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서효원

런던에서 공짜로 전철타기 공짜로 술 먹기

런던의 1월은 춥고 매일 비가 왔다. 유스호스텔에서 3일을 지냈다. 끼어 입고 목도리도 하고 털모자도 쓰고 장갑도 끼고 나이로비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런던브리지에서 내렸다. 개트위크 공항으로 가는 국철로 바꾸어 타야 했다. 왕복표를 22파운드주고 샀다.

나이로비에서 돌아올 때 터키항공은 착륙공항을 런던 히뜨로우 공항으로 바꾸었다. 역으로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표 값의 반인 11파운드의 환불을 요청하였다. 여직원은 안된다고 하였다. 역장을 만나서 이야기 하였다. 역장은 나에게 1파운드만 주었다. 10파운드를 서비스 차지로 제한 것이었다.

런던 브리지를 걸어서 건넜다. 저 멀리 타워 브리지가 보였다. 바람이 불고 추워서 어떤 건물 로비에 들어 갔더니 경비가 나가라고 하였다. 런던 타워로 갔다. 여행객들이 있어서 나도 기다렸더니 의장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왔다.

타워 브리지 다리 밑에서 점심을 먹었다. 거위간 요리 남겨서 가지고 온 것하고 지니고 다니는 럼주를 마셨다. 벤치에는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어서 호텔의 정원석 위에 앉아서 먹었다. 알록달록한 차림을 한 경비원이 거기 앉으면 안된 다고 하였다. 나는 놀라서 얼른 일어났다. 경비원이 나를 돌 위에 다시 앉히면서 말이 ‘앉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도 늙은 동양노인 관광객이 신기해서 말을 걸어본 것 뿐’ 이라고 했다.

타워 브리지를 걸어서 건넜다.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한국관광객도 많이 있었다. 전철역으로 가다가 어떤 술집에 들렸다.

런던의 금요일은 한국의 토요일 같았다. 사람들이 12시에 퇴근했다. 사람들이 대포 집 에 모여서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들어가서 술을 마셨다. 탁자를 치우던 웨이터가 술을 조금 엎질렀다. 웨이터를 불러서 엄살을 피웠다. 내 술을 다 엎질렀으니 새 술을 갖다 달라고 하였다. 가득 찬 새 술잔을 갖다 주었다.

전철역으로 갔다. 직원을 불러서 돈이 1파운드 밖에 없으니 전철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다. 직원이 안 된다고 하였다. 역장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역장도 안 된다고 하였다. 다른 곳으로 가서 전철 문 밑으로 기어서 전철을 탔다. 분하고 술에 취해서 위험한 짓을 했다.

나이로비에서 호스텔에 이메일을 보냈었다. 예약한 비행기편이 취소 되어서 하루 늦어지니 호스텔 예약도 하루씩 순연 해달라고 부탁했다.

호스텔에 도착해서 체크인 하려고 하였더니 내 이름이 예약자 명단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예약의 전부를 지워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안되겠느냐고 했더니 3층의 썰렁한 방으로 안내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히터가 작동이 안되어서 무척 추웠다.

2층에 있는 화장실로 내려갔다. 지난번에 알게 된 아일랜드에서 온 중년 남자가 그 방은 어제 페인트 칠을 했고 히터도 꺼놓았다고 했다. 방이 몹시 추울 뿐만 아니라 페인트 냄새가 나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접수처로 내려갔다.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4층으로 나를 데려갔다. 16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까 방보다 더 추웠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 빈 방은 히터를 꺼놓는다는 것을 알았다. 또 접수처로 내려갔다. 페인트 냄새가 나는 8인용 방으로 다시 가겠다고 하였다.

페인트 냄새 나는 방에 가서 담요를 세 개나 덮고 눈을 감았다. 너무 추워서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접수처로 내려갔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접수처에는 대니라는 청년이 있었다. 나를 위 아래로 쭉 훑어 보았다. “여기는 유스호스텔이다. 젊은 사람만 오는 곳이다. 당신 같은 노인을 받아 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고 가만히 있어라”고 하였다. 기가 막혔다.

지난번 왔을 때 묵었던 그 방에 좀 넣어 줄 수 없느냐고 사정하였다. 대니는 컴퓨터를 두들겨 보더니 그 방에 침대 빈 것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그전에 왔을 때 당신은 다리가 아파서 2층 침대에 못 올라간다고 했다. 그 때 일층 침대를 주었었는데 2층 침대를 올라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올라갈 수 있다고 대답 하였다. 2층 침대에 올라가서 잤다.

