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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8세로 인도 여행을 가다

이집트와 터키 여행에서 겁 먹은 나는 다시는 혼자서는 배낭여행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신문에 글을 썼다. 인도에 같이 여행갈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결과로 2007년 68세의 나이로 1월 한달 간 인도와 네팔을 둘이서 배낭여행 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의 인디라간디 국제공항에 내렸다. 인도는 한반도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나라다. 인구는 13억으로 중국 다음으로 많다. 델리와 뉴델리는 같은 지역으로 뉴델리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11년에 델리의 한 부분을 도시계획을 하여 20년에 걸쳐서 완성한 새 도시다.

뉴델리의 관광객 숙소가 모여있는 곳으로 가서 싸구려 여인숙에 짊을 풀었다. 밖으로 나갔더니 거리가 난장판이었다. 사람 소 돼지 염소 닭 들이 오토바이 사륜차 삼륜차 인력거 들과 맞물려서 돌아 가고 있었다.

어떤 골목으로 들어 섰더니 큰 가마솥에 생우유를 가득 채우고 슬슬 끓이고 있었다. 우유만 팔기도 하고 빵을 끼워서 팔기도 하였다. 길거리 에서 수레에 화로를 얹고 화로에 계란을 후라이를 해서 빵 조각에 끼워서 파는 오물렛 이 있었다. 값이 저렴하고 맛이 있어서 매일 사 먹었다.

오토바이에 치었다. 앞에서 오는 오토바이가 차를 피하려고 꺽는 바람에 핸들이 내 왼쪽 옆구리를 치고 지나갔다. 욱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양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감싸 안았다. 오토바이 청년은 고개를 돌려서 한번 쳐다 보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한 호텔에 있는 여행 에이전트를 찾아갔다.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표를 사러 왔다고 했더니 컴퓨터를 눌러본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앞으로 일 주일 분의 기차표가 매진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기차표를 기다리는 동안에 골든 트라이 앵글 즉 황금의 삼각지를 가 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황금의 삼각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델리 와 아그라 와 자이퍼 세군데를 둘러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에 오는 99%의 관광객들은 이 세 곳을 가보기 위해서 온다고 말하였다. 덧붙이기를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에는 일년에 500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 온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차역에 가면 혹시 기차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차 정거장을 향해서 걸었다. 기차역이 가까워 지자 어떤 젊은이가 다가왔다. 말하기를 기차역에 가 보아야 표가 없으니 자기를 따라오면 표를 아주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청년을 따라 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면서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재빨리 돌아서서 도망쳐 나왔다.

기차역에 갔더니 기차표가 얼마던지 있었다. 바라나시는 800킬로미터요 12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밤이 되니 엄동설한이었다. 기차의 창문이 닫히지 아니하여서 칼날 같은 찬바람이 들어 왔다. 호스텔의 주변에 있는 가게들이 왜 슬리핑 백을 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한잠도 못 자고 덜덜 떨면서 바라나시 역에서 내렸다. 오토바이 손잡이에 찔렸던 옆구리가 아파오고 눈물 콧물이 쉴새 없이 쏟아졌다.

바라나시에는 겨우 혼자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많이 있었다. 한참 가니 호텔이 나왔다. 방 값을 물어보았더니 너무 비쌌다. 돌아서서 나오려고 하자 값을 깎아 주었다. 피곤하였으므로 더 찾아 보지 아니하고 짐을 풀었다. 갠지스강으로 갔다.

강변을 따라서 가트 라는 시멘트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계단이 높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물에 까지 닿아있었다. 사람들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깊이가 허리 정도 밖에 차지 않았다. 사람들은 물로 몸을 씻고 얼굴을 씻고 머리도 감았다. 그리고 이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강을 어머니 강 이라고 불렀다. 강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나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더 내려가니 커다랗고 하얀 건물이 나왔다. 이 건물 부근의 강변에서 하루에 300구의 시체를 태운다고 하였다. 연기가 자욱하고 시체 타는 냄새도 났다. 건물에는 누가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건물에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으러 온다고 하였다.

시체를 태워야만 영혼이 몸 밖으로 나오고 극락으로 갈 수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빨리 태워야만 깨끗하고 싱싱한 영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먼데서 시체를 운반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 건물에 와서 죽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다음날 다시 강으로 갔다. 이번에는 강변에 있는 조그만 배 하나를 세 내었다. 육지에서는 사람을 태우는 곳으로 못 들어가게 하였다. 화장을 가까이서 보려면 배를 타고 보아야 했다.

시체를 알록달록한 천으로 싸서 들것에 들고 나왔다. 갠지스 강 물속에 시체를 세 번 담갔다가 꺼냈다. 쌓아둔 나무더미 위에 사람을 올려 놓았다. 발 하나가 천 밖으로 튀어 나와 있었다. 나무에 불을 질렀다. 시체가 다 탈 때까지 나무를 빼내거나 더 보태지 않았다.

시체는 다 타지 않고 남는 부분이 있었다. 여자는 엉덩이 살이 남고 남자는 가슴 부분이 남는다. 그러면 부분을 재와 같이 삽으로 떠서 갠지스 강으로 넣어버렸다. 시체가 어머니 품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갠지스 강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이 심한 강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탄 배 말고도 배 여러 척이 떠 돌아 다녔다. 황토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며 열심히 염불을 외었다. 다른 배 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목청껏 찬송가를 불렀다.

어떤 배가 우리의 배로 왔다. 한 사람이 배 위로 올라왔다. 화장할 때 태우는 나무는 비싼데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도 화장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돈을 주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진짜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인지 당신이 가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자기를 믿으라고 하였다.

