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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했던 호스텔이 없고, 고비사막서 불타는 절벽을 걷다

몽골 편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 한국으로 갔다.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의 나라다.

5월의 공항 밖은 쌀쌀하였다.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시내로 들어온 기사가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호스텔월드 인터넷을 통해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다른 데로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와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나갔다.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데로 갔다.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있었다. 이름 모를 몽골 음식을 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몽골로 왔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에 가던지 아니면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고 싶었다.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 신청서를 받았지만 적는 내용이 까다롭고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야 비자가 나온다고 했다.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했다.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곧 해결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 안에 있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했다. 고비사막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돈을 내면 된다고 했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와 운전수와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했다. 다른 여행사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 반찬을 파는 코너가 있었다.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3분지 2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했다. 돈을 주자 내일아침 7시까지 오라고 하였다.

차는 짚 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왔다.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섰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았다.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다.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었다. 무엇을 보고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누라의 머리카락은 들어오는 먼지로 금새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고 김치도 먹고 된장국도 먹었다. 일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저녁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금새 사라졌다.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걱정이 된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기사가 ‘여러 번 와 보았다’고 하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몽골 원주민의 집인 게르 앞에 섰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가 나왔다.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다.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그 사람이 가르쳐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다.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가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 천막 집이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다.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 건물의 한 방에서 잤다.

다음날은 어디를 가는데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기사가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여자가 망아지 상처 난 곳에 약을 발랐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하였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다. 말랑말랑 하고 꼭지를 위에서 아래로 훑으니 젖이 쏟아졌다.

원주민들의 게르는 짚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왔다.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차보다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산양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했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앙상하게 죽은 나무 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을 달려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돌을 주어다가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갔다.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다. 나는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갔다.

계곡 입구는 봄날처럼 따뜻하고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개울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다. 절벽위로 독수리가 날고 있었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우비를 입었다. 마누라와 나는 비를 쫄딱 맞았다.

더 들어갔더니 우박이 떨어졌다.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다.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했다. 절벽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했다. 석양이 되자 햇빛을 받아서 절벽이 시뻘겋게 변했다. 장작더미가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그야말로 불타는 절벽이었다.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고 공룡 알이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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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의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에는 몽골의 전통 쇼가 있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몽골 춤을 추었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목청을 짜서 부르는 흐미라는 전통 노래도 불렀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이라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동산에 올라갔다. 커다란 간판에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분 나쁘게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옛날에 한국이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가이드가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어떤 성이 항복하지 안으면 사람의 썩은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서 성안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하였다. 징기스칸은 항복하지 않은 성이 정복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죽여 버렸다고 한다. 여자 어린이도 죽였고 개 돼지도 죽였다. 징기스칸은 질이 나쁜 사람이었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징기스칸은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잡아서 잡아서 모두 죽여버렸다고 했다.

돌아오는 날은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고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퍼 부었다.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몽골 Mongol

몽골 편

나는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서 한국으로 갔다. 이때 내 나이는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를 타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이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원래 내 몽골과 외 몽골로 되어있었으나 내 몽골은 중국에 흡수되었고 외 몽골만 소련의 힘을 얻어 독립하였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다.

우리는 5월의 어느 날 밤에 도착했는데 공항 밖으로 나가니 쌀쌀하였다. 환전을 한 다음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택시기사가 호스텔 주소 근처에 도착해서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기사는 이해할 수 없는 몽골말로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우리에게 내가 종이에 적어서 보여준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호스텔월드 라는 믿을만한 인터넷을 통하여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기사는 다른 여러 군데에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정신을 차려서 그렇다면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리가 묵는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 와서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물어서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시내로 갔다. 다행히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하나 있어서 이름 모를 몽고음식을 사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무작정 몽골로 왔던 터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던지 아니면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 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물어서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다. 비자 신청서를 받기는 하였으나 적는 내용이 아주 까다롭고 신청서를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나 비자가 나온다고 하였다. 더구나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우리는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나는 먼저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 부 터서 하소연하였다. 그 여자직원은 말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하면서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곳 해결되리라는 갓이었다. 나는 해결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산국가에도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여자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을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고비사막을 여행하려면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돈을 내면 된다고 하였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저렴하고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 한대와 운전수 그리고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말하였다. 늙은 나와 나의 마누라는 다른 여행사에 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 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놀라운 것은 백화점 안에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의 모든 반찬을 만들어서 파는 코너도 있었고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진열대에 있는 것은 한국에서 수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반찬은 누가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우리는 국영백화점으로 가서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삼분지 이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계약서도 없이 영수증만 받고 돈을 건 냈다. 내일아침 7시에 와서 가이드와 같이 먹을 거리도 사고 출발은 8시에 한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갔다. 차는 두껑이 있는 큰 짚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몽골의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 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우리는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선 것이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 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아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리가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고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였고 나침반도 없었다. 나는 기사가 무엇을 보고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마누라의 머리는 들어오는 흙먼지로 금새 머리가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었고 김치도 먹었고 된장국도 끓여먹었다. 일 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어느덧 황혼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마치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땅속으로 금새 사라졌다.