홍콩과 미국, 첫 해외 출장길

나는 1960년대에 훼어챠일드 라는 한국주재 미국 전자회사에서 10년 동안 일 하였다. 그 당시의 한국은 몹시 가난하였고 기술이 낙후되어있었다. 이 회사는 한국의 저렴한 임금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부품을 가져와서 완성품으로 조립하였다. 조립 품은 트랜지스터와 반도체였다. 이 제품들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그 때의 한국은 이러한 제품을 만들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훼어챠일드 회사는 그 당시 같이 들어와 있던 모토롤라 회사와 더불어 한국의 최첨단 기술산업회사로 인정 받고 있었다. 그때의 대통령은 박정희 씨였는데 하루는 우리회사에 시찰을 왔다. 품질관리 과장이었던 나는 대통령을 생산라인으로 모시고 가서 반도체의 조립과정 및 어떻게 품질을 관리하고 있는지 설명해 드렸다.

반도체의 모든 조립은 현미경 밑에서 이루어 졌다. 조립공들은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꽃다운 아가씨들이었다. 이들의 하루 임금은 그것이 얼마이었는지 액수는 잊어버렸지만 그 당시의 곰탕 한 그릇 값과 같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것도 높은 임금이었고 또 아가씨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을 때였다.

나는 회사의 명령으로 홍콩지사와 미국의 본사에 출장을 갔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국정원격인 중앙정보부 라는 국가기관이 있었다. 이때는 해외에 나가는 모든 사람은 중앙정보부에 가서 먼저 교육을 받아야 했다. 반공에 대한 교육이었다. 호텔방에 불온 서류나 서적이 놓여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모르는 사람이 접근하면 공작원일지 모르니 피하라는 것 등 이었다.

그때는 회사에 들고 다니는 가방도 변변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홍콩에 가면 007가방을 하나 사올 요량으로 한국에서 떠날 때 보자기에 서류를 싸가지고 갔다. 홍콩 국제공항에 내리니 회사직원이 마중 나와있었다. 나는 차마 이분에게 007가방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밤에 호텔을 나섰다. 007 가방을 하나 사기 위해서였다. 나는 무작정 걸었다. 무작정 이라기보다도 내가 지금 오른쪽으로 돌았으니 돌아 올 때는 왼쪽으로 돌아야지 하는 식으로 머리 속에 가는 길을 외우면서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더니 어떤 가방가게에 도착하였다.

가게에 들어섰더니 어디서 ‘아야’ 하는 젊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나는 쪽을 보았더니 젊은 남녀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갔다. 한국여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여기서 일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한국에서 홍콩에 놀러 왔다가 여기에 취직하였다고 하였다. 한국손님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 온다고 하였다. 나는 가방을 하나 샀다.

나는 돌아올 때 오른쪽 왼쪽은 잊어버려서 호텔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하도 유명한 호텔이어서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나는 해외에 나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홍콩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포도가 하도 커서 자두만 하였고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서 먹는 것도 신비로웠다. 에버딘 이라는 곳에 가보았는데 수족관에 생선을 넣어두고 내가 먹고 싶은 고기를 손으로 가르치자 꺼내서 금방 튀겨 가지고 나왔다.

돌아올 때는 어떤 공동묘지에 들려보았다. 비석에 죽은 사람의 사진을 붙여놓고 생일과 죽은 날짜를 적어 놓았다. 어떤 남자와 여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밤 어떤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중앙정보부 교육이 생각나서 그 사람은 한국에 가버리고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미국에 출장 와서는 서부에서 동부까지 여러 곳을 다녀보았다. 그때 들린 도시는 로스앤젤레스, 산호세 , 샌디에고 , 뉴포트랜드, 뉴욕, 아틀란타 등지였다. 지사가 있는 곳에서는 회사직원이 나왔으나 그렇지 않은 곳은 혼자서 다녔다. 뉴욕에서는 훼어챠일드에서 일하던 정비공이 이민 와있어서 그 집에서 하루 밤 자고 그 다음날은 그의 부인이 안내하여 자유의 여신상에 가보았다. 아틀란타 에서는 나의 막내 동생이 이민 와있어서 그 집에서 일주일 묵었다.

한번은 공중전화를 쓰는데 동전을 더 넣으라는 녹음이 나온다. 나는 전화기를 놓으면 동전이 들어가 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동전을 구하러 갔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돈이 모자랄 경우 전화기를 놓으면 넣었던 동전이 도로 나온다고 하였다.

뉴포트랜드에 가서는 바다가재라는 것을 생전처음 먹어보았다. 나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가재의 눈알까지 다 빼서 먹었다. 체하여 그 날밤 몹시 고생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 하와이에도 들렷고 일본에도 갔다. 하와이의 밤거리에 대한항공 간판이 걸려있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일본의 아다미 온천장에 혼자 갔다. 여관에 가서 기생을 청했으나 여러 곳에서 거절당하였다. 나는 그들이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차별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급해진 나는 돈뭉치를 손에 들고 기생을 청하였다. 그래도 거절 당하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기생하고 노래하고 노는 것은 일대 일의 일이 아니라 다수 대 다수의 사건이라고 하였다.

시내의 제일 비싼 호텔에 여정을 푼 나는 분을 사기지 못했다. 호텔 전화 부에 있어서 안마 녀를 불렀다. 어떤 할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돈만 주고 내 보냈다.

