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서 한국으로 갔다. 이때 내 나이는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를 타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이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원래 내 몽골과 외 몽골로 되어있었으나 내 몽골은 중국에 흡수되었고 외 몽골만 소련의 힘을 얻어 독립하였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다.
우리는 5월의 어느 날 밤에 도착했는데 공항 밖으로 나가니 쌀쌀하였다. 환전을 한 다음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택시기사가 호스텔 주소 근처에 도착해서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기사는 이해할 수 없는 몽골말로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우리에게 내가 종이에 적어서 보여준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호스텔월드 라는 믿을만한 인터넷을 통하여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기사는 다른 여러 군데에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정신을 차려서 그렇다면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리가 묵는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 와서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물어서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시내로 갔다. 다행히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하나 있어서 이름 모를 몽고음식을 사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무작정 몽골로 왔던 터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던지 아니면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 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물어서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다. 비자 신청서를 받기는 하였으나 적는 내용이 아주 까다롭고 신청서를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나 비자가 나온다고 하였다. 더구나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우리는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나는 먼저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 부 터서 하소연하였다. 그 여자직원은 말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하면서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곳 해결되리라는 갓이었다. 나는 해결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산국가에도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여자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을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고비사막을 여행하려면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돈을 내면 된다고 하였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저렴하고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 한대와 운전수 그리고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말하였다. 늙은 나와 나의 마누라는 다른 여행사에 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 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놀라운 것은 백화점 안에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의 모든 반찬을 만들어서 파는 코너도 있었고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진열대에 있는 것은 한국에서 수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반찬은 누가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우리는 국영백화점으로 가서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삼분지 이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계약서도 없이 영수증만 받고 돈을 건 냈다. 내일아침 7시에 와서 가이드와 같이 먹을 거리도 사고 출발은 8시에 한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갔다. 차는 두껑이 있는 큰 짚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몽골의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 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우리는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선 것이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 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아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리가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고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였고 나침반도 없었다. 나는 기사가 무엇을 보고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마누라의 머리는 들어오는 흙먼지로 금새 머리가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었고 김치도 먹었고 된장국도 끓여먹었다. 일 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어느덧 황혼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마치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땅속으로 금새 사라졌다.
날은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아직도 우리가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 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여러 번 와 보았다.’ 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어느 몽골 원주민의 천막 집인 게르 앞에 섰다. 먼저 어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어른이 나왔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이 사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 말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손으로 가르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간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숙소는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해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으로 그 크기가 우리나란 전통적인 우물이 한 스무 개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게르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으나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사정을 말하고 우리는 그 건물의 어느 방에서 잤다.
다음 날 은 어디를 가는데 남자는 없고 게르 옆에서 어떤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작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망아지의 상처에 약을 바르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안는 것이다. 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나는 힘센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게르가 하나 있고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어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가이드가 뭐라고 설명을 하자 부부가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는데 말랑말랑 하였다. 젖통은 만지지 안고 젖꼭지만 위에서 아래로 죽 훑으니 젖이 아래로 분수처럼 쏟아졌다.
원주민 들의 게르는 짚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올 정도로 서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한참을 가니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짚차 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가이드 말이 산양들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하였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같이 앙상하게 죽은 나무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형형색색의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도 묶여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사막에서 돌을 주어다가 쌓여있는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또 다음날은 어디로 가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날씨가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우리더러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지만 나는 ‘에이 설마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그대로 갔다.
계곡 입구에는 봄날처럼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있었고 작은 개울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들어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고 절벽위로 이름 모를 맹금들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오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미리 챙겨가지고 온 우비를 입었지만 나와 나의 마누라는 비를 쫄딱 맞았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소낙비가 우박이 되어서 나의 머리를 강타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지만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이드 더러 그만 들어가고 돌아 가자고 보챘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몸소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하였다. 절벽은 그다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해질녘이 되자 절벽이 햇빛을 받아서 시뻘겋게 변하고 마치 장작더미에 성냥불을 갖다 댄 것처럼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가이드 말이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지만 공룡 알이 통째로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열심히 공룡 뼈나 알을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줍지 못하였다. 일확천금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도시답게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 비슷한 숙소에서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몽골의 전통 쑈 가 있었다.
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추는 몽골의 춤도 인상적 이었지만 가장 신기했던 것은 입을 크게 벌리지 아니하고 목청을 쥐어짜서 부르는 몽골의 전통음악인 흐미 라는 목 노래였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비한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자연의 소리인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 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까운 동산에 무슨 신전 같은 것이 있고 커다란 간판 같은 것도 보여서 가보기로 하였다. 올라 가보니 무슨 기념비 같은 것이 있었고 그 큰 간판에는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랍고 기분 나쁘게도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이 한때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올 때 영어가 그런대로 유창한 가이드 처녀에게 항의 하였다. 이 아가씨는 자기들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한국도 분명히 몽골의 식민지였다고 배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전술가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어떤 성이 항복을 하지 안으면 썩어가는 사람의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 서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나는 징기스칸이 항복을 하지 안는 성을 정복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여자 어린이 개 돼지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징기스칸이 썩은 시체까지 무기로 사용한 질 나쁜 사람인줄은 미쳐 몰랐다.
또 그는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모두서 잡아 죽여 버렸다고 하였다. 나는 키 작은 사람들이 성공한 예를 많이 알고 있다. 나폴레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요 히틀러나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징기스칸의 키가 얼마나 컷 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도 키 작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 량 할 수 있었다.
나는 키가 1미터 72 센티 미터이니 나도 키 작은 사람에 속한다. 나는 나를 자위한다. 나도 혹시 성공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다음날은 오다가 어떤 게르 에서 잤다. 갑자기 새 차게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우리는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방비엥으로부터 루앙프라방 가는 길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이었다. 거리로는 200킬로미터 이었지만 시간은 10시간이 걸렸다. 라오스에서 운행되고 있는 버스는 거의 모두 한국에서 수입한 옛날 관광버스였다. 길이 꼬불꼬불 할뿐만 아니라 외가닥 길이 대부분 이었다. 산 능선 위로 찻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능선이 너무 좁아서 버스 양쪽으로 산 골자기와 산밑의 강이 훤히 보일 정도 이었다. 버스는 시속 10 킬로미터로 갔다.
