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3년그러니까 내 나이 75세때 쿠바에 갔다. 1월 한 달간 갔다 왔다. 나는 늙었기 때문에 1월이 되면 추위를 피해서 따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는 수년 전 부터 쿠바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미국과 쿠바 사이에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돈을 얼마 내고 멕시코의 칸쿤에 가면 쿠바에 들어 갈수 있는 여행카드를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보내라고 하는 액수의 돈은 쿠바 여행카드와 칸쿤에서 쿠바의 수도 아바나까지 의 왕복 비행기표가 포함된 것이어서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나는 은행에 전화를 해서 여기에 돈을 보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은행에서의 답변은 돈이 빠져나간 후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심스러웠지만 이메일로 돈을 보냈다. 그만큼 쿠바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칸쿤으로 갔다.
공항에 내려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대합실로 나갔다. 쿠바항공 사무실을 찾아 갔더니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안내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내일 아침에는 문을 연다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도 늦었고 또 돈도 아낄 겸해서 대합실 한쪽구석에서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서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쿠바항공 사무실로 갔다. 여권을 주었더니 무슨 목록과 대조를 해본다. 내 얼굴을 몇 번 쳐다보더니 여행카드 묶음 속에서 내 카드를 찾아서 준다. 이미 내 카드는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는 무슨 소련제라고 하는데 만원이었고 한 백 명 정도 탄 것 같았다. 비행기는 뜨자 마자 내리는 것 같았는데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조금 더 걸린 것같았다. 아바나 공항 입국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쿠바를 찾는 여행객의 수는 일년에 300만명 정도라고 한다.
젊고 아름다운 흑인 여자 이민국 직원 앞에 섰다.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무엇하러 왔느냐 직업이 무엇이냐. 나는 사실대로 미국 로스엔젤리스 검찰청의 범죄 피해자 보상국에서 일한다고 말하였다. 이 여자가 눈을 크게 뜨더니 전화기를 든다.
조금 후에 중년 남자직원이 오더니 여권을 달라고 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한참 만에 나오더니 나더러 돈을 얼마나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현금 3000달러와 신용카드를 가지고 왔다고 대답하였다. 돈을 꺼내 보라고 한다. 나는 바지 속 주머니와 혁대 속에 숨겨가지고 다니는 모든 돈을 꺼내서 바닥에 늘어 놓았다. 카드도 꺼내 놓았다. 잘 살펴 보더니 도로 넣으라고 한다.
나는 통과 되었다. 나는 내가 늙었기 때문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쿠바에 눌러 살 가보아서 그랬는지 또는 미국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른다.
시내를 들어가는 다른 여행객들과 택시를 합승하여 아바나 시내로 갔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 이름은 ‘이라이다’이었다. 호스텔 월드를 통하여 예약했는데 인터넷에 나온 아바나의 호스텔은 이것 하나 뿐이었다.
이 호스텔의 여자 주인 이름이 바로 ‘이라이다’이었다. 방은 두 개가 있었다. 내 방에는 2층 침대 한 개와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단층 침대가 있었다. 즉 네 사람이 잘 수 있는 방이었다. 다른 방에는 침대가 네 개 있었다. 이 호스텔은 손님이 다 차봐야 총 8명이 된다.
이라이다 는 결혼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자기집에서 자고 아침이 되면 호스텔로 와서 일했다. 그러니까 모자 단 둘이서 이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다. 사이트에는 이 호스텔은 아침을 준다고 되어 있었는데 아침을 안 준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인터넷에는 하루 밤에 9불로 나와 있는데 10 달러씩 내라고 한다. 나는 내가 호스텔 월드를 통해서 예약한 기간 동안은 9달러씩 밖에는 못 주겠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렇게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나와 있는 대로 아침밥도 달라고 하였다.