몽골 Mongol

몽골 편

나는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서 한국으로 갔다. 이때 내 나이는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를 타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이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원래 내 몽골과 외 몽골로 되어있었으나 내 몽골은 중국에 흡수되었고 외 몽골만 소련의 힘을 얻어 독립하였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다.

우리는 5월의 어느 날 밤에 도착했는데 공항 밖으로 나가니 쌀쌀하였다. 환전을 한 다음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택시기사가 호스텔 주소 근처에 도착해서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기사는 이해할 수 없는 몽골말로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우리에게 내가 종이에 적어서 보여준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호스텔월드 라는 믿을만한 인터넷을 통하여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기사는 다른 여러 군데에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정신을 차려서 그렇다면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리가 묵는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 와서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물어서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시내로 갔다. 다행히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하나 있어서 이름 모를 몽고음식을 사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무작정 몽골로 왔던 터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던지 아니면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 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물어서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다. 비자 신청서를 받기는 하였으나 적는 내용이 아주 까다롭고 신청서를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나 비자가 나온다고 하였다. 더구나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우리는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나는 먼저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 부 터서 하소연하였다. 그 여자직원은 말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하면서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곳 해결되리라는 갓이었다. 나는 해결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산국가에도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여자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을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고비사막을 여행하려면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돈을 내면 된다고 하였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저렴하고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 한대와 운전수 그리고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말하였다. 늙은 나와 나의 마누라는 다른 여행사에 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 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놀라운 것은 백화점 안에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의 모든 반찬을 만들어서 파는 코너도 있었고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진열대에 있는 것은 한국에서 수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반찬은 누가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우리는 국영백화점으로 가서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삼분지 이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계약서도 없이 영수증만 받고 돈을 건 냈다. 내일아침 7시에 와서 가이드와 같이 먹을 거리도 사고 출발은 8시에 한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갔다. 차는 두껑이 있는 큰 짚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몽골의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 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우리는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선 것이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 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아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리가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고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였고 나침반도 없었다. 나는 기사가 무엇을 보고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마누라의 머리는 들어오는 흙먼지로 금새 머리가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었고 김치도 먹었고 된장국도 끓여먹었다. 일 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어느덧 황혼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마치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땅속으로 금새 사라졌다.

날은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아직도 우리가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 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여러 번 와 보았다.’ 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어느 몽골 원주민의 천막 집인 게르 앞에 섰다. 먼저 어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어른이 나왔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이 사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 말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손으로 가르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간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숙소는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해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으로 그 크기가 우리나란 전통적인 우물이 한 스무 개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게르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으나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사정을 말하고 우리는 그 건물의 어느 방에서 잤다.

다음 날 은 어디를 가는데 남자는 없고 게르 옆에서 어떤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작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망아지의 상처에 약을 바르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안는 것이다. 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나는 힘센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게르가 하나 있고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어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가이드가 뭐라고 설명을 하자 부부가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는데 말랑말랑 하였다. 젖통은 만지지 안고 젖꼭지만 위에서 아래로 죽 훑으니 젖이 아래로 분수처럼 쏟아졌다.

원주민 들의 게르는 짚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올 정도로 서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한참을 가니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짚차 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가이드 말이 산양들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하였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같이 앙상하게 죽은 나무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형형색색의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도 묶여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사막에서 돌을 주어다가 쌓여있는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또 다음날은 어디로 가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날씨가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우리더러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지만 나는 ‘에이 설마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그대로 갔다.

계곡 입구에는 봄날처럼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있었고 작은 개울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들어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고 절벽위로 이름 모를 맹금들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오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미리 챙겨가지고 온 우비를 입었지만 나와 나의 마누라는 비를 쫄딱 맞았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소낙비가 우박이 되어서 나의 머리를 강타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지만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이드 더러 그만 들어가고 돌아 가자고 보챘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몸소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하였다. 절벽은 그다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해질녘이 되자 절벽이 햇빛을 받아서 시뻘겋게 변하고 마치 장작더미에 성냥불을 갖다 댄 것처럼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가이드 말이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지만 공룡 알이 통째로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열심히 공룡 뼈나 알을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줍지 못하였다. 일확천금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도시답게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 비슷한 숙소에서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몽골의 전통 쑈 가 있었다.

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추는 몽골의 춤도 인상적 이었지만 가장 신기했던 것은 입을 크게 벌리지 아니하고 목청을 쥐어짜서 부르는 몽골의 전통음악인 흐미 라는 목 노래였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비한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자연의 소리인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 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까운 동산에 무슨 신전 같은 것이 있고 커다란 간판 같은 것도 보여서 가보기로 하였다. 올라 가보니 무슨 기념비 같은 것이 있었고 그 큰 간판에는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랍고 기분 나쁘게도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이 한때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올 때 영어가 그런대로 유창한 가이드 처녀에게 항의 하였다. 이 아가씨는 자기들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한국도 분명히 몽골의 식민지였다고 배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전술가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어떤 성이 항복을 하지 안으면 썩어가는 사람의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 서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나는 징기스칸이 항복을 하지 안는 성을 정복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여자 어린이 개 돼지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징기스칸이 썩은 시체까지 무기로 사용한 질 나쁜 사람인줄은 미쳐 몰랐다.

