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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안옹왕 동상도 보고

비엔티안

비엔티안에 도착하니 날은 환히 밝아 있었다. 정류소는 넓었고 한쪽 켠은 전부가 음식점이었다. 음식점 전면은 문도 없이 툭 터져있었다. 맨 땅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다. 팍세에서 사온 즉석 김치밥을 먹었다. 맥주 큰 병을 하나 샀다. 밥 먹을 때 술을 먹는다. 거친 음식도 잘 넘어가기 때문이다.

호스텔을 찾아가야 한다. 버스 정류장 앞에 커다란 간판을 세워 놓았다. 비엔티안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다. 메콩강에 접해 있고 인구는 80만명이다. 비엔티안은 불란서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이름이고 라오스어로는 ‘위양짠’이라고 불렀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호스텔의 주소를 보여 주면서 어디서 버스를 타느냐고 물어 보았다. 청년 한 사람이 다가왔다. 5만킵을 주면 툭툭 택시를 태워 주겠다고 했다. 2만이면 가겠다고 하였다.

지도 있는 데로 돌아왔다. 아침도 먹었겠다 아직 시간은 이르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늘 해중으로 호스텔만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시멘트 벽에 기대 앉아서 잠을 청했다. 잠이 들려고 하는데 아까 그 청년이 와서 깨웠다. 2만킵에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툭툭에는 짐이 잔뜩 실려있고 현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었다.

호스텔 이름은 ‘시옴’이었다. 메니저의 이름은 ‘필립’이었다. 호주사람인데 여행 왔다가 주저 앉았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배낭 여행객들이 호스텔에서 일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다음 행선지로 떠날 경비를 벌고 있는 것이었다.

손님은 모두 서양 사람들이었고 동양 사람은 나 혼자였다. 동남아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배낭족은 거의가 유럽의 젊은이들이었다.

배낭 여행을 하면서 50세가 넘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호스텔에는 72세된 영국 할아버지가 와있었다. 부인과 이혼하고 울적해서 왔다고 했다. 호스텔은 친구가 말해주어서 알았다고 하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외국 여행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다. 여행이 좋아서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거나 배우자와 이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전에 여행 다닐 때는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지 안았다. 직장 컴퓨터로 비행기나 호스텔 예약을 했다. 여행책자를 이용하여 여행지 정보를 구하였다. 은퇴를 하고 삼성 태블릿을 샀다.

영국 할아버지가 태블릿 사용하는 것을 보더니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자기도 하나 사야겠다고 말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선진국 시민이 아직도 컴퓨터가 없을까. 컴퓨터가 일반화 된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메콩강으로 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장수의 동상이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허리에는 큰 칼을 차고 있었다. 오른팔을 강을 향해 뻗고 있었다. 청년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았더니 모르겠다고 하였다. 중년 신사에게 물어 보았더니 모르겠다고 하였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물어 보았더니 비엔티안 왕조의 안옹 왕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블랙 템플에 가보았다. 절이 아니라 거대한 검은 돌탑이었다. 주변에 쇠사슬을 쳐놓았다. 안에는 잔디를 심어 놓았다. 겉만 보고 지나갔다.

절을 찾아 갔다. 여러 가지 문구가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나무아미타불과 심상사성이란 말이 있었다. 나무아미타불은 부처님께 귀의 해서 극락정토에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심상사성은 뜻을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알아보았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으면 먼저 마음 속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은 블랙 템플을 거쳐서 왔다. 안의 잔디밭 그늘에 누었다. 잠이 들었다. 얼굴이 따끈하여 눈을 떴다. 햇빛이 얼굴에 와있었다. 탑은 원형이어서 그늘이 금방 비껴가 버렸다. 몸을 돌려서 그늘로 이동했다. 금방 햇빛이 얼굴에 닿았다. 또 몸을 돌려서 그늘로 갔다. 한참을 자다 보니 영 햇빛이 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라오스의 팍세…제3의 도시인데…

팍세

팍세는 캄보디아의 씨엠립에서 제일 가까운 라오스의 도시다. 해외 여행시 한 지점으로 부터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육로 가는 방법이 가장 흔하다. 그러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을 때가 있다.

씨엠립으로 부터 이름 모를 회사의 비행기를 타고 팍세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타면 10시간이 걸리는데 비행기는 한 시간에 도착하였다. 탑승객 중에 배낭을 맨 사람은 나 혼자 뿐 이었다.