이 모자는 인터넷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아침밥 문제는 호스텔 월드에 연락해서 고치겠다고 말하였다. 숙박비 문제는 하루밤에 10달러씩 주지 않으면 경찰에 전화하겠다고 하였다. 내가 그러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은 내가 있는 바로 앞에서 경찰서로 전화를 하였다. 뭐라고 한참을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내가 궁금한 눈으로 쳐다 보았더니 예약기간 동안 즉 5일은 9불씩 내고 그 다음부터는 10달러씩 지불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그러자고 하였다. 나는 다른 데로 갔다가 이 호스텔로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총 15일 밤을 잤다.
쿠바는 어디를 가서 환전을 해도 환율이 다 똑같았다. 쿠바에는 두 가지 종류의 돈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는 쿠바 페소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 달러로 환전이 가능한 페소이다. 쿠바 페소의 다른 이름은 쿱 이고 환전 가능한 페소의 다른 이름은 쿡 또는 쎄우쎄라고 하였다. 쿱은 쿠바 주민들이 사용하는 돈이고 쿡 은 외국인이 사용하는 돈이다. 1쿡의 가치는 1달러와 같기 때문에 쿡 을 그냥 달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환전소에 가서 미화 100달러를 주었더니 실제로는 100 쿡 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간 모자라게 준다. 왜 그러냐고 하였더니 수수료를 제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쿡 의 얼마간을 쿱으로 바꾸었다. 1 쿡을 주면 26 쿱 을 주었다.
아바나에는 상점이나 음식점이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현지인들이 쿱으로 물건을 사는 가게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객들이 쿡으로 상품을 사는 외국인 전용 상점이다. 물건도 완전히 다르고 가격도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병물 같은 것은 외국인 상점에 가서 샀지만 식사는 현지인 식당에 가서 먹었다. 값이 무척 저렴하고 먹을만하였다. 나는 모든 필요한 것을 가능한 한 현지인 가게에 가서 샀다. 내가 늙어서 그런지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더러 무슨 신분증 같은 것을 보자고는 하지 아니하였다.

예를 들면 한끼 식사가 외국인 음식점에 가면 미국 돈 10달러 정도 들지만 현지인 식당에서 먹으면 미국 돈 50전 정도면 넉넉하다. 즉 20배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현지인 영화관은 미화 10전만 주면 영화를 관람할 수가 있었다. 쿠바 국민들은 전표 같은 것이 있어서 음식 재료나 고기 등이 거의 무료로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의사의 한달 월급이 미화 100달러가 채 안된다고 한다.
모든 병원은 무료이고 따라서 산모가 병원에 가서 애기를 낳아도 돈 한 푼 낸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국가에서 장례를 치러 준다고 하였다.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사관은 없었고 북한 대사관이 있었다.
내 호스텔은 아바나의 베다도 구역에 있었다. 호스텔에서 조금만 나가면 큰길이 있고 여기서 시내버스를 한번만 타면 시내 중심지로 갈수가 있었다. 시내 중심지는 바로 바닷가에 있다. 이 바닷가에는 모래가 없다.
바닷가 전체를 뚝방을 쌓아서 방파제를 만들어 놓고 바로 그 방파제 바로 밑에 아바나에서 제일 긴 길인 제일 아베뉴 만들어 놀았다. 이 길 안에 아바나 시내가 있는 것이다. 파도가 높을 때는 바닷물이 방파제 벽을 치고 위로 넘어왔다. 나는 한번 이 방파제 위에서 낮잠을 자다가 물 벼락을 맞았다.
아바나에 다니는 모든 차들은 버스 트럭 택시를 포함해서 99% 고물 차들이었다. 친미 정권이었던 바스티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공산 정부를 세우자 미국이 국교를 단절하고 무역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내 호스텔에서 제일 가까운 명소는 네크로폴리스다. 네크로는 죽었다는 말이고 폴리스는 도시라는 뜻이니 죽은 자의 도시 즉 공동묘지다. 공식 명칭은 콜럼버스 이름을 따서 ‘콜론 세메테리’라고 부른다. 여기의 묘들은 모두 대리석 묘다.