또 그는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모두서 잡아 죽여 버렸다고 하였다. 나는 키 작은 사람들이 성공한 예를 많이 알고 있다. 나폴레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요 히틀러나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징기스칸의 키가 얼마나 컷 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도 키 작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 량 할 수 있었다.

나는 키가 1미터 72 센티 미터이니 나도 키 작은 사람에 속한다. 나는 나를 자위한다. 나도 혹시 성공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다음날은 오다가 어떤 게르 에서 잤다. 갑자기 새 차게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우리는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몇 일을 더 묵은 뒤 서울로 왔다.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라오스 LAOS

방비엥으로부터 루앙프라방 가는 길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이었다. 거리로는 200킬로미터 이었지만 시간은 10시간이 걸렸다. 라오스에서 운행되고 있는 버스는 거의 모두 한국에서 수입한 옛날 관광버스였다. 길이 꼬불꼬불 할뿐만 아니라 외가닥 길이 대부분 이었다. 산 능선 위로 찻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능선이 너무 좁아서 버스 양쪽으로 산 골자기와 산밑의 강이 훤히 보일 정도 이었다. 버스는 시속 10 킬로미터로 갔다.

도로변에는 동네도 없었다. 어쩌다가 약간 넓은 곳이 나오면 집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농사지을 수 있는 땅도 없는데 이사람 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도로양편의 산비탈에 심어놓은 바나나가 전부였다. 화전을 일구는지 산의 곳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뿌연 하다.

루앙프라방은 절의 도시다. 옛날에는 절이 60개나 되었는데 많이 불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20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루앙프라방 이라는 말 자체가 신성한 부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구 도시 지역은 전체가 유네스코 에 인류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다고 한다.

남간강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니 산으로 올라가는 아주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순전히 돌산인데 이 돌들을 교모 하게 이용해서 절을 지어 놓았다. 암석들이 기울어져 있었고 석탑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석굴 안에는 배 나오신 앉아계신 부처님 도 있었다. 절의 이름이 왓촘씨 절 이라고 한다. 들어 갈 때 입장료 20000킵을 받았다. 이 절의 특징은 부처님께서 이 산에 오신 적이 있는데 부처님의 발자국 하나가 돌에 찍혀서 지워지지 아니하고 지금도 남아 있었다.

누각 같은 것을 지어서 부처님 발자국을 비바람을 부 터서 보호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부처님 발자국을 보았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컸다. 이렇게 큰 발을 가지신 부처님은 얼마나 크셨을 까. 또 부처님 손 바닥은 얼마나 컷을까. 여의봉을 휘두르며 재주를 부리는 손오공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간강을 따라서 나있는 킹키싸라쓰 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메콩강을 만나게 된다. 메콩강을 마주하고 아주 큰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와씨엥똥 절 이라고 한다. 동남아의 절은 다 아름다운데 라오스의 절들은 특히 더 아름답다. 지붕에는 금색 찬란한 번개모양의 기다란 문양을 세워 놓아서 절이 금방 하늘로 날아 오를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이 절에는 길이가 백 미터나 되는 긴 카누 같은 배를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열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극락 강을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라고 한다. 나는 그 배에 올라 가보았다. 내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극락에 가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도 나는 배에서 내려서 나무 그늘을 찾아가서 낮잠을 잤다. 낮잠이 극락보다 급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름 모를 꽃 잎들이 하염없이 내 가슴위로 내렸다.

시내에는 또 다른 절도 있었는데 이 절에는 황포승복을 입은 동자 스님들이 많이 있었다. 시내에는 재래 시장도 있었다. 어떤 현지인이 바나나 잎으로 싼 떡을 하나 산다. 나도 하나 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떡은 다른 떡에 비해서 값이 상당히 비쌌다. 호스텔에 와서 먹으려고 바나나 잎사귀를 벗겨보니 떡이 아니었다. 벌집의 하얀 애 벌래 가 들어있는 부분을 찐 것이었다. 나는 눈 딱 감고 맥주하고 해서 먹었다. 맛 있었다.

이 호스텔에는 젊고 아름다운 일하는 아가씨가 세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두머리 격인 조그맣고 예쁜 끼엘레 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25살 이라고 한다. 아이가 몇이나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 아이가 있다고 한다. 큰 아이가 몇 살 이냐고 물었더니 열 한 살이라고 하였다. 나는 잠 간 의아해 졌다. 그리고 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25에서 11을 빼면 얼마가 될 까. 이 아가씨가 도대체 몇 살에 애기를 낳은 거야.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이 아가씨가 웃는다.