바라나시는 밤에도 더워서 호스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못 생긴 남자가 나더러 자기의 신발에 입을 맞추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인도의 사회 계급 중에서 가장 높은 브라만 이라고 하였다.

무릎을 꿇고 이 사람의 발에 키스하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나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외국사람이니 안 해도 좋다.”고 말하였다. 나도 브라만이 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죽은 다음에 환생하는 길 밖에는 없다고 하였다. 죽어서 브라만 남자의 아내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죽어서 벌레의 뱃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그것은 자기의 업보이니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업보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것 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전생의 업을 살고 있는 것 이라고 하였다.

비행기로 바라나시에서 네팔의 수도인 카투만두로 갔다. 한 시간 걸렸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스텔에 묵었다. 종업원들은 현지인 들이었다. 미역국을 시켜 먹었다. 생일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미역국을 먹고 설사병에 걸렸다. 아픈 옆구리에 독감에 설사까지 겹쳐서 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카투만두의 골목길에서 감자 찐 것도 사 먹었다. 값이 싸고 맛이 있었다. 이 음식점은 감자 찐 것 말고도 네팔 토속음식도 만들어 팔았다. 골목길은 하도 좁아서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았다. 주인은 젊은 네팔 청년이었고 일하는 어린 남자 아이들이 셋이 있었다. 아이들이 왜 학교에 가지 아니 하는지 궁금 했지만 물어 보지 아니 하였다.

호스텔에서 가까운 곳에 카투만두의 본전통인 덜발 광장이 있었다. 힌두교 탑과 사원과 왕궁이 있었다. 힌두교 탑에는 보호 철책이 없어서 사람들이 올라가서 계단에 앉기도 하고 만져 보았다.

버스를 타고 포카라 로 갔다. 카투만두에서 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고 인구 30만명으로 네팔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여기에 히말라야 산의 14봉오리 중 3봉오리가 있다.

호스텔 남자주인은 한국말을 잘 하였다. 한국에서 3년 동안 일해서 모은 돈으로 호스텔을 지었다고 하였다. 다음날 이분을 가이드로 해서 산 구경을 했다. 산은 먼 거리에 있었는데도 마치 절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길가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사먹었다. 여주인이 숟가락을 집어 주었다. 포장 안된 길가 음식점이어서 숟가락에 먼지가 많이 묻어있었다. 여자가 자기 바른손의 엄지와 둘째 손가락으로 숟가락을 쓱 훑은 다음에 건네 주었다. 못 본 것처럼 하고 받아서 밥을 먹었다.

카투만두로 돌아와서 무척 고생했다. 너무 더워서 포카라로 갈때 반 바지를 입고간 것이 큰 잘못이었다. 무릎 아래로부터 발가락까지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모기가 물었다. 슬리퍼를 신고 갔기 때문에 더 심했다. 버스의 의자 밑으로 모기가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감기에 설사에 옆구리 아픔에 모기 병까지 걸렸다.

비행기로 바라나시로 돌아와서 아그라로 갔다. 600킬로미터요 12 시간이 걸렸다. 아그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타지마할이 있는 곳이다. 무굴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의 세 번째 부인인 뭄타즈 마할과 그녀의 아기 무덤이다. 뭄타즈가 열네 번째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슬픔에 잠긴 황제는 2 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뭄타즈 마할 과 아기가 묻힐 무덤을 짓기 시작하였다. 22년 만인 1653년에 완공 하였다.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당시의 돈으로 미화 50만불이 들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미화 8억 2천 7백 만불 이다.

타지마할의 꼭대기에 있는 둥근 돔에는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수정 등 28종류의 수없이 많은 보석이 박혀 있다. 샤 자한 황제는 타지마할이 완공된 후에 공사에 참가했던 모든 인부들의 손목을 잘랐다. 타지마할 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을 못 짓게 하기 위해서였다.

건물을 전면에서 바라보면 건물 앞 연못에 그림자가 비쳐서 타지마할이 두 개인 것처럼 보였다. 인간이 만든 참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감기로 눈에 눈곱이 끼어서 눈곱을 손으로 뜯어내면서 보았다.

신발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 갔다. 쇠 창살로 한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계속 밀려오기 때문에 설 수가 없었다. 몇 바퀴를 도니 왕비와 아기가 누워 있는 관이 나왔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큰 관 하나와 작은 관 하나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아그라를 떠나서 뉴델리로 돌아왔다. 완행 기차를 탔다. 기차가 역을 벗어나니 철로 변에 많은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옆에는 조그만 물 양동이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씻는 물이다. 여자들도 남자들 사이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다리 위에는 가족단위의 무 숙자 들이 살고 있었다. 어떤 애가 다리 난간 사이의 틈 사이로 엉거주춤 앉아서 일을 보았다. 팬티를 입지 않아서 아랫도리가 다 들어난 아이는 일을 마치고는 닦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금새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소 양 닭 들은 일종의 청소부였다. 길에 버려진 채소 보로박스 쓰레기 등을 먹어 치웠다. 소들은 젖이 탱탱 부어 있었다. 밤이 되면 주인이 와서 소젖을 짜간다고 하였다. 영악한 사람들이다.

병 물을 사서 다 마시고 빈 병을 버릴 때 두껑을 병에 닫지 말고 따로따로 버리라는 주의 사항이 가게마다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빈 병에 수도 물을 채우고 본드로 뚜껑을 붙여서 새 병 물인 것처럼 판다고 했다. 영악한 사람들이다.

옆에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현지인이나 다른 배낭 족 들과 이야기 할 기회가 줄어 든다.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배낭여행은 혼자서 하는 것이 정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병원에 한 달간 입원 했었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