이 공동묘지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을 적시는 대리석 조각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조각 중의 하나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천사가 슬픈 표정을 짓고 고개를 떨군 채 꽃병의 꽃과 물을 땅바닥으로 쏟아 버리고 있는 것이 었다. 죽으면 만사 휴지인 것이다.
나는 이 공동묘지에 자주 갔다. 가깝고 조용하고 먹을 것도 있고 편히 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와서 꽃도 두고 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과일도 두고 간다. 나는 과일을 럼주하고 해서 먹는다. 그리고 비석은 있지만 비어있는 묘 위에 들어 누어서 늘어지게 잤다.
하루는 잘 차려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꽃 한다발을 한 아름 가지고 와서 어떤 묘 앞에 놓는다. 비석에 붙여놓은 어떤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 사진을 쓰다듬는다. 이 묘는 다른 묘에 비해서 상당히 규모가 컸다. 나는 누구냐고 물었다. 손녀라고 한다. 왜 죽었냐고 물었다. 이 할아버지는 자기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든 뒤 자기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피스톨라 라고 말하였다. 손녀가 권총을 맞아 죽은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물어 보지 않았다.

또 하루는 아바나 시내에 나갔다가 시내 버스를 타고 호스텔로 돌아오는데 그만 버스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버스 종점까지 가서야 잠이 깨었는데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가 없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베다도로 갈려면 무슨 버스를 타야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늙은 흑인 할머니가 자기도 그리로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베다도에서 내렸고 밤인데도 나는 내 호스텔을 쉽게 찾아 갈 수가 있었다. 나는 의리가 깊은 사람이라 다음날 아침 이 할머니의 집을 찾아 갔다. 이 집에는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남편은 없고 중년이 다 되어 가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하고 같이 살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나이는 모르겠지만 하도 늙어서 눈가가 짓 물어서 늘 눈물을 찔금 찔금 흘리고 있었다.
나는 이 할머니에게 밥도 사주고 유명하고 진하고 맛있는 쿠바 커피도 사 주었다. 이토록 좋은 커피가 미국 돈으로 겨우 10전 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물어 보지 못했다. 어떻게 다 큰 자식들이 아직도 어머니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부모의 지나친 자식에 대한 사랑이 혹시 자식을 망쳐 놓지나 않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의 위 침대에는 청년과 중년 사이쯤 되는 불란서 청년이 들어왔다. 자기는 파리에서 열차 경찰관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키가 크고 인물이랑 체격이 좋았다. 아직 미혼이고 쿠바에 섹스 관광을 하러 왔다고 하였다. 유도도 배웠고 태권도도 할 줄 안다고 하였다. 이 사람은 밤 마다 나갔다가 새벽에야 돌아왔다. 그리고 자면서 꿈을 꾸는지 몸을 심하게 흔들면서 섹스하는 몸짓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번은 심통이 나서 너는 조마 간 쿠바에 너의 자손이 많이 생기겠구나 라고 하였더니 자기는 섹스할 때 반드시 콘돔을 끼고 한다고 하였다. 내가 호텔에 갈려면 돈이 많이 들겠구나 라고 하였더니 여기 동네에 조그만 돈을 받고 방을 빌려주는 집이 많이 있다고 기쁜 소식을 가르쳐 주었다.
이 사람이 다음날 바라데로 간다고 하였다. 친구의 차로 가는데 여분의 자리가 있다고 하였다. 나는 얼마간의 돈을 주기로 하고 동승하였다. 아바나에서 바라데로 까지는 133킬로미터 거리로 두 시간 정도 걸렸다. 나는 바라데로의 번화가에서 내렸고 오후 5시에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이 불란서 청년을 5시에 다시 만났다. 내가 물어 보지 않았는데도 이 청년은 또 그 사이에 섹스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여자가 콘돔 없이 그냥 하자고 해서 애를 먹었다고 쓸데없는 소식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바라데로는 손가락처럼 가늘고 길게 생긴 반도로 길이가 20킬로미터쯤 되었다. 땅이 하도 가늘어서 어디서든지 양쪽 바다가 다 보인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바닷가로 이름이 나있고 일년에 찾아오는 관광객이 백 만 명을 상회 한다고 한다. 쿠바 일년 관광객의 숫자가 300만명 이라고 하니 쿠바 관광객의 삼분지 일이 여기로 오는 것이다. 실제로 쿠바에 찾아오는 단체 관광객들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데로에 머물면서 아바나 에는 하루 정도만 갔다 온다고 하였다.