거리의 곳곳에는 당신 몸을 가리시오 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라오스는 너무 더워서 서양 여자 아이들이 거의 벗고 다녔다. 또 거리의 어떤 곳에 하얀 거물이 있었는데 담장이 굉장히 높았다. 이 담장 높은 건물에서 늙고 아름다운 서양여자가 근사한 차를 타고 나온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경비원 에게 여기가 무엇 하는 곳이냐고 물어 보았다. 옛날에는 감옥 이었는데 개조해서 지금은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루 밤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미화 1000달러라고 한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머무는 호스텔은 하루 밤에 3달러였기 때문이었다.

또 어디를 갔더니 김삿갓식당 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한국말과 영어로 쓰여있었다. 나는 루앙 프라방에 한국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떤 중년이 좀 지난 남자분이 나왔다. 나는 혼자 루앙 프라방에 놀러 왔다고 말하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이 분은 원래 한국에서 간판 제작소를 운영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마사지 업소를 운영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했다. 그 뒤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이 적성에 안 맞아서 혼자서 월남의 사이공으로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 음식점을 개업 하셨다고 한다. 돈을 좀 벌어서 가족을 모두 사이공으로 이주 시켰다고 한다.

마누라와 자식들은 사이공에 남겨두고 혼자 루앙 프라방에 와서 김삿갓 식당을 차렸다고 한다. 손님들이 현지인들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한다. 많이는 오지는 않지만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가끔 온다고 했다. 그러면 적자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하였다. 음식은 현지 여자들을 가르쳐서 만들고 있지만 중요한 요리는 자기가 직접 한다고 하신다. 나에게 커피를 한잔 주셨다

내가 감옥을 개조해서 만든 호텔 이야기를 하였다. 하룻밤 숙박료가 1000달러면 너무 비싼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말씀 하신다. 그 전에 일본의 황태자가 여기 구경 온 적이 있는데 그분이 머 물었던 호텔은 방값이 하룻밤에 미화 3000달러였다고 말씀 하신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 분 이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 한마디가 있다. 우리는 여기 100년을 살아도 이방인 입니다. 나는 그 분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는 무수한 인종들이 살고 있고 너나 나나 다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루앙프라방은 이번 나의 동남아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처음에 도착했던 하노이로 돌아갔다.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영생을 생각하다

혼자서 배낭을 메고 외국을 여행해본 것은 이집트가 처음이었다. 2005년이었고 내 나이 66세였다. 환갑을 훨씬 지난 나이에 외국을 혼자서 여행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강도를 당할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둘째 아들이 그 당시 대한항공에 일하고 있었다. 어디 외국에 여행 가고 싶은 데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대한항공에 일한지가 오래되어서 가족 중 한 사람의 비행기 왕복표를 외국의 어느 나라던지 무료로 만들어 줄 수가 있다고 했다.

이집트를 택하였다. 7대 불가사의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피라미드를 보고 싶었다. 이집트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어떻게 배낭여행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현지 호스텔에 가면 젊은 배낭여행객들이 와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물어 보거나 같이 좀 다니자고 하면 되지 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였다.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가기 전에 카이로에 있는 한 호스텔에 3일밤을 예약을 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에서 비행기를 타고 두바이를 거쳐서 카이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환전소로 갔다. 한 중년남자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미화 100달러 한 장을 건 냈다. 이집트 돈을 수도 없이 많이 주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창이 있었고 밑으로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내가 받은 돈을 유리창 앞의 진열대에 좍 펴놓았다.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 장 한 장 세었다. 큰돈 한 장이 모자랐다. 환전 원을 쳐다보았다. 그는 씩 웃더니 큰돈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당신은 부자다.’ 라고 말했다.

대합실로 나왔다. 한 그룹의 한국 단체관광객들이 나왔다. 한국가이드 에게 카이로 시내까지만 버스에 같이 좀 타고 갈 수 없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가이드 말이 공항서 부 터는 현지가이드가 책임지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대합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한 중년남자가 팻말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유리창을 통해서 보였다. 팻말에는 카이로 시내 10불이라고 적혀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택시기사라고 하였다.

택시 승강장으로 갔더니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아랍 식 복장을 한 기사들도 많이 있었다. 택시에 오르려고 하자 경찰이 다가와서 여권을 보자고 하였다.

경찰은 자기 공책에 나의 모든 인적 사항을 적었다. 택시기사에게 운전면허를 달라고 하여 적었다. 택시의 번호판도 적었다.

오다가 기사가 말하였다. 경찰은 나의 안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적은 것이라고. 어찌해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택시기사가 가는 도중에 공범을 하나 더 태운 다음 사막으로 데리고 가서 짐을 뺐고 옷을 벗긴 다음 손님은 사막에 남겨두고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카이로는 공해가 심했다. 건물들과 회교사원들은 우중충한 회색이었다. 도중에 경찰이 차를 세우고 검문검색을 하였다. 기사가 오른 편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가르치면서 대통령 궁 이리고 했다. 공해가 심하니 가난한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다 같이 더러운 공기를 마실 수 밖에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가다가 기사가 왼쪽을 가르치면서 저기가 공동묘지인데 100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호스텔의 건너 편에는 맥도날드 햄버거 집이 있었다. 프론트에는 젊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숙박계를 쓰는데 이 아이가 뭐라고 하면서 나를 툭 치는 것이었다. 수속을 다 마치고 배낭을 들려고 하자 이 아이가 볼펜을 하나 주었다. 윗도리 주머니를 보았더니 있어야 할 볼펜이 없었다.