공항 이민국 직원이 미화 35달러를 받고 커다란 비자를 여권에 붙여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택시도 없고 버스도 없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청소하는 아줌마에게 호스텔 주소를 보여 주면서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 하였다.

아주머니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라오스 돈 2만킵을 주었다. 말없이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미화 1달러는 8000킵이니까 20000킵은 미화로 3달러쯤 되었다.

호스텔은 메콩 강가에 있었다. 이 호스텔은 호스텔이 아니라 호텔이었다. 독방을 나에게 주었다. 2층과 3층은 호텔 방이고 1층은 음식점으로 사용 하고 있었다. 주인 남자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고 주인 여자는 홀을 관리하고 있었다.

세 살 난 아들이 있는데 내 지팡이를 가지고 놀기 좋아하였다. 여기는 라오스인데 주인이나 종업원들은 모두 월남 사람들이었다. 라오스는 월남보다 경쟁이 덜 심하다고 말하였다. 주인 여자는 라오스 말을 유창하게 하였다.

동남아에 대한 속담이 생각났다. 월남사람들은 벼를 심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며 라오스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얼른 듣기에는 라오스 사람들은 게으르다 말같이 들린다. 그러나 참뜻은 모든 나라 국민들은 기후와 풍토에 맞게 살아 간다는 뜻이다. 라오스는 월남이나 캄보디아 보다 더 더웠다.

팍세는 옛날에 참파삭이라는 왕국의 수도 이었다. 뒤에 라오스와 합병하였고 지금은 라오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는 9만명이다. 걸어서 시내로 갔다. 쎄도네 강으로 갔다. 다리 건너에 커다란 부처의 좌상이 보였다.

다리 이름을 써 붙여 놓았다. 라오스 – 니뽕 다리였다. 니뽕은 일본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은 이 다리를 놓아준 대가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라오스로부터 챙기고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는 길었다. 다리 밑의 그늘에서 잤다. 돌아올 때는 툭툭 택시를 탔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주머니가 꼬치 구이를 밥하고 해서 팔았다. 즉석 김치도 만들었다. 작은 절구통에 마늘 고추 생 멸치젓을 넣고 절구로 찧고 비볐다. 이 비빈 것을 채소 위에 얹어서 밥하고 주었다. 기막히게 맛이 있었다.

재래시장에 갔다. 사방이 터지고 지붕만 있는 음식점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을 잘게 썰어서 후라이팬 같이 생긴 웍 이라는 조리기구에 담았다. 반쯤 복은 다음 채소 파 마늘 고추 가루 소금을 첨가하였다. 다 볶아지면 접시에 담아서 밥 하고 같이 손님에게 주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싶은데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여자가 쭈구미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여자가 나를 쳐다 보더니 뭐라고 말을 하였다. 나는 손님들의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저런 식으로 해달라는 뜻이었다.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참 만에 음식이 나왔다. 울고 싶었다. 쭈꾸미를 물에다 푹 삶아서 3분지 1로 쪼그라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밥 날라주는 아가씨의 손목을 잡았다. 다른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손가락으로 밥을 가르쳤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가져왔다. 쭈꾸미 삶은 것과 밥을 소금을 쳐서 먹었다.

절에 가보았다. 스피커를 통해서 염불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사람이 앓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 갔다. 돌탑이 여러 개 있었다. 여러 가지 짐승과 사람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한 면에는 사람들의 이름을 죽 적어 놓았다.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다른 면에는 얼굴 사진을 여러 장 붙여 놓아 놓았다. 죽은 사람들이었다.

호스텔 여주인을 통해서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가는 밤 버스를 예약하였다. 침대버스였다. 침대 한 칸에 두 사람씩 잔다고 했다. 혼자 자겠다고 하였더니 두 사람 요금을 내라고 하였다. 여자랑 같이 자겠다고 하였더니 안된다고 하였다. 남자는 남자끼리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잘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두 사람 요금을 지불 하고 표를 샀다. 버스는 밤 10시에 출발 한다고 하였다. 밤 9시까지 방에 있다가 버스 타러 가겠다고 하였다. 하루 밤 요금을 더 달라고 하였다. 사정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 밤 숙박비를 더 주었다.