내가 다음에 찾아간 도시는 산타 클라라이었다. 이 불란서 청년과 같은 버스를 탔는데 나는 산타 클라라에서 내리고 이 사람은 버스를 바꾸어 타고 트리니다드로 바로 간다고 하였다.
나는 현지 돈이 떨어져서 버스 정류장에서 돈을 바꾸었다. 사무실 안에는 돈 바꾸어 주는 사람 말고도 승객인듯한 현지 청년이 한 사람 더 있었다. 내가 바지 안쪽의 비밀 주머니에서 미국 돈을 꺼내자 이것을 본 현지청년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였다. 나는 마음이 불안하였으나 밖에서 불란서 청년이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때 현지 청년이 나에게 뜻 모를 하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를 붙잡았다. 밖에 있던 불란서 청년이 전광석화와 같이 들어오더니 이 현지 청년 목을 감아 쥐고 단숨에 제압해 버린다. 불란서 청년은 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자기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섬뜩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산타 클라라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다. 체게바라 의 기념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체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1928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나보다 겨우 열 한 살 더 많은 것이다. 그는 39세 젊은 나이에 볼리비아에서 총살 당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던 학창시절에 중남미를 모터를 장착한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중남미의 모든 국가의 없는 자들이 가진 자들로 부 터서 철저하게 착취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장래가 보장되는 의사가 되었지만 청진기를 내려놓고 대신 총을 잡는다. 쿠바로 가서 카스트로와 손을 잡고 쿠바의 공산 혁명을 완성시킨다. 다음에 같은 목적으로 볼리비아로 가서 공산 혁명군을 훈련시킨다. 그러다가 결국 볼리비아 군에 잡혀서 총살 당하고 만다.
산타 클라라는 그의 제 2부인의 고향이다. 그 여자의 이름은 알레이다인데 카스트로 게릴라군의 전투요원 이었다. 여기에 그의 기념관이 있고 체게바라의 유해의 일부와 태운 재를 넣어둔 함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의 기념관은 크고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이었다.
기념관 앞에는 게바라의 상징인 베레모에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한 손에든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상상외로 많은 조문객들이 그의 빈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기념관 안에는 그의 유년시절 청년시절 전투원시절 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가 사용하던 의료 기구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는 의사인 동시에 치과의사이기도 하였다.
행하지 않는 의는 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체 게바라의 기념관 방문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산타 클라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트리니다드라는 조그만 도시로 갔다. 이 곳은 옛날 집들과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어있는 도시다. 도시전체의 길이 옛날에 만들어진 돌길이었다.
내가 묵었던 호스텔의 주인은 흑인여자로 중년을 넘긴 분이었는데 나에게 지나치게 친절하였다. 그리고 저녁도 같이 먹자고 하였다.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아주 적은 돈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는 그분은 나에게 흥미를 갖지 않는 듯 하였다.
옆집에서 돼지 우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베란다에 올라가서 보았더니 커다란 도야지가 계속 꿀꿀거리고 자기 몸을 세게 돼지 집에다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저 돼지가 틀림없이 배가 고파서 저러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람이나 돼지나 배가 고프면 못할 짓이 없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트리니다드에는 아름다운 성 프란시스코 성당이 있었다.
나는 어떤 길을 끝까지 걸어 보았는데 그 끝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돌로 집 같은 것을 만들어서 가족 묘지로 사용하는데 나는 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항상 궁금 하였다. 마침 인부들이 그 가족 묘지 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 들어가 보았다.