날은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아직도 우리가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 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여러 번 와 보았다.’ 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어느 몽골 원주민의 천막 집인 게르 앞에 섰다. 먼저 어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어른이 나왔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이 사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 말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손으로 가르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간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숙소는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해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으로 그 크기가 우리나란 전통적인 우물이 한 스무 개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게르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으나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사정을 말하고 우리는 그 건물의 어느 방에서 잤다.

다음 날 은 어디를 가는데 남자는 없고 게르 옆에서 어떤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작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망아지의 상처에 약을 바르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안는 것이다. 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나는 힘센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게르가 하나 있고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어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가이드가 뭐라고 설명을 하자 부부가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는데 말랑말랑 하였다. 젖통은 만지지 안고 젖꼭지만 위에서 아래로 죽 훑으니 젖이 아래로 분수처럼 쏟아졌다.

원주민 들의 게르는 짚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올 정도로 서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한참을 가니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짚차 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가이드 말이 산양들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하였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같이 앙상하게 죽은 나무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형형색색의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도 묶여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사막에서 돌을 주어다가 쌓여있는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또 다음날은 어디로 가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날씨가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우리더러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지만 나는 ‘에이 설마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그대로 갔다.

계곡 입구에는 봄날처럼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있었고 작은 개울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들어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고 절벽위로 이름 모를 맹금들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오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미리 챙겨가지고 온 우비를 입었지만 나와 나의 마누라는 비를 쫄딱 맞았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소낙비가 우박이 되어서 나의 머리를 강타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지만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이드 더러 그만 들어가고 돌아 가자고 보챘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몸소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하였다. 절벽은 그다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해질녘이 되자 절벽이 햇빛을 받아서 시뻘겋게 변하고 마치 장작더미에 성냥불을 갖다 댄 것처럼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가이드 말이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지만 공룡 알이 통째로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열심히 공룡 뼈나 알을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줍지 못하였다. 일확천금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도시답게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 비슷한 숙소에서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몽골의 전통 쑈 가 있었다.

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추는 몽골의 춤도 인상적 이었지만 가장 신기했던 것은 입을 크게 벌리지 아니하고 목청을 쥐어짜서 부르는 몽골의 전통음악인 흐미 라는 목 노래였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비한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자연의 소리인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 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까운 동산에 무슨 신전 같은 것이 있고 커다란 간판 같은 것도 보여서 가보기로 하였다. 올라 가보니 무슨 기념비 같은 것이 있었고 그 큰 간판에는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랍고 기분 나쁘게도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이 한때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올 때 영어가 그런대로 유창한 가이드 처녀에게 항의 하였다. 이 아가씨는 자기들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한국도 분명히 몽골의 식민지였다고 배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전술가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어떤 성이 항복을 하지 안으면 썩어가는 사람의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 서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나는 징기스칸이 항복을 하지 안는 성을 정복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여자 어린이 개 돼지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징기스칸이 썩은 시체까지 무기로 사용한 질 나쁜 사람인줄은 미쳐 몰랐다.

또 그는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모두서 잡아 죽여 버렸다고 하였다. 나는 키 작은 사람들이 성공한 예를 많이 알고 있다. 나폴레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요 히틀러나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징기스칸의 키가 얼마나 컷 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도 키 작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 량 할 수 있었다.

나는 키가 1미터 72 센티 미터이니 나도 키 작은 사람에 속한다. 나는 나를 자위한다. 나도 혹시 성공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다음날은 오다가 어떤 게르 에서 잤다. 갑자기 새 차게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우리는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몇 일을 더 묵은 뒤 서울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