도로변에는 동네도 없었다. 어쩌다가 약간 넓은 곳이 나오면 집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농사지을 수 있는 땅도 없는데 이사람 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도로양편의 산비탈에 심어놓은 바나나가 전부였다. 화전을 일구는지 산의 곳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뿌연 하다.
루앙프라방은 절의 도시다. 옛날에는 절이 60개나 되었는데 많이 불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20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루앙프라방 이라는 말 자체가 신성한 부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구 도시 지역은 전체가 유네스코 에 인류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다고 한다.
남간강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니 산으로 올라가는 아주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순전히 돌산인데 이 돌들을 교모 하게 이용해서 절을 지어 놓았다. 암석들이 기울어져 있었고 석탑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석굴 안에는 배 나오신 앉아계신 부처님 도 있었다. 절의 이름이 왓촘씨 절 이라고 한다. 들어 갈 때 입장료 20000킵을 받았다. 이 절의 특징은 부처님께서 이 산에 오신 적이 있는데 부처님의 발자국 하나가 돌에 찍혀서 지워지지 아니하고 지금도 남아 있었다.
누각 같은 것을 지어서 부처님 발자국을 비바람을 부 터서 보호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부처님 발자국을 보았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컸다. 이렇게 큰 발을 가지신 부처님은 얼마나 크셨을 까. 또 부처님 손 바닥은 얼마나 컷을까. 여의봉을 휘두르며 재주를 부리는 손오공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간강을 따라서 나있는 킹키싸라쓰 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메콩강을 만나게 된다. 메콩강을 마주하고 아주 큰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와씨엥똥 절 이라고 한다. 동남아의 절은 다 아름다운데 라오스의 절들은 특히 더 아름답다. 지붕에는 금색 찬란한 번개모양의 기다란 문양을 세워 놓아서 절이 금방 하늘로 날아 오를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이 절에는 길이가 백 미터나 되는 긴 카누 같은 배를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열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극락 강을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라고 한다. 나는 그 배에 올라 가보았다. 내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극락에 가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도 나는 배에서 내려서 나무 그늘을 찾아가서 낮잠을 잤다. 낮잠이 극락보다 급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름 모를 꽃 잎들이 하염없이 내 가슴위로 내렸다.
시내에는 또 다른 절도 있었는데 이 절에는 황포승복을 입은 동자 스님들이 많이 있었다. 시내에는 재래 시장도 있었다. 어떤 현지인이 바나나 잎으로 싼 떡을 하나 산다. 나도 하나 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떡은 다른 떡에 비해서 값이 상당히 비쌌다. 호스텔에 와서 먹으려고 바나나 잎사귀를 벗겨보니 떡이 아니었다. 벌집의 하얀 애 벌래 가 들어있는 부분을 찐 것이었다. 나는 눈 딱 감고 맥주하고 해서 먹었다. 맛 있었다.
이 호스텔에는 젊고 아름다운 일하는 아가씨가 세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두머리 격인 조그맣고 예쁜 끼엘레 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25살 이라고 한다. 아이가 몇이나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 아이가 있다고 한다. 큰 아이가 몇 살 이냐고 물었더니 열 한 살이라고 하였다. 나는 잠 간 의아해 졌다. 그리고 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25에서 11을 빼면 얼마가 될 까. 이 아가씨가 도대체 몇 살에 애기를 낳은 거야.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이 아가씨가 웃는다.
거리의 곳곳에는 당신 몸을 가리시오 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라오스는 너무 더워서 서양 여자 아이들이 거의 벗고 다녔다. 또 거리의 어떤 곳에 하얀 거물이 있었는데 담장이 굉장히 높았다. 이 담장 높은 건물에서 늙고 아름다운 서양여자가 근사한 차를 타고 나온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경비원 에게 여기가 무엇 하는 곳이냐고 물어 보았다. 옛날에는 감옥 이었는데 개조해서 지금은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루 밤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미화 1000달러라고 한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머무는 호스텔은 하루 밤에 3달러였기 때문이었다.
또 어디를 갔더니 김삿갓식당 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한국말과 영어로 쓰여있었다. 나는 루앙 프라방에 한국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떤 중년이 좀 지난 남자분이 나왔다. 나는 혼자 루앙 프라방에 놀러 왔다고 말하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이 분은 원래 한국에서 간판 제작소를 운영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마사지 업소를 운영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했다. 그 뒤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이 적성에 안 맞아서 혼자서 월남의 사이공으로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 음식점을 개업 하셨다고 한다. 돈을 좀 벌어서 가족을 모두 사이공으로 이주 시켰다고 한다.