철문을 열면 땅속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을 내려 가보았다. 그 밑은 그저 커다란 공간일 뿐이었다. 이 공간 안에 칸을 만들어 놓고 시체가 들어있는 철제 관을 놓아두고 있었다. 사람을 땅속에다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중에 놓아두는 것이였다. 참으로 이상한 장례 법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트리니다드에서 버스를 타고 아바나로 돌아왔다. 버스 정거장은 혁명의 광장 부근에 있었다. 이 광장은 굉장히 크고 넓어서 수 만 명의 군중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다. 이 광장에는 아주 높고 아름다운 기념탑이 있었다. 그 앞에 어떤 인물의 조각상도 있었다. 이 사람은 문학가요 쿠바독립의 선구자인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걸어서 그전의 호스텔로 돌아왔다.
아바나에는 아주 크고 긴 강이 흐르는데 이름이 알멘다레스 강이다. 이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 나의 호스텔이 있는 베다도 지역에 있었다. 따라서 나는 걸어서 이 강에 여러 번 갔다. 이 강변을 따라서 알멘다레스 공원이 있었다. 이 공원은 아주 크고 길다. 열대 수림이 우거져 있어서 공원이 온통 나무그늘이다. 나는 현지인 식당에서 산 음식과 술을 가지고 가서 먹고 마시고는 나무 그늘에 들어 누어서 늘어지게 잤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느 골목길로 들어 섰는데 점치는 집이 죽 늘어서 있었다.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무슨 흑인 우상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향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공산 국가에서도 점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먹고 마실 것을 다 주는데 무슨 걱정이 있어서 점을 보러 오는지 궁금하였다.
이 강으로 가는 도중에 중국 화교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쿠바의 인구분포는 백인이 64% 흑인이 9% 혼혈이 27% 동양인은 0%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기재다. 왜냐하면 중국사람들이 또는 그 후손들이11만명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인을 1%로 기재하여야 한다. 쿠바의 인구는 1100만명이다.
이 중국사람들은 1800년대에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들은 남자들만 왔기 때문에 흑인 여자와 통정을 하거나 결혼해서 혼혈아들을 낳았고 백인 여자들과도 같은 절차를 밟아서 혼혈아를 생산했다고 한다. 이들은 1898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스페인을 위해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카스트로의 공산정부가 들어서고 그들이 운영하던 음식점등 사업체가 몰수당하자 많은 중국인들이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나는 시내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보았다. 입구에 커다란 중국식 대문을 세워 놓았다. 위에는 붉은 기와를 얹어 놓았다. 내가 가 본 화교 공동묘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사람 같지가 않은 혼혈들이었다.
강 어귀의 이쪽 편은 공원도 있고 현대식 건물도 있고 해서 그런대로 괜찮지만 반대편 쪽은 빤히 보이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아니하였다. 나는 작심을 하고 먹을 것과 음료수를 싸가지고 하루 그쪽을 향해서 떠났다. 걷고 또 걷고 다리를 건너고 하여서 간신히 그곳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문제가 생겼다. 소변이 마려운데 들어 갈 곳이 없다. 이 곳은 집들도 없고 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나는 어느 빈 건물의 벽에다 대고 실례하였다. 이때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젊고 아름다운 어떤 흑인 처녀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도중에 그만 둘 수도 없고 하여서 계속 하였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내 쪽을 빤히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이쪽 강어귀에는 무슨 연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비닐봉지 빈 병 나무 가지 등 쓰레기가 잔뜩 밀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잎사귀가 큰 커다란 나무들이 수십 그루 서 있었다. 나무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나무 밑에 무슨 열매들이 떨어져 있었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있었고 견과류의 껍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큰 돌 위에 열매를 올려놓고 작은 돌로 톡톡 때렸다. 처음에는 노란 겉껍질이 벗겨지고 그 다음에 딱딱한 속껍질을 깨니 그 속에서 하얀 속살이 나왔다. 입 속에 넣었더니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이것을 나는 아바나 호두라고 이름 붙였다.