돔 방으로 안내되었다. 침대가 여덟 개 있었는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자전용 돔 방에는 여자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여자는 중년여자였고 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처녀는 페르시아 공주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통이 넓은 분홍빛 비단바지에 자주색 저고리를 받쳐입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랍국가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아가씨에게 같이 좀 다니자고 말해 볼까 하였으나 입이 떨어지지 아니 하였다.

아직도 이른 아침이라 이집트 박물관을 찾아갔다. 어떤 곳에 택시들이 많이 있었고 기사들도 있었다. 한 기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박물관에 가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박물관은 아침9시 까지만 개인 입장객을 받고 그 다음 부 터는 단체 입장객만 받는다고 했다. 구경꾼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그 사람 말을 믿지 아니하고 계속 걸었다. 길 건너 편에 커다란 주황색 건물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저것이 박물관 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거리에 경찰관 두 사람이 있어서 저것이 박물관 이냐고 물어 보았다. 이 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손을 홰홰 저었다.

양복을 입은 신사가 지나가서 물어 보았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차들은 무섭게 길 양쪽으로 전 속력으로 달렸다. 사람들은 차들 사이사이를 곡예사처럼 길을 건너갔다.

나도 한번 건너볼까 하고 시도해 보다가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 때 한 현지청년이 지나 가면서 저 앞의 그림가게로 들어가면 지하도가 있어서 건너갈 수가 있다고 했다. 반신반의 하면서 가게로 들어갔더니 지하도 같은 것은 보이지 아니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얼른 돌아서 나와 버렸다.

아까 그 청년이 되돌아 왔다. 길을 건너가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아침 9시까지만 개인 입장객을 받는다고 하면서 택시기사와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밤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인데 집이 마침 피라미드 부근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택시는 요금이 비싸니 버스를 타고 가자고 했다. 나는 망설였지만 그 청년이 거짓말 할 사람 같이 보이지 아니하여서 그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그의 이름은 ‘알리’ 라고 했다.

버스요금은 두 사람 것을 합해보아야 1000원도 안되었다. 얼마 가지 아니하여 길거리에 내렸다. 차는 손님이 원하는 어느 곳에서나 세워 주었다. 알리는 나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골목으로 들어갔다. 검은 옷을 입은 아낙네들이 먼지가 이는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같이 놀고 있었다.

알리는 계속 말을 하면서 나를 안심 시켰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 오늘 나를 안내해주면 사례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알리는 ‘돈이 뭐 그리 중요하냐’ 하면서 나를 안심 시켰다. 나는 참 친절한 이집트 청년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알리는 나에게 병물 도 사주었다.

조금 더 가니 낙타들이 앉아 있었다. 알리가 “피라미드에 갈려면 낙타를 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낙타주인을 잘 아니까 싸게 해줄 테니 낙타를 타고 피라미드에 가자.” 고 하였다. 낙타 사무실로 들어갔다. 주인은 흰 아랍 식 옷을 입고 터번을 쓰고 있었다. 실제가격은 얼마인데 많이 깍 아 주겠다고 말했다.

낙타주인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참 용감한 사람이다. 카이로에서 관광객이 많이 죽는다고 신문에 났을 텐데 어떻게 혼자서 여기까지 왔느냐?” 고 하는 것이었다.

구경꾼은 나 혼자인데 네 개의 생명체가 나를 호위하였다. 알리 와 몰이꾼 한 사람 말 한 필과 낙타 한 마리였다. 낙타 등에 올라타자 낙타가 일어섰다. 동작이 어찌나 큰지 낙타에서 떨어질 번 했다. 몰이꾼이 나를 부축하였다.

나는 낙타를 타고 갔고 알리 와 몰이꾼은 걸어서 갔다. 낙타의 걸음은 느리고 폭이 컸다. 내 몸이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얼마 가지 안아서 배가 아파서 더 이상 낙타를 타고 갈수가 없었다. 몰이꾼이 낙타를 세웠다 그리고 나를 말로 옮겨 태웠다.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말이나 낙타를 타고 신이 나게 달린다. 나는 그것이 사실인지 의심하지 안을 수 없었다.

인가 끊어지고 모래사장이 나왔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이었다. 햇볕은 사정없이 내려 쪼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모래가 나의 얼굴을 때렸다.