마누라와 자식들은 사이공에 남겨두고 혼자 루앙 프라방에 와서 김삿갓 식당을 차렸다고 한다. 손님들이 현지인들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한다. 많이는 오지는 않지만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가끔 온다고 했다. 그러면 적자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하였다. 음식은 현지 여자들을 가르쳐서 만들고 있지만 중요한 요리는 자기가 직접 한다고 하신다. 나에게 커피를 한잔 주셨다
내가 감옥을 개조해서 만든 호텔 이야기를 하였다. 하룻밤 숙박료가 1000달러면 너무 비싼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말씀 하신다. 그 전에 일본의 황태자가 여기 구경 온 적이 있는데 그분이 머 물었던 호텔은 방값이 하룻밤에 미화 3000달러였다고 말씀 하신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 분 이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 한마디가 있다. 우리는 여기 100년을 살아도 이방인 입니다. 나는 그 분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는 무수한 인종들이 살고 있고 너나 나나 다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루앙프라방은 이번 나의 동남아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처음에 도착했던 하노이로 돌아갔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가보는 것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은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11년 동안의 해외 배낭여행 중 아프리카 여행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나는 아프리카에 있는 이집트와 모로코는 벌써 갔다 왔지만 이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중동국가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아랍인들이요 종교는 이슬람교 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 까.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머리 속에 늘 그리는 아프리카 여행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여 요하네스버그 빅토리아폭포 빅토리아호수 그리고 탄자니아 와 케냐를 차례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77세가 되어버려서 나의 몸이 더 이상의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허용해 줄 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또 나는 진짜 아프리카 국가에 갔다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때 되도록이면 나의 모습을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새카만 아프리카에 서 이 일이 가능할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아니하였다. 또 아프리카를 가려면 영국 런던에서 머물렀다가 비행기를 바꾸어 타야 하는데 영국의 일월은 너무 추워서 추위를 몹시 타는 늙은 노인인 나는 도저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나의 신상을 위해서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한 마디 말이 나의 가슴을 후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해본 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나는 나의 마지막 혼자서 하는 해외 배낭여행의 목적지를 케냐와 탄자니아로 정하고 또 모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케냐와 탄자니아
2015년이 힘차게 밝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용감하게 77세가 되었다. 나는 1월 1일부터 31일 일 까지 한 달간 혼자서 배낭을 메고 아프리카 의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였다. 작년에는 석 달 동안 동남아를 여행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무릎이 많이 좋아져서 지팡이는 짚지 아니하였다. 나는 1939년 생이다. 늙은 노인인 내가 혼자서 배낭을 메고 해외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 훼어챠일드 라는 미국전자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그때 출장으로 홍콩과 미국을 가 보았다. 그 회사를 그만둔 후에 살 곳을 찾아서 또는 일 거리를 찾아서 호주 사우디 아라비아 태평양 섬 등을 전전 하였다. 그 뒤에 미국에 정착한 후로는 해외 여행의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마크 투웨인 의 말 을 접하게 된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 지면 해 본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더 후회하게 된다. 가 그것이다. 나는 늦었지만 여행을 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혼자서 여행한다. 단체 여행도 가보았고 둘이서 하는 것도 해 보았다. 단체 여행은 가이드만 따라 다녀야 되고 보여 주는 것만 보아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따라 다니는 것 같다. 둘이서 하는 여행은 현지인 이나 다른 여행객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 들어서 보는 것 외에는 별로 배우는 것이 없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백 번도 더 망설인다. 밥은 어디서 먹을지 감기는 걸리지 않을지 설사 병에는 걸리지 않을지 변비는 걸리지 않을지 개에게는 물리지 않을지 길은 잃어 버리지 않을지 내가 잘 곳을 어떻게 찾아 가야 할지 도둑은 맞지 않을지 차에 치이지는 않을지 내가 가는 곳에 병원은 있을지 강도는 당하지 않을지 등등 걱정이 태산 같다. 나는 배낭을 메고 떠나는 날까지 매일 밤 잠을 못 잔다.
그래도 나는 결국 여행을 떠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늙었으니 곧 죽을 것이다. 집에 가만이 편하게 있어도 죽고 고생 하면서 여행해도 죽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죽기 전에 세상을 보자. 사람을 만나자. 저승에 가서 말 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만들자.
나의 어린 손주는 나를 거지 여행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나는 뉴욕에 갔을 때 무숙자 수용소 에서 열흘을 잔 적이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부근의 호텔 방 값은 하루 밤에 보통 400불을 상회한다. 네 사람이 자는 호스텔 방 도 침대 하나에 100달러씩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거지 수용소를 찾아갔다.
외국 여행 때 비행기표나 호스텔 침대 값은 깍 아 주지 않는다. 오직 절약할 수 있는 길은 교통비와 음식이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 하고는 택시를 타지 않는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 할 때나 국경을 넘을 때에는 되도록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어떤 호스텔 에서는 아침 식사가 나온다. 아무리 거친 음식 이라도 다 먹도록 한다. 어떤 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마켓이 어디 있는지 또는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음식점이 있는 곳을 찾아 내야 한다. 관광객 상대 업소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 에서 미화 50전 하는 밥을 사서 세끼로 나누어 먹은 적이 있다. 혹자는 말한다. 도상국가나 가난한 나라에 가면 돈을 써야지 그 나라 경제가 살아 날것이 아니냐 라고.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나 같은 돈 없고 늙은 노인에게는 해당 무 다. 나는 돈을 아끼고 아끼어서 100개국을 여행하였다.
되도록 현지 말을 좀 배우고 현지인처럼 행동하고 현지인 같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강에 유의하고 교통사고나 강도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야 한다.
나는 1월 1일부터 1월31일 까지 한 달간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를 혼자서 배낭여행 하였다. 로스 엔젤레스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런던과 이스탄불을 거쳐서 나이로비에 도착하였다.
마사이마라 야생동물 국립동물원에서 밤새 사냥한 들소를 뜯어 먹고 있는 사자를 보았다. 근처에서 자기들의 식사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십 마리의 하이네나 도 보았다. 그 용맹하다는 마사이족 마을에도 가보았고 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서 주민의 99%가 무슬림 이라는 인도양의 잔지바르섬에 도 가보았다.
킬리만자로 산에도 가보았다. 포터를 동반한 사파리를 따라가려면 미국 돈 2000달러가 든다. 난 단돈 10불에 다녀왔다. 무릎이 아파 정상등정을 포기하고 킬리만자로 입구인 론드로스 게이트 까지만 갔다 온 것이다. 갈 때는 현지주민들이 이용하는 달라달라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오 가는 길 은 비포장이 많아 차가 몹시 흔들렸고 힘이 들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숙소인 유스호스텔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이 되었다. 사람을 짐짝처럼 많이 태워서 현지주민 여자와 코가 닿을 정도였다. 어떤 젊고 아름다운 궁둥이가 큰 여자가 내 무릎 위에 털썩 앉는 바람에 나는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년에 혼자서 아프리카를 배낭여행 한다는 것은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참으며, 사랑해서는 안될 여자를 사랑하는 일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재미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 후의 느낌
나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가기 전에 이미 다른 아프리카 국가를 가본적이 있다. 이집트 와 모로코를 가 보았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고 하기 보다는 아랍국가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종이 아랍인들 이고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나는 이미 거의100여개국을 여행 하였지만 진짜 아프리카 여행은 미루고 또 미루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지방을 여행하게 되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또 되도록이면 가난한 거지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혼자서 생전 모르는 곳을 걸어 다니기 때문에 봉변이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마이카 에 갔을 때는 얼굴과 머리를 너무 태워서 나를 현지인 취급을 하였고 아르헨티나에 여행 했을 때는 어떤 거지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 마켓이나 상점에 가면 경비가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닌 적도 있었다. 실제로 강도가 다가와서 내 모습을 보고는 돌아서서 가버린 적도 있었다.
아프리카는 영 자신이 없었다. 주민들 거의가 100% 흑인들이고 또 병도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자꾸만 뒤로 미루고 망설여 졌다. 그러나 77세가 되어버린 올해는 지금 안 가면 너무 늦어 버려서 내 일생에 아프리카 여행은 영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고 여행을 댕겨도 죽는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아프리카를 가기로 작정 하였다.