아바나 시내는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가게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았다. 다만 다니는 차들이 모두 구식 차 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게 다녔고 상거래도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가의 간섭이 심하다 던지 무슨 강제노동을 한다 던지 하는 것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나는 점심을 먹고 노곤해져서 누울 곳을 찾았다. 어느 큰 건물 옆에 큰 나무들이 있었고 그늘이 있었다. 나는 나무그늘 밑에서 늘어지게 잤다.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 보았더니 아바나 호두들이 나무 밑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주워서 들고 어느 건물 밑으로 갔다. 그늘을 찾아간 것이었다.
나는 건물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이 아바나 호두들을 돌 맹이 위에 올려놓고 작은 돌맹이로 살살 두들겨서 까먹고 있었다. 이 건물은 좀 으슥한 곳에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호두 까먹는데 열중해 있어서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나지 않았다.
이때 하늘에서 내발 앞으로 무엇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조그만 종이 뭉치다. 주어서 종이를 펴 보았더니 속에 조그만 돌맹이가 한 개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는 다름아닌 돈 이었다. 하느님이 돈을 돌맹이에 싸서 불쌍한 나에게 보내신 것이었다.
하늘을 쳐다 보았다. 어떤 젊고 잘 생긴 신사가 옥상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고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돈은 바로 이 신사가 보낸 돈 이었다. 또 나는 바닷가에 있는 어느 아파트 건물 앞에서 이 호두를 까먹고 있자 아이들이 몰려와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나는 다음날 버스를 타고 비냘레스로 갔다. 아바나에서 200킬로미터이고 네 시간이 걸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여자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서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아우성이다. 나는 이미 예약을 해놓은 터이라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이 수리 중이라서 나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고 부근의 다른 집을 소개해 주었다. 내가 호스텔 월드에 이미 지불한 돈은 돌려 주었다.
내가 새로 찾아간 집의 주인들은 상냥하고 친절하였다. 묵고 있는 손님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이 집에 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였다.
어디서 구해 오는지 모르지만 내가 미화 6 달러를 주면 커다란 민물 가재를 가지고 와서 아침이면 요리를 해 주었다. 맛있게 먹고도 남아서 싸가지고 나가서 점심으로 먹었다.
비냘레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산동네였다. 인구 3만명의 조그만 도시로 아름다운 산 경치와 옛날 건물들 때문에 유네스코 인류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첫 날은 돈을 주고 가이드를 따라서 산과 옛 동네 구경에 나섰다. 일행이 10명쯤 되었는데 동양인은 나 혼자였고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도 나 혼자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여행이었다. 산 가까이 까지는 갈수 있어도 산에 들어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여러 가지 그곳에서만 자라는 식물들을 소개해 주었다. 농부들이 들에서 일하는데 소로 밭을 갈고 있었다. 한참을 가니 조그만 동굴이 하나 나왔는데 옛날에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였다.
우리는 드디어 어느 농가에 도착하였다. 이 농가는 담배경작을 주로 한다고 하였다. 주위의 모든 밭들이 담배 풀로 뒤덮여 있었다. 담배 농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지정한 농가에서만 기를 수 있다고 하였다. 담배 씨는 정부에서 배급해 주는 것만 뿌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도보여행에는 점심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 농가에서 직접 만든 음식이 나왔다. 비냘레스 토속음식으로 독특하고 맛있었다. 점심이 끝난 뒤 시가 만드는 시범이 있었다. 담배를 수확하면 90%는 정부에 바치고 10%만 농가가 가진다고 한다. 이 농부는 시가를 직접 만들어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판다고 하였다. 다들 몇 개씩 샀고 나도 여섯 개 샀다. 세 개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돌아 올 때는 큰 길을 따라서 오니 금방이었고 가이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음날은 동네 뒷산에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보여서 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근사한 호텔이었다. 거기서 내려다보니 비냘레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옹기종기한 아름다운 동네였다. 호텔 에서 내려올 때는 반대편을 택하였다. 밑에는 호텔 전용 정화조가 있었는데 완전 밀폐가 안 되었는지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더 내려 왔는데 길이 없었다. 조그만 개울이 하나 있었다. 이 개울은 물이 흐르지 않는 뻘 개울이었다. 신발을 벗고 바지 가랑이를 올렸다. 밑 바닥은 진흙이었고 발이 푹푹 빠졌다. 한발을 올리면 다른 발이 빠져서 애를 먹었다. 그래도 나는 성공하여서 뚝 방으로 올라왔다.