배낭은 메고 가방은 끌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절둑 거리며 걷기 시작하였다. 누가 내 가방을 나꿔 챘다. 놀라서 쳐다 보았더니 호스텔에의 남자 종업원 이었다. 여주인이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 주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정류장에는 수 십대의 버스가 있었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호스텔 종업원이 내가 타야 할 버스도 찾아주고 짐도 침대까지 날라다 주었다. 여주인에게도 고맙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비엔티안까지는 670킬로 미터로 11시간이나 걸렸다.

캄보디아…프놈펜 씨엠립, 툭툭타고…앙코르와트

씨엠립

프놈펜에서 씨엠립 가는 길은 대단히 안 좋았다. 길이 울퉁불퉁했다. 여기저기 포장공사를 하고 있어서 버스가 산동네로 들어서서 돌아가기도 했다. 300킬로 미터를 7시간이나 걸려서 씨엠립에 도착하였다. 택시기사들이 우루루 몰려 들었다.

프놈펜에 있을 때 씨엠립 호스텔에 이메일을 보냈다. 버스 종점에서 무엇을 타고 가면 되느냐고 물어 보았다. 택시를 보내주고 다음날 앙코르 와트 구경갈 때 같은 택시를 이용하면 돈을 안 받겠다고 하였다. 캄보디아에는 툭툭 이라고 하는 택시가 일반적이다.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네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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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까지 미화 5달러 받겠다고 하였다. 앙코르와트에 가겠으니 호스텔 가는 요금을 받지 말라고 하였다. 내일 종일 툭툭을 사용하고 20달러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고 하였다.

버스 종점에서 호스텔이 있는 구도시로 가는 길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버스 트럭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들이 뿌연 먼지 속에서 뒤엉켜서 움직였다. 수 만 마리의 새가 함께 움직여도 서로 부딪치지 아니하고 잘 움직여 나가는 것과 흡사하였다.

앙코르와트는 씨엠립에서 6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제주도 크기의 10 분지 1쯤 되는 인공섬을 만들어 놓고 이 안에 여러 개의 신전을 지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앙코르 와트이다. 앙코르는 크메르어로 도시라는 뜻이고 와트는 신을 모시는 땅이라고 한다. 따라서 앙코르 와트는 신을 모셔놓은 도시라는 뜻이 되겠다.

신전은 12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르야바르만이라는 왕이 지었다. 가로 1500미터 세로 1280미터에 이르는 땅에 담을 쌓았다. 담의 높이는 4.5미터다. 담 주변의 땅을 파서 신전을 에워싸는 인공강을 만들었다. 인공강의 폭이 200미터이다. 길이는 6킬로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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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두 개가 있다. 서쪽에 석회암으로 만든 뚝방 길이 있고 동쪽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다. 방문자들은 서쪽의 뚝방 길을 걸어서 앙코르와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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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가 크메르 제국의 국교여서 신전에는 힌두교 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대표적이 신이 비시누 신으로 중앙신전에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괴되고 없다. 이 신의 특징은 무소부재하였다는 것이다.

입구 양쪽에 호랑이 같이 생긴 수호 짐승이 버티고 있었다. 이 땅 안에는 5개의 신전이 있었다.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만든 석조 건물이었다. 건물은 옆으로 넓적하게 생겼지만 중앙을 높게 만들어서 탑 이라고 불렀다.

탑들은 높이가 모두 다르다. 앞의 것이 제일 낮고 차츰 높아져서 뒤 의 것이 제일 높다. 사람과 동물들의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 되어있었다. 앙코르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고 자연과 어울러 지게 지어진 신전이다. 그리스와 로마와 이집트 의 모든 신전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한다.

앙코르와트의 한 켠에는 신전을 지을 때 만들어 놓은 인공호수가 있다. 앞에 서면 모든 신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앙코르와트의 특이한 점은 신전들이 죽음을 뜻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수르야바르만 왕이 자기의 무덤으로 사용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왕은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고 싶었던 것이다.

첫 번째 신전의 앞면 전체는 양각 조각으로 덥혀 있었다. 원숭이 조각이 많이 있었다. 단체 관광객 가이드가 설명하는 것을 엿들었다. 악마 왕이 미남으로 변신하여 사람 왕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빼앗아 갔다. 군사가 모자랐던 사람 왕은 원숭이들을 군사로 훈련시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부인을 도로 찾아왔다고 설명하였다.