나는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기를 잘했다. 사람들은 색갈만 좀 다를 뿐이지 사는 원리는 어디나 다 똑 같다. 아프리카는 서방세계나 동방세계에 비 해서 좀 가난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더 순박하고 더 인심이 후 한 것 같았다. 또 그들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2013년그러니까 내 나이 75세때 쿠바에 갔다. 1월 한 달간 갔다 왔다. 나는 늙었기 때문에 1월이 되면 추위를 피해서 따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는 수년 전 부터 쿠바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미국과 쿠바 사이에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돈을 얼마 내고 멕시코의 칸쿤에 가면 쿠바에 들어 갈수 있는 여행카드를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보내라고 하는 액수의 돈은 쿠바 여행카드와 칸쿤에서 쿠바의 수도 아바나까지 의 왕복 비행기표가 포함된 것이어서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나는 은행에 전화를 해서 여기에 돈을 보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은행에서의 답변은 돈이 빠져나간 후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심스러웠지만 이메일로 돈을 보냈다. 그만큼 쿠바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칸쿤으로 갔다.
공항에 내려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대합실로 나갔다. 쿠바항공 사무실을 찾아 갔더니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안내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내일 아침에는 문을 연다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도 늦었고 또 돈도 아낄 겸해서 대합실 한쪽구석에서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서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쿠바항공 사무실로 갔다. 여권을 주었더니 무슨 목록과 대조를 해본다. 내 얼굴을 몇 번 쳐다보더니 여행카드 묶음 속에서 내 카드를 찾아서 준다. 이미 내 카드는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는 무슨 소련제라고 하는데 만원이었고 한 백 명 정도 탄 것 같았다. 비행기는 뜨자 마자 내리는 것 같았는데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조금 더 걸린 것같았다. 아바나 공항 입국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쿠바를 찾는 여행객의 수는 일년에 300만명 정도라고 한다.
젊고 아름다운 흑인 여자 이민국 직원 앞에 섰다.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무엇하러 왔느냐 직업이 무엇이냐. 나는 사실대로 미국 로스엔젤리스 검찰청의 범죄 피해자 보상국에서 일한다고 말하였다. 이 여자가 눈을 크게 뜨더니 전화기를 든다.
조금 후에 중년 남자직원이 오더니 여권을 달라고 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한참 만에 나오더니 나더러 돈을 얼마나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현금 3000달러와 신용카드를 가지고 왔다고 대답하였다. 돈을 꺼내 보라고 한다. 나는 바지 속 주머니와 혁대 속에 숨겨가지고 다니는 모든 돈을 꺼내서 바닥에 늘어 놓았다. 카드도 꺼내 놓았다. 잘 살펴 보더니 도로 넣으라고 한다.
나는 통과 되었다. 나는 내가 늙었기 때문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쿠바에 눌러 살 가보아서 그랬는지 또는 미국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른다.
시내를 들어가는 다른 여행객들과 택시를 합승하여 아바나 시내로 갔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 이름은 ‘이라이다’이었다. 호스텔 월드를 통하여 예약했는데 인터넷에 나온 아바나의 호스텔은 이것 하나 뿐이었다.
이 호스텔의 여자 주인 이름이 바로 ‘이라이다’이었다. 방은 두 개가 있었다. 내 방에는 2층 침대 한 개와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단층 침대가 있었다. 즉 네 사람이 잘 수 있는 방이었다. 다른 방에는 침대가 네 개 있었다. 이 호스텔은 손님이 다 차봐야 총 8명이 된다.
이라이다 는 결혼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자기집에서 자고 아침이 되면 호스텔로 와서 일했다. 그러니까 모자 단 둘이서 이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다. 사이트에는 이 호스텔은 아침을 준다고 되어 있었는데 아침을 안 준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인터넷에는 하루 밤에 9불로 나와 있는데 10 달러씩 내라고 한다. 나는 내가 호스텔 월드를 통해서 예약한 기간 동안은 9달러씩 밖에는 못 주겠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렇게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나와 있는 대로 아침밥도 달라고 하였다.
이 모자는 인터넷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아침밥 문제는 호스텔 월드에 연락해서 고치겠다고 말하였다. 숙박비 문제는 하루밤에 10달러씩 주지 않으면 경찰에 전화하겠다고 하였다. 내가 그러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은 내가 있는 바로 앞에서 경찰서로 전화를 하였다. 뭐라고 한참을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내가 궁금한 눈으로 쳐다 보았더니 예약기간 동안 즉 5일은 9불씩 내고 그 다음부터는 10달러씩 지불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그러자고 하였다. 나는 다른 데로 갔다가 이 호스텔로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총 15일 밤을 잤다.
쿠바는 어디를 가서 환전을 해도 환율이 다 똑같았다. 쿠바에는 두 가지 종류의 돈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는 쿠바 페소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 달러로 환전이 가능한 페소이다. 쿠바 페소의 다른 이름은 쿱 이고 환전 가능한 페소의 다른 이름은 쿡 또는 쎄우쎄라고 하였다. 쿱은 쿠바 주민들이 사용하는 돈이고 쿡 은 외국인이 사용하는 돈이다. 1쿡의 가치는 1달러와 같기 때문에 쿡 을 그냥 달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환전소에 가서 미화 100달러를 주었더니 실제로는 100 쿡 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간 모자라게 준다. 왜 그러냐고 하였더니 수수료를 제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쿡 의 얼마간을 쿱으로 바꾸었다. 1 쿡을 주면 26 쿱 을 주었다.
아바나에는 상점이나 음식점이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현지인들이 쿱으로 물건을 사는 가게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객들이 쿡으로 상품을 사는 외국인 전용 상점이다. 물건도 완전히 다르고 가격도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병물 같은 것은 외국인 상점에 가서 샀지만 식사는 현지인 식당에 가서 먹었다. 값이 무척 저렴하고 먹을만하였다. 나는 모든 필요한 것을 가능한 한 현지인 가게에 가서 샀다. 내가 늙어서 그런지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더러 무슨 신분증 같은 것을 보자고는 하지 아니하였다.