문제가 생겼다. 발을 씻어야 하는데 물이 없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조그만 양동이가 하나 있고 그 속에 물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냄새를 맡아 보았더니 깨끗한 물이었다. 주위를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동안 망설였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 하였다. 이 물은 필시 하느님께 서 나를 위해서 이곳에 마련해 두신 것이라고. 나는 세수도 하고 발도 깨끗하게 씻었다. 그 위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나는 소나무 그늘에 들어 누어서 늘어지게 잤다.
비냘레스 번화가 길은 아주 짧다. 가운데 오래된 옛날 성당이 하나 있고 길 좌우편으로 가게 와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목각 등 기념품을 팔고 있고 여러 가지를 팔고 있었다. 어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기계에서 직접 나오는 아이스 크림을 파는데 맛있었다. 길가 그늘에 앉아 있으면 어제 만났던 여행객을 오늘도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다음 날은 혼자 걸어서 인디오 동굴로 갔다. 한 한시간쯤 걸으면 된다. 큰 길가 바로 옆에 커다란 동굴 입구가 있다. 동굴입구 옆으로 포장된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동굴 후문이 나온다. 후문 앞은 넓은 광장을 만들어 놓았고 여기에 노천 음식점이 있었다.
나는 동굴후문으로 들어가서 앞문으로 나왔다. 동굴은 대단히 길었고 군데군데 동굴 옆구리를 파서 거주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한눈에 보아도 이 속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인디오 즉 쿠바의 원주민들이 살았고 그 다음에는 도망친 흑인노예들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아니하였다.
비냘레스는 쿠바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미국의 플로리다 남단에서 아주 가깝다. 오로지150 킬로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미국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이 여기로 건너 왔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인디언들을 스페인말로는 인디오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쿠바에는 인디오가 한 명도 없다.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왜 죽었을까.
자연에서만 살던 인디오들은 면역성이 없어서 백인들이 지니고 온 전염병에 걸려서 죽었다. 백인들의 학정에 못 이겨서 집단 자살하였다. 스페인의 점령군들이 일부러 죽였다.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어떤 쿠바의 백인 학자들은 쿠바에는 아예 인디오들이 살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는 카브리해에 있는 다른 섬인 자메이카와 푸에르토리코 에도 가보았는데 마찬가지 현실을 목격하였다. 백인과 흑인들만 살고 있었고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비냘레스 구경을 끝내고 아바나로 돌아왔다. 다시 옛날의 그 이라이다 호스텔로 찾아 갔다. 나는 이 호스텔에 세 번째 가는 것이다. 여기서 여러 날을 지냈고 여러 번 갔기 때문에 주인여자인 이라이다와 친숙해 졌다. 내 방에는 다른 손님이 없어서 나 혼자 잤다. 나는 이제 쿠바여행이 며칠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이라이다가 기다렸다 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하는 말인즉슨 어제 밤 늦게 한 꼬레아나 즉 한국여자가 와서 나의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자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불의 볼록한 형태가 아름다운 여자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여행객들을 항상 만나는 터이라 별 생각 아니하고 아침밥을 준비해서 먹고 나가려고 하는 참이었다. 이때 이 젊고 아름다운 한국여자가 방에서 나온다. 너무 젊고 어려서 나하고는 상대도 아니 되고 또 늙은이를 무시하는 한국 여자의 정서를 잘 아는 터이라 나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그냥 나가려고 하였다.
