때는 얼굴과 머리를 너무 태워서 나를 현지인 취급을 하였고 아르헨티나에 여행 했을 때는 어떤 거지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 마켓이나 상점에 가면 경비가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닌 적도 있었다. 실제로 강도가 다가와서 내 모습을 보고는 돌아서서 가버린 적도 있었다.

아프리카는 영 자신이 없었다. 주민들 거의가 100% 흑인들이고 또 병도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자꾸만 뒤로 미루고 망설여 졌다. 그러나 77세가 되어버린 올해는 지금 안 가면 너무 늦어 버려서 내 일생에 아프리카 여행은 영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고 여행을 댕겨도 죽는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아프리카를 가기로 작정 하였다.

나는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기를 잘했다. 사람들은 색갈만 좀 다를 뿐이지 사는 원리는 어디나 다 똑 같다. 아프리카는 서방세계나 동방세계에 비 해서 좀 가난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더 순박하고 더 인심이 후 한 것 같았다. 또 그들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