예를 들면 한끼 식사가 외국인 음식점에 가면 미국 돈 10달러 정도 들지만 현지인 식당에서 먹으면 미국 돈 50전 정도면 넉넉하다. 즉 20배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현지인 영화관은 미화 10전만 주면 영화를 관람할 수가 있었다. 쿠바 국민들은 전표 같은 것이 있어서 음식 재료나 고기 등이 거의 무료로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의사의 한달 월급이 미화 100달러가 채 안된다고 한다.
모든 병원은 무료이고 따라서 산모가 병원에 가서 애기를 낳아도 돈 한 푼 낸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국가에서 장례를 치러 준다고 하였다.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사관은 없었고 북한 대사관이 있었다.
내 호스텔은 아바나의 베다도 구역에 있었다. 호스텔에서 조금만 나가면 큰길이 있고 여기서 시내버스를 한번만 타면 시내 중심지로 갈수가 있었다. 시내 중심지는 바로 바닷가에 있다. 이 바닷가에는 모래가 없다.
바닷가 전체를 뚝방을 쌓아서 방파제를 만들어 놓고 바로 그 방파제 바로 밑에 아바나에서 제일 긴 길인 제일 아베뉴 만들어 놀았다. 이 길 안에 아바나 시내가 있는 것이다. 파도가 높을 때는 바닷물이 방파제 벽을 치고 위로 넘어왔다. 나는 한번 이 방파제 위에서 낮잠을 자다가 물 벼락을 맞았다.
아바나에 다니는 모든 차들은 버스 트럭 택시를 포함해서 99% 고물 차들이었다. 친미 정권이었던 바스티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공산 정부를 세우자 미국이 국교를 단절하고 무역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내 호스텔에서 제일 가까운 명소는 네크로폴리스다. 네크로는 죽었다는 말이고 폴리스는 도시라는 뜻이니 죽은 자의 도시 즉 공동묘지다. 공식 명칭은 콜럼버스 이름을 따서 ‘콜론 세메테리’라고 부른다. 여기의 묘들은 모두 대리석 묘다.
이 공동묘지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을 적시는 대리석 조각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조각 중의 하나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천사가 슬픈 표정을 짓고 고개를 떨군 채 꽃병의 꽃과 물을 땅바닥으로 쏟아 버리고 있는 것이 었다. 죽으면 만사 휴지인 것이다.
나는 이 공동묘지에 자주 갔다. 가깝고 조용하고 먹을 것도 있고 편히 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와서 꽃도 두고 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과일도 두고 간다. 나는 과일을 럼주하고 해서 먹는다. 그리고 비석은 있지만 비어있는 묘 위에 들어 누어서 늘어지게 잤다.
하루는 잘 차려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꽃 한다발을 한 아름 가지고 와서 어떤 묘 앞에 놓는다. 비석에 붙여놓은 어떤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 사진을 쓰다듬는다. 이 묘는 다른 묘에 비해서 상당히 규모가 컸다. 나는 누구냐고 물었다. 손녀라고 한다. 왜 죽었냐고 물었다. 이 할아버지는 자기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든 뒤 자기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피스톨라 라고 말하였다. 손녀가 권총을 맞아 죽은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물어 보지 않았다.
또 하루는 아바나 시내에 나갔다가 시내 버스를 타고 호스텔로 돌아오는데 그만 버스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버스 종점까지 가서야 잠이 깨었는데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가 없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베다도로 갈려면 무슨 버스를 타야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늙은 흑인 할머니가 자기도 그리로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베다도에서 내렸고 밤인데도 나는 내 호스텔을 쉽게 찾아 갈 수가 있었다. 나는 의리가 깊은 사람이라 다음날 아침 이 할머니의 집을 찾아 갔다. 이 집에는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남편은 없고 중년이 다 되어 가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하고 같이 살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나이는 모르겠지만 하도 늙어서 눈가가 짓 물어서 늘 눈물을 찔금 찔금 흘리고 있었다.
나는 이 할머니에게 밥도 사주고 유명하고 진하고 맛있는 쿠바 커피도 사 주었다. 이토록 좋은 커피가 미국 돈으로 겨우 10전 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물어 보지 못했다. 어떻게 다 큰 자식들이 아직도 어머니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부모의 지나친 자식에 대한 사랑이 혹시 자식을 망쳐 놓지나 않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의 위 침대에는 청년과 중년 사이쯤 되는 불란서 청년이 들어왔다. 자기는 파리에서 열차 경찰관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키가 크고 인물이랑 체격이 좋았다. 아직 미혼이고 쿠바에 섹스 관광을 하러 왔다고 하였다. 유도도 배웠고 태권도도 할 줄 안다고 하였다. 이 사람은 밤 마다 나갔다가 새벽에야 돌아왔다. 그리고 자면서 꿈을 꾸는지 몸을 심하게 흔들면서 섹스하는 몸짓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번은 심통이 나서 너는 조마 간 쿠바에 너의 자손이 많이 생기겠구나 라고 하였더니 자기는 섹스할 때 반드시 콘돔을 끼고 한다고 하였다. 내가 호텔에 갈려면 돈이 많이 들겠구나 라고 하였더니 여기 동네에 조그만 돈을 받고 방을 빌려주는 집이 많이 있다고 기쁜 소식을 가르쳐 주었다.
이 사람이 다음날 바라데로 간다고 하였다. 친구의 차로 가는데 여분의 자리가 있다고 하였다. 나는 얼마간의 돈을 주기로 하고 동승하였다. 아바나에서 바라데로 까지는 133킬로미터 거리로 두 시간 정도 걸렸다. 나는 바라데로의 번화가에서 내렸고 오후 5시에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이 불란서 청년을 5시에 다시 만났다. 내가 물어 보지 않았는데도 이 청년은 또 그 사이에 섹스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여자가 콘돔 없이 그냥 하자고 해서 애를 먹었다고 쓸데없는 소식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바라데로는 손가락처럼 가늘고 길게 생긴 반도로 길이가 20킬로미터쯤 되었다. 땅이 하도 가늘어서 어디서든지 양쪽 바다가 다 보인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바닷가로 이름이 나있고 일년에 찾아오는 관광객이 백 만 명을 상회 한다고 한다. 쿠바 일년 관광객의 숫자가 300만명 이라고 하니 쿠바 관광객의 삼분지 일이 여기로 오는 것이다. 실제로 쿠바에 찾아오는 단체 관광객들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데로에 머물면서 아바나 에는 하루 정도만 갔다 온다고 하였다.