앙코르와트에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많이 만났다. 이들을 따라 다니면서 한국 가이드가 설명해 주는 것을 들었다. 현지 남자 두 명이 오더니 따라 다니지 말라고 했다. 다른 한국인 단체 관광객에게로 가서 설명을 들었다. 쫓겨나면 또 다른 한국 관광객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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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신전 입구에 윗부분이 나체인 아름다운 여자 대리석 조각이 있었다. 이 여자의 젖통을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질반질 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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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에서 1 킬로 떨어진 곳에 앙코르똠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은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이라는 왕이 건축했다. 이 때는 불교시대여서 이 신전에서는 불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불상이 하도 커서 얼굴하나를 만드는데 여러 조각의 대리석을 사용 하였다. 얼굴의 부분 부분을 조각하여 서로 붙여서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

신전 내부는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미로의 구석으로 가서 늘어지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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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코스는 거대한 나무뿌리로 뒤 덥힌 신전이었다. 앙코르와 부근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신전과 마을을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뒤에 수 백년 동안 나무들이 자라서 모든 신전과 마을을 뒤덮었다. 1900년대에 와서 나무를 걷어내고 신전과 마을의 일부를 복원시켰다.

앙코르와트는 건물과 조각이 아름답고 정교하여 일생에 한 번은 꼭 와보아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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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호스텔로 프놈펜에서 헤어졌던 젊고 아름다운 그리스 아가씨 띠오도라가 찾아왔다. 씨엠립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 연필 100자루와 공책 100권을 사다 주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캄보디아의 초등학교에는 연필 없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띠오도라는 착한 처녀였다. 저녁을 사 주었다. 내일 영국으로 돌아 간다고 하였다.

씨엠립에서 라오스로 가는 육로는 길이 나쁘고 험하다. 버스를 포기하고 비행기로 라오스의 팍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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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했던 호스텔이 없고, 고비사막서 불타는 절벽을 걷다

몽골 편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 한국으로 갔다.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의 나라다.

5월의 공항 밖은 쌀쌀하였다.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시내로 들어온 기사가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호스텔월드 인터넷을 통해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다른 데로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와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나갔다.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데로 갔다.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있었다. 이름 모를 몽골 음식을 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몽골로 왔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에 가던지 아니면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고 싶었다.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 신청서를 받았지만 적는 내용이 까다롭고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야 비자가 나온다고 했다.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했다.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곧 해결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 안에 있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했다. 고비사막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돈을 내면 된다고 했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와 운전수와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했다. 다른 여행사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 반찬을 파는 코너가 있었다.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3분지 2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했다. 돈을 주자 내일아침 7시까지 오라고 하였다.

차는 짚 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왔다.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섰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았다.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다.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었다. 무엇을 보고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누라의 머리카락은 들어오는 먼지로 금새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고 김치도 먹고 된장국도 먹었다. 일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저녁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금새 사라졌다.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걱정이 된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기사가 ‘여러 번 와 보았다’고 하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몽골 원주민의 집인 게르 앞에 섰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가 나왔다.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다.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그 사람이 가르쳐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다.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가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 천막 집이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다.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 건물의 한 방에서 잤다.

다음날은 어디를 가는데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기사가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여자가 망아지 상처 난 곳에 약을 발랐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하였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다. 말랑말랑 하고 꼭지를 위에서 아래로 훑으니 젖이 쏟아졌다.

원주민들의 게르는 짚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왔다.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차보다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산양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했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앙상하게 죽은 나무 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을 달려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돌을 주어다가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갔다.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다. 나는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갔다.

계곡 입구는 봄날처럼 따뜻하고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개울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다. 절벽위로 독수리가 날고 있었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우비를 입었다. 마누라와 나는 비를 쫄딱 맞았다.

더 들어갔더니 우박이 떨어졌다.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다.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했다. 절벽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했다. 석양이 되자 햇빛을 받아서 절벽이 시뻘겋게 변했다. 장작더미가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그야말로 불타는 절벽이었다.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고 공룡 알이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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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의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에는 몽골의 전통 쇼가 있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몽골 춤을 추었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목청을 짜서 부르는 흐미라는 전통 노래도 불렀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이라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동산에 올라갔다. 커다란 간판에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분 나쁘게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옛날에 한국이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가이드가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어떤 성이 항복하지 안으면 사람의 썩은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서 성안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하였다. 징기스칸은 항복하지 않은 성이 정복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죽여 버렸다고 한다. 여자 어린이도 죽였고 개 돼지도 죽였다. 징기스칸은 질이 나쁜 사람이었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징기스칸은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잡아서 잡아서 모두 죽여버렸다고 했다.

돌아오는 날은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고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퍼 부었다.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