이 젊은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쿠바 여행을 마치고 내일 떠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괜찮다면 같이 나가자고 한다. 나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러자고 하였다. 우리는 고물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쿠바에는 두 종류의 택시가 있다. 신식 택시는 비싸고 구식 택시는 싸다.
이 처녀의 이름은 이민주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은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멕시코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하였고 스페인 말도 아주 잘 하였다. 학교가 방학 중 이라 쿠바에 혼자 놀러 왔다고 하였다.
나에게는 좀 버거운 듯싶은 이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래도 하여간 밥도 같이 먹고 헤밍웨이가 자주 갔다는 라 보데기다 델 메디오 술집에 가서 그가 즐겨 마셨다는 모히또 칵테일이라는 술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용기가 조금 생기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공산주의는 이론이나 이상은 좋지만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성공할 수 없는 경제제도라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였다. 내가 물어 보았다. 공산주의란 일은 자기 능력껏 하고 분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고. 그랬더니 이 아가씨가 대답하기를 분배는 공평하게 하는 것 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일은 사람마다 자기 능력껏 하고 분배는 그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해야 하는 것 이라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우리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즉 마르코폴로는 언어의 천재로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여 중국 왕의 사랑을 받았다.
마르코폴로는 이태리에 돌아온 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심심한 나머지 감방 동료들에게 중국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가 한 이야기를 한 동료죄수가 받아 적어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마르코폴로는 중국말과 이태리어를 유창하게 말하였지만 글은 읽고 쓸 줄을 몰랐다고 내가 가르쳐 주었다. 그랬더니 또 나를 더 빤히 쳐다 본다.
우리는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고 하루 종일 마시고 먹었다. 저녁까지 거창하게 먹었다. 아바나 항구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엘 모로라고 하는 큰 성이 있다. 이 성은 규모도 크거니와 커다란 대포들이 설치되어 있다. 적함이 아바나 항구로 들어오면 이 대포들을 쏘아서 쓰러뜨리는 것이다.
밤이 되면 이 엘 모로에서 관광객들을 위해서 실제로 대포를 쏘는 시범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리로 갔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대포를 쏘겠다는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성 구경을 그만두고 대포 쏘는 데로 갔다.
이 사람들은 대포를 그냥 쏘는 것이 아니라 무슨 군대의식을 진행하였다. 옛날 병사복장을 한 병정들이 소총을 메고 발을 맞추어 걸어 들어 온다. 소총을 내려서 서로 엇갈리게 세워 놓는다. 직각으로 걸어서 대포 있는 곳으로 간다. 한 병정은 화약함을 들었고 다른 병정은 대포 쑤시개를 들었다.
한 병정이 화약을 대포 입에다 넣는다. 다른 병정이 화약을 대포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는 대포알을 밀어 넣는다. 화약 심지를 대포 콧구멍에 꽂는다. 기다란 장대에 횃불을 밝힌다. 나팔이 울린다. 횃불을 심지에 갖다 댄다. 대포가 쾅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불을 토한다. 세 발을 차례로 쏘았다.
우리는 호스텔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런데 갑자기 이 아가씨가 ‘어디로 갈까요?’ 라고 질문을 하였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고 얼떨결에 ‘집으로 가지’ 라고 말하였다. 나는 곧 후회하였다. 택시를 타고 갈 때도 후회하였고 집에 가서도 후회하였고 자면서도 후회하였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나는 그때 왜 호텔로 가자고 말하지 못하였을까.
나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내가 늘상 가는 샤토 테니스장 에 갔다. 서 여사는 나하고 테니스 공치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나에게 공이 나쁘게 와도 내가 서여사가 치기 좋게끔 공을 좋게 넘겨 주기 때문이다. 나는 서여사에게 ‘어디로 갈까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서 여사가 말하였다. “아니 그래 주는 것도 못 먹었어. 바보네 바보.”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