나는 모자라도 쓰고 있었지만 알리 와 몰이꾼은 모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햇볕이나 바람을 무서워하지 안았다. 이들은 그 이글거리는 태양에 자기들 몸을 내 맡기고 있었다. 몰이꾼이 말을 빨리 몰아서 나를 즐겁고 무섭게 만들었다. 거대한 피라미드 가 장관을 들어내고 있었다.

낙타사무실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알리는 낙타 사무실 옆에 있는 향수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나 꽃에서 채취한 향수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 나는 늙었기 때문에 향수를 줄 사람이 없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주인은 끈질기게 향수를 사라고 권하였다.

알리는 나일강으로 가서 놀자고 하였다. 그 다음에 기차정거장으로 가서 왕들의 계곡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자고 했다. 기차표는 밤에만 판다고 하면서 지금 가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도 만나보고 자기 식구들도 만나보자고 했다. 이집트인 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였기 때문에 나는 알리 의 말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택시를 탔다. 알리 가 말했다. 여동생이 다음주 결혼하는데 잔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양주와 양담배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양주와 양담배를 좋아한다고 했다. 면세점에 들려서 양주와 양담배를 사달라고 했다. 돈은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출국할 때 지장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알리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가는 도중에 알리는 한 젊은 동양청년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에 한글로 한국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알리는 이 청년도 자기가 구경 시켜 주었는데 양주와 양담배를 사 주었고 자기집에도 갔었다고 하였다

면세점 안으로 들어갔다. 알리는 주인과 싸우는 것처럼 이야기 했다. 양주와 양담배를 사주어도 출국 시 지장이 없겠느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괜찮다고 하였다. 주인은 양주 두 병과 양담배 두 보루를 꺼냈다. 서류를 작성 하더니 나더러 싸인 하라고 하였다. 여권에 물품도장을 쾅쾅 찍었다.

알리는 양주와 양담배를 가게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밖에는 뚱뚱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리는 양주와 양담배를 이 사람에게 주었다. 무엇인가 받아서 자기 주머니 속에 넣었다. 우리는 다른 택시에 올랐다. 나일강으로 간다고 하였다.

왜 술과 담배를 안 가지고 가느냐 고 알리 에게 물어보았다. 알리는 지금 돈이 없어서 물건을 맡겨 두었다가 후에 집에 가서 돈을 가지고 와서 찾아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일강에 도착하였다. 알리는 면세점까지의 택시비와 여기까지 온 택시요금을 달라고 하였다. 달라는 대로 주고 나는 더 이상의 현찰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신용카드 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돈이 있는 줄을 알면 다 쓰게 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변은 시멘트 벽으로 처리가 되어있었다. 강물은 저만치 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배가 한 척 있었고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알리는 음식을 시키고 술도 시켰다. 한 사람이 배에서 내려서 뛰어갔다. 조 금후에 맥주 네 병과 생선 튀김이 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강물은 넓고 유속이 느렸다. 커다란 호수를 항해 하는 것 같았다. 붉은 연꽃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강 가운데 커다란 섬이 있었다. 이 섬에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부자들이 사는 게지 섬이라고 하였다.

술과 음식을 먹었다. 사공은 음악을 틀었다. 알리 와 나는 노래 부르고 춤 추었다. 사공은 우리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었다. 사공이 돈을 달라고 하면 나는 면 모르는 일이라고 고 말하라고 하였다. 자기에게 이야기 하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돈을 알리가 내겠다는 뜻인가 하고 잘못 생각하였다.

강변에 닫자 알리가 나더러 미화 300달러를 달라고 하였다. 나는 아까 너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지 안았느냐고 했다. 알리는 나를 은행으로 데리고 갔다. 은행은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알리는 나를 금전 자동 출납 기로 데리고 갔다. 돈을 뽑으라고 했다.

금전 출납 기의 화면의 글자가 너무 작았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두 개의 글자가 동시에 찍혔다.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때 순찰 돌던 경관 두 명이 와서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말했다. 순경에게 말해 보았자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리 에게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내일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서 주겠다고 말했다. 알리는 밤에 여는 은행이 있으니 가보자고 했다. 그 은행도 문이 닫혀있었다. 알리는 한 그림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림가게 주인은 돈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밤은 깊었다. 지친 나는 바지안쪽 비밀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서 주어버릴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알리 와 사공이 내 몸에 거액의 돈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냥 보내 줄 지가 의심스러웠다.

알리가 택시를 잡았다. 사공도 택시에 탔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이대로 끌려 다니는 것이 나은지 반항해 보거나 탈출을 시도해 보는 것이 옳은지 생각에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알리 가 나를 이렇게 끌고 다니는 것은 내 몸에 현찰이 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해치려고 하겠는가 라고..

한참을 가다가 어디선가 섰다. 낯익은 곳이었다. 아침에 낙타를 탔던 곳이었다. 밤이 되어서 태양도 지고 서늘해 졌다.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아랍 식 복장을 한 노인들이 죽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알리는 향수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낙타 주인에게 내 신용카드로 300불을 뽑아달라고 했다. 60불의 커미션을 주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돈을 받고 나서 손가락으로 알리를 가르치면서 ‘아는 사람이냐?’ 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이 대답했다. “알리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다.”