내가 다음에 찾아간 도시는 산타 클라라이었다. 이 불란서 청년과 같은 버스를 탔는데 나는 산타 클라라에서 내리고 이 사람은 버스를 바꾸어 타고 트리니다드로 바로 간다고 하였다.
나는 현지 돈이 떨어져서 버스 정류장에서 돈을 바꾸었다. 사무실 안에는 돈 바꾸어 주는 사람 말고도 승객인듯한 현지 청년이 한 사람 더 있었다. 내가 바지 안쪽의 비밀 주머니에서 미국 돈을 꺼내자 이것을 본 현지청년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였다. 나는 마음이 불안하였으나 밖에서 불란서 청년이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때 현지 청년이 나에게 뜻 모를 하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를 붙잡았다. 밖에 있던 불란서 청년이 전광석화와 같이 들어오더니 이 현지 청년 목을 감아 쥐고 단숨에 제압해 버린다. 불란서 청년은 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자기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섬뜩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산타 클라라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다. 체게바라 의 기념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체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1928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나보다 겨우 열 한 살 더 많은 것이다. 그는 39세 젊은 나이에 볼리비아에서 총살 당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던 학창시절에 중남미를 모터를 장착한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중남미의 모든 국가의 없는 자들이 가진 자들로 부 터서 철저하게 착취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장래가 보장되는 의사가 되었지만 청진기를 내려놓고 대신 총을 잡는다. 쿠바로 가서 카스트로와 손을 잡고 쿠바의 공산 혁명을 완성시킨다. 다음에 같은 목적으로 볼리비아로 가서 공산 혁명군을 훈련시킨다. 그러다가 결국 볼리비아 군에 잡혀서 총살 당하고 만다.
산타 클라라는 그의 제 2부인의 고향이다. 그 여자의 이름은 알레이다인데 카스트로 게릴라군의 전투요원 이었다. 여기에 그의 기념관이 있고 체게바라의 유해의 일부와 태운 재를 넣어둔 함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의 기념관은 크고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이었다.
기념관 앞에는 게바라의 상징인 베레모에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한 손에든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상상외로 많은 조문객들이 그의 빈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기념관 안에는 그의 유년시절 청년시절 전투원시절 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가 사용하던 의료 기구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는 의사인 동시에 치과의사이기도 하였다.
행하지 않는 의는 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체 게바라의 기념관 방문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산타 클라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트리니다드라는 조그만 도시로 갔다. 이 곳은 옛날 집들과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어있는 도시다. 도시전체의 길이 옛날에 만들어진 돌길이었다.
내가 묵었던 호스텔의 주인은 흑인여자로 중년을 넘긴 분이었는데 나에게 지나치게 친절하였다. 그리고 저녁도 같이 먹자고 하였다.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아주 적은 돈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는 그분은 나에게 흥미를 갖지 않는 듯 하였다.
옆집에서 돼지 우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베란다에 올라가서 보았더니 커다란 도야지가 계속 꿀꿀거리고 자기 몸을 세게 돼지 집에다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저 돼지가 틀림없이 배가 고파서 저러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람이나 돼지나 배가 고프면 못할 짓이 없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트리니다드에는 아름다운 성 프란시스코 성당이 있었다.
나는 어떤 길을 끝까지 걸어 보았는데 그 끝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돌로 집 같은 것을 만들어서 가족 묘지로 사용하는데 나는 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항상 궁금 하였다. 마침 인부들이 그 가족 묘지 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 들어가 보았다.
철문을 열면 땅속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을 내려 가보았다. 그 밑은 그저 커다란 공간일 뿐이었다. 이 공간 안에 칸을 만들어 놓고 시체가 들어있는 철제 관을 놓아두고 있었다. 사람을 땅속에다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중에 놓아두는 것이였다. 참으로 이상한 장례 법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트리니다드에서 버스를 타고 아바나로 돌아왔다. 버스 정거장은 혁명의 광장 부근에 있었다. 이 광장은 굉장히 크고 넓어서 수 만 명의 군중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다. 이 광장에는 아주 높고 아름다운 기념탑이 있었다. 그 앞에 어떤 인물의 조각상도 있었다. 이 사람은 문학가요 쿠바독립의 선구자인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걸어서 그전의 호스텔로 돌아왔다.
아바나에는 아주 크고 긴 강이 흐르는데 이름이 알멘다레스 강이다. 이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 나의 호스텔이 있는 베다도 지역에 있었다. 따라서 나는 걸어서 이 강에 여러 번 갔다. 이 강변을 따라서 알멘다레스 공원이 있었다. 이 공원은 아주 크고 길다. 열대 수림이 우거져 있어서 공원이 온통 나무그늘이다. 나는 현지인 식당에서 산 음식과 술을 가지고 가서 먹고 마시고는 나무 그늘에 들어 누어서 늘어지게 잤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느 골목길로 들어 섰는데 점치는 집이 죽 늘어서 있었다.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무슨 흑인 우상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향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공산 국가에서도 점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먹고 마실 것을 다 주는데 무슨 걱정이 있어서 점을 보러 오는지 궁금하였다.
이 강으로 가는 도중에 중국 화교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쿠바의 인구분포는 백인이 64% 흑인이 9% 혼혈이 27% 동양인은 0%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기재다. 왜냐하면 중국사람들이 또는 그 후손들이11만명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인을 1%로 기재하여야 한다. 쿠바의 인구는 1100만명이다.
이 중국사람들은 1800년대에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들은 남자들만 왔기 때문에 흑인 여자와 통정을 하거나 결혼해서 혼혈아들을 낳았고 백인 여자들과도 같은 절차를 밟아서 혼혈아를 생산했다고 한다. 이들은 1898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스페인을 위해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카스트로의 공산정부가 들어서고 그들이 운영하던 음식점등 사업체가 몰수당하자 많은 중국인들이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나는 시내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보았다. 입구에 커다란 중국식 대문을 세워 놓았다. 위에는 붉은 기와를 얹어 놓았다. 내가 가 본 화교 공동묘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사람 같지가 않은 혼혈들이었다.