알리 에게 이제 셈이 다 끝났으니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알리가 택시를 잡았다. 사공은 돈을 다 받았는데도 또 같이 택시를 탔다. 세 사람이 탄 택시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집트에 고속도로가 있는 줄 미쳐 몰랐다.

택시는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달렸다. 호스텔로 가는 줄 알았는데 택시가 한 시간 이상을 달렸다. 알리 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다. 알리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나의 운명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한참을 더 가다가 차가 고속도로에서 내렸다. 맨 흙의 넓은 광장이 있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백열등을 수백 개켜놓고 수레에 물건들을 가뜩 싣고 팔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였다. 먼지가 뽀얗게 일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야시장이었다.

알리는 또 돈을 달라고 하였다. 아까 받은 돈 중에서 저를 주고도 우수리 돈이 나에게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머니의 돈을 털어서 다 주었다. 알리 가 택시를 잡았다. 운전수에게 얼마인지 모를 돈을 주었다. 나더러 택시를 타라고 하였다. 나는 알리 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다. 알리는 자기는 자기집에 다 왔으니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나의 볼에다 대고 뽀뽀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친구여 고맙다. 잘 가시오.”라고.

방에는 오늘밤에도 아무도 없었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써 여덟 시였다. 프론트로 갔다. 허둥대는 것을 본 어제의 그 청년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홉 시 가 지나면 박물관에 못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가 그러 드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박물관에는 돈만 내면 아무 때나 들어갈 수가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인산인해였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많이 보였다. 피라미드 속에는 죽은 왕이 저승에서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만들어 넣어두었다. 이 물건들을 꺼내서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커다란 배도 있었고 여자들이 아이 낳을 적에 사용하는 의자도 있었다. 이집트 여자들은 엉거주춤 서서 애기를 낳았다.

동물의 미이라도 수없이 많이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더니 어떤 것은 가짜 미이라 임이 판명되었다. 모양만 동물이지 나무 가지 등 거짓물건을 속에 넣고 미이라를 만든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기꾼은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그것도 감히 정부를 상대로 해서.

왕들의 미이라도 있었다. 투탕카멘 의 금으로 만든 가면은 인상적이었다. 왕의 미이라의 가슴에는 금으로 만든 풍뎅이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풍뎅이는 소 똥을 동그랗게 뭉친 다음 그 안에 알을 하나 낳고 죽는다. 알은 소 똥을 먹고 자란 다음 성충이 되어 밖으로 나온다. 죽은 풍뎅이 옆에 새로운 풍뎅이가 있으니 이집트 사람들은 풍뎅이가 부활 한 것으로 믿었다. 왕이여 부활 하소서.

나는 이집트에 정이 떨어 졌고 무서워 졌다. 호스텔 청년에게 부탁하여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청년은 택시비를 먼저 달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택시가 왔다. 청년이 택시기사에게 직접 돈을 주었다. 그라고 기사에게 공항까지 나를 태워다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한국남자가 한 사람 있었다.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분은 중국사람이었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답답한 심정을 한국여자 승무원에게 털어 놓을 수가 있었다. 한 달로 예정하고 떠났던 나의 최초의 해외 배낭여행은 이틀 만에 끝나고 말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돌아왔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케냐 나이로비 공원에서 낮잠자기

아루샤에서 달라 달라 미니버스를 타고 5시간에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승객은 현지인들 이었고 나 혼자만 외국인 이었다. 정거장에 내리자 사람들이 벌떼 같이 달려 들었다. 택시를 타고 가자느니 싸고 좋은 호텔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손님잡이 들이었다.

이들이 잡아주는 택시를 타면 돈을 더 주어야 한다. 손님을 데려다 주고 택시기사로부터 팁을 받기 때문이다. ‘아바리 약콕? (안녕 하세요?)’ ‘앗살람 알라이쿰 (회교 인사)을 연발 하였다. 이들은 나를 놓아 주었다.

근처의 공원으로 갔다. 남은 양고기 싸온 것을 먹기 시작 했다. 가방 과 배낭을 풀어 해치고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하면서 속을 다 보여 주었다. 돈 될 만한 것은 없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은 안 보는 척 하면서도 나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보고 있었다.

잔디 위에 누웠다. 배낭은 머리에 베고 가방은 두 다리를 올려 놓았다. 잘 때는 몸의 어딘가에 물건이 닿도록 해야 했다. 누가 가방을 건드리는 바람에 눈을 떴다. 애가 공을 가지고 놀다가 부딪친 것이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길거리로 나섰다. 호스텔로 가자면 택시를 타야 했다. 택시는 위험하다. 운전수 외에 사람이 타고 있는 택시는 타지 말아야 한다. 도중에 운전수가 사람을 태우면 차에서 내려야 한다.

1200 케냐 쉴링에 흥정을 끝내고 택시에 올랐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