강 어귀의 이쪽 편은 공원도 있고 현대식 건물도 있고 해서 그런대로 괜찮지만 반대편 쪽은 빤히 보이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아니하였다. 나는 작심을 하고 먹을 것과 음료수를 싸가지고 하루 그쪽을 향해서 떠났다. 걷고 또 걷고 다리를 건너고 하여서 간신히 그곳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문제가 생겼다. 소변이 마려운데 들어 갈 곳이 없다. 이 곳은 집들도 없고 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나는 어느 빈 건물의 벽에다 대고 실례하였다. 이때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젊고 아름다운 어떤 흑인 처녀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도중에 그만 둘 수도 없고 하여서 계속 하였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내 쪽을 빤히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이쪽 강어귀에는 무슨 연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비닐봉지 빈 병 나무 가지 등 쓰레기가 잔뜩 밀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잎사귀가 큰 커다란 나무들이 수십 그루 서 있었다. 나무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나무 밑에 무슨 열매들이 떨어져 있었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있었고 견과류의 껍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큰 돌 위에 열매를 올려놓고 작은 돌로 톡톡 때렸다. 처음에는 노란 겉껍질이 벗겨지고 그 다음에 딱딱한 속껍질을 깨니 그 속에서 하얀 속살이 나왔다. 입 속에 넣었더니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이것을 나는 아바나 호두라고 이름 붙였다.
아바나 시내는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가게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았다. 다만 다니는 차들이 모두 구식 차 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게 다녔고 상거래도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가의 간섭이 심하다 던지 무슨 강제노동을 한다 던지 하는 것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나는 점심을 먹고 노곤해져서 누울 곳을 찾았다. 어느 큰 건물 옆에 큰 나무들이 있었고 그늘이 있었다. 나는 나무그늘 밑에서 늘어지게 잤다.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 보았더니 아바나 호두들이 나무 밑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주워서 들고 어느 건물 밑으로 갔다. 그늘을 찾아간 것이었다.
나는 건물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이 아바나 호두들을 돌 맹이 위에 올려놓고 작은 돌맹이로 살살 두들겨서 까먹고 있었다. 이 건물은 좀 으슥한 곳에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호두 까먹는데 열중해 있어서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나지 않았다.
이때 하늘에서 내발 앞으로 무엇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조그만 종이 뭉치다. 주어서 종이를 펴 보았더니 속에 조그만 돌맹이가 한 개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는 다름아닌 돈 이었다. 하느님이 돈을 돌맹이에 싸서 불쌍한 나에게 보내신 것이었다.
하늘을 쳐다 보았다. 어떤 젊고 잘 생긴 신사가 옥상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고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돈은 바로 이 신사가 보낸 돈 이었다. 또 나는 바닷가에 있는 어느 아파트 건물 앞에서 이 호두를 까먹고 있자 아이들이 몰려와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나는 다음날 버스를 타고 비냘레스로 갔다. 아바나에서 200킬로미터이고 네 시간이 걸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여자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서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아우성이다. 나는 이미 예약을 해놓은 터이라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이 수리 중이라서 나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고 부근의 다른 집을 소개해 주었다. 내가 호스텔 월드에 이미 지불한 돈은 돌려 주었다.
내가 새로 찾아간 집의 주인들은 상냥하고 친절하였다. 묵고 있는 손님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이 집에 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였다.
어디서 구해 오는지 모르지만 내가 미화 6 달러를 주면 커다란 민물 가재를 가지고 와서 아침이면 요리를 해 주었다. 맛있게 먹고도 남아서 싸가지고 나가서 점심으로 먹었다.
비냘레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산동네였다. 인구 3만명의 조그만 도시로 아름다운 산 경치와 옛날 건물들 때문에 유네스코 인류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첫 날은 돈을 주고 가이드를 따라서 산과 옛 동네 구경에 나섰다. 일행이 10명쯤 되었는데 동양인은 나 혼자였고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도 나 혼자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여행이었다. 산 가까이 까지는 갈수 있어도 산에 들어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여러 가지 그곳에서만 자라는 식물들을 소개해 주었다. 농부들이 들에서 일하는데 소로 밭을 갈고 있었다. 한참을 가니 조그만 동굴이 하나 나왔는데 옛날에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였다.
우리는 드디어 어느 농가에 도착하였다. 이 농가는 담배경작을 주로 한다고 하였다. 주위의 모든 밭들이 담배 풀로 뒤덮여 있었다. 담배 농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지정한 농가에서만 기를 수 있다고 하였다. 담배 씨는 정부에서 배급해 주는 것만 뿌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도보여행에는 점심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 농가에서 직접 만든 음식이 나왔다. 비냘레스 토속음식으로 독특하고 맛있었다. 점심이 끝난 뒤 시가 만드는 시범이 있었다. 담배를 수확하면 90%는 정부에 바치고 10%만 농가가 가진다고 한다. 이 농부는 시가를 직접 만들어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판다고 하였다. 다들 몇 개씩 샀고 나도 여섯 개 샀다. 세 개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돌아 올 때는 큰 길을 따라서 오니 금방이었고 가이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음날은 동네 뒷산에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보여서 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근사한 호텔이었다. 거기서 내려다보니 비냘레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옹기종기한 아름다운 동네였다. 호텔 에서 내려올 때는 반대편을 택하였다. 밑에는 호텔 전용 정화조가 있었는데 완전 밀폐가 안 되었는지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더 내려 왔는데 길이 없었다. 조그만 개울이 하나 있었다. 이 개울은 물이 흐르지 않는 뻘 개울이었다. 신발을 벗고 바지 가랑이를 올렸다. 밑 바닥은 진흙이었고 발이 푹푹 빠졌다. 한발을 올리면 다른 발이 빠져서 애를 먹었다. 그래도 나는 성공하여서 뚝 방으로 올라왔다.
문제가 생겼다. 발을 씻어야 하는데 물이 없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조그만 양동이가 하나 있고 그 속에 물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냄새를 맡아 보았더니 깨끗한 물이었다. 주위를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동안 망설였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 하였다. 이 물은 필시 하느님께 서 나를 위해서 이곳에 마련해 두신 것이라고. 나는 세수도 하고 발도 깨끗하게 씻었다. 그 위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나는 소나무 그늘에 들어 누어서 늘어지게 잤다.
비냘레스 번화가 길은 아주 짧다. 가운데 오래된 옛날 성당이 하나 있고 길 좌우편으로 가게 와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목각 등 기념품을 팔고 있고 여러 가지를 팔고 있었다. 어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기계에서 직접 나오는 아이스 크림을 파는데 맛있었다. 길가 그늘에 앉아 있으면 어제 만났던 여행객을 오늘도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다음 날은 혼자 걸어서 인디오 동굴로 갔다. 한 한시간쯤 걸으면 된다. 큰 길가 바로 옆에 커다란 동굴 입구가 있다. 동굴입구 옆으로 포장된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동굴 후문이 나온다. 후문 앞은 넓은 광장을 만들어 놓았고 여기에 노천 음식점이 있었다.
나는 동굴후문으로 들어가서 앞문으로 나왔다. 동굴은 대단히 길었고 군데군데 동굴 옆구리를 파서 거주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한눈에 보아도 이 속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인디오 즉 쿠바의 원주민들이 살았고 그 다음에는 도망친 흑인노예들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아니하였다.
비냘레스는 쿠바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미국의 플로리다 남단에서 아주 가깝다. 오로지150 킬로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미국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이 여기로 건너 왔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인디언들을 스페인말로는 인디오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쿠바에는 인디오가 한 명도 없다.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왜 죽었을까.
자연에서만 살던 인디오들은 면역성이 없어서 백인들이 지니고 온 전염병에 걸려서 죽었다. 백인들의 학정에 못 이겨서 집단 자살하였다. 스페인의 점령군들이 일부러 죽였다.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어떤 쿠바의 백인 학자들은 쿠바에는 아예 인디오들이 살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는 카브리해에 있는 다른 섬인 자메이카와 푸에르토리코 에도 가보았는데 마찬가지 현실을 목격하였다. 백인과 흑인들만 살고 있었고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비냘레스 구경을 끝내고 아바나로 돌아왔다. 다시 옛날의 그 이라이다 호스텔로 찾아 갔다. 나는 이 호스텔에 세 번째 가는 것이다. 여기서 여러 날을 지냈고 여러 번 갔기 때문에 주인여자인 이라이다와 친숙해 졌다. 내 방에는 다른 손님이 없어서 나 혼자 잤다. 나는 이제 쿠바여행이 며칠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이라이다가 기다렸다 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하는 말인즉슨 어제 밤 늦게 한 꼬레아나 즉 한국여자가 와서 나의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자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불의 볼록한 형태가 아름다운 여자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여행객들을 항상 만나는 터이라 별 생각 아니하고 아침밥을 준비해서 먹고 나가려고 하는 참이었다. 이때 이 젊고 아름다운 한국여자가 방에서 나온다. 너무 젊고 어려서 나하고는 상대도 아니 되고 또 늙은이를 무시하는 한국 여자의 정서를 잘 아는 터이라 나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그냥 나가려고 하였다.
이 젊은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쿠바 여행을 마치고 내일 떠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괜찮다면 같이 나가자고 한다. 나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러자고 하였다. 우리는 고물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쿠바에는 두 종류의 택시가 있다. 신식 택시는 비싸고 구식 택시는 싸다.
이 처녀의 이름은 이민주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은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멕시코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하였고 스페인 말도 아주 잘 하였다. 학교가 방학 중 이라 쿠바에 혼자 놀러 왔다고 하였다.
나에게는 좀 버거운 듯싶은 이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래도 하여간 밥도 같이 먹고 헤밍웨이가 자주 갔다는 라 보데기다 델 메디오 술집에 가서 그가 즐겨 마셨다는 모히또 칵테일이라는 술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용기가 조금 생기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공산주의는 이론이나 이상은 좋지만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성공할 수 없는 경제제도라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였다. 내가 물어 보았다. 공산주의란 일은 자기 능력껏 하고 분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고. 그랬더니 이 아가씨가 대답하기를 분배는 공평하게 하는 것 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일은 사람마다 자기 능력껏 하고 분배는 그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해야 하는 것 이라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우리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즉 마르코폴로는 언어의 천재로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여 중국 왕의 사랑을 받았다.
마르코폴로는 이태리에 돌아온 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심심한 나머지 감방 동료들에게 중국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가 한 이야기를 한 동료죄수가 받아 적어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마르코폴로는 중국말과 이태리어를 유창하게 말하였지만 글은 읽고 쓸 줄을 몰랐다고 내가 가르쳐 주었다. 그랬더니 또 나를 더 빤히 쳐다 본다.
우리는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고 하루 종일 마시고 먹었다. 저녁까지 거창하게 먹었다. 아바나 항구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엘 모로라고 하는 큰 성이 있다. 이 성은 규모도 크거니와 커다란 대포들이 설치되어 있다. 적함이 아바나 항구로 들어오면 이 대포들을 쏘아서 쓰러뜨리는 것이다.
밤이 되면 이 엘 모로에서 관광객들을 위해서 실제로 대포를 쏘는 시범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리로 갔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대포를 쏘겠다는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성 구경을 그만두고 대포 쏘는 데로 갔다.
이 사람들은 대포를 그냥 쏘는 것이 아니라 무슨 군대의식을 진행하였다. 옛날 병사복장을 한 병정들이 소총을 메고 발을 맞추어 걸어 들어 온다. 소총을 내려서 서로 엇갈리게 세워 놓는다. 직각으로 걸어서 대포 있는 곳으로 간다. 한 병정은 화약함을 들었고 다른 병정은 대포 쑤시개를 들었다.
한 병정이 화약을 대포 입에다 넣는다. 다른 병정이 화약을 대포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는 대포알을 밀어 넣는다. 화약 심지를 대포 콧구멍에 꽂는다. 기다란 장대에 횃불을 밝힌다. 나팔이 울린다. 횃불을 심지에 갖다 댄다. 대포가 쾅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불을 토한다. 세 발을 차례로 쏘았다.
우리는 호스텔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런데 갑자기 이 아가씨가 ‘어디로 갈까요?’ 라고 질문을 하였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고 얼떨결에 ‘집으로 가지’ 라고 말하였다. 나는 곧 후회하였다. 택시를 타고 갈 때도 후회하였고 집에 가서도 후회하였고 자면서도 후회하였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나는 그때 왜 호텔로 가자고 말하지 못하였을까.
나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내가 늘상 가는 샤토 테니스장 에 갔다. 서 여사는 나하고 테니스 공치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나에게 공이 나쁘게 와도 내가 서여사가 치기 좋게끔 공을 좋게 넘겨 주기 때문이다. 나는 서여사에게 ‘어디로 갈까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서 여사가 말하였다. “아니 그래 주는 것도 못 먹었어. 바보네 바보.”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