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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와 탄자니아

아프리카 여행 개요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가보는 것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은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11년 동안의 해외 배낭여행 중 아프리카 여행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나는 아프리카에 있는 이집트와 모로코는 벌써 갔다 왔지만 이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중동국가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아랍인들이요 종교는 이슬람교 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 까.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머리 속에 늘 그리는 아프리카 여행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여 요하네스버그 빅토리아폭포 빅토리아호수 그리고 탄자니아 와 케냐를 차례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77세가 되어버려서 나의 몸이 더 이상의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허용해 줄 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또 나는 진짜 아프리카 국가에 갔다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때 되도록이면 나의 모습을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새카만 아프리카에 서 이 일이 가능할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아니하였다. 또 아프리카를 가려면 영국 런던에서 머물렀다가 비행기를 바꾸어 타야 하는데 영국의 일월은 너무 추워서 추위를 몹시 타는 늙은 노인인 나는 도저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나의 신상을 위해서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한 마디 말이 나의 가슴을 후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해본 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나는 나의 마지막 혼자서 하는 해외 배낭여행의 목적지를 케냐와 탄자니아로 정하고 또 모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케냐와 탄자니아

2015년이 힘차게 밝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용감하게 77세가 되었다. 나는 1월 1일부터 31일 일 까지 한 달간 혼자서 배낭을 메고 아프리카 의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였다. 작년에는 석 달 동안 동남아를 여행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무릎이 많이 좋아져서 지팡이는 짚지 아니하였다. 나는 1939년 생이다. 늙은 노인인 내가 혼자서 배낭을 메고 해외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 훼어챠일드 라는 미국전자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그때 출장으로 홍콩과 미국을 가 보았다. 그 회사를 그만둔 후에 살 곳을 찾아서 또는 일 거리를 찾아서 호주 사우디 아라비아 태평양 섬 등을 전전 하였다. 그 뒤에 미국에 정착한 후로는 해외 여행의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마크 투웨인 의 말 을 접하게 된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 지면 해 본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더 후회하게 된다. 가 그것이다. 나는 늦었지만 여행을 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혼자서 여행한다. 단체 여행도 가보았고 둘이서 하는 것도 해 보았다. 단체 여행은 가이드만 따라 다녀야 되고 보여 주는 것만 보아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따라 다니는 것 같다. 둘이서 하는 여행은 현지인 이나 다른 여행객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 들어서 보는 것 외에는 별로 배우는 것이 없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백 번도 더 망설인다. 밥은 어디서 먹을지 감기는 걸리지 않을지 설사 병에는 걸리지 않을지 변비는 걸리지 않을지 개에게는 물리지 않을지 길은 잃어 버리지 않을지 내가 잘 곳을 어떻게 찾아 가야 할지 도둑은 맞지 않을지 차에 치이지는 않을지 내가 가는 곳에 병원은 있을지 강도는 당하지 않을지 등등 걱정이 태산 같다. 나는 배낭을 메고 떠나는 날까지 매일 밤 잠을 못 잔다.

그래도 나는 결국 여행을 떠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늙었으니 곧 죽을 것이다. 집에 가만이 편하게 있어도 죽고 고생 하면서 여행해도 죽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죽기 전에 세상을 보자. 사람을 만나자. 저승에 가서 말 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만들자.

나의 어린 손주는 나를 거지 여행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나는 뉴욕에 갔을 때 무숙자 수용소 에서 열흘을 잔 적이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부근의 호텔 방 값은 하루 밤에 보통 400불을 상회한다. 네 사람이 자는 호스텔 방 도 침대 하나에 100달러씩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거지 수용소를 찾아갔다.

외국 여행 때 비행기표나 호스텔 침대 값은 깍 아 주지 않는다. 오직 절약할 수 있는 길은 교통비와 음식이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 하고는 택시를 타지 않는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 할 때나 국경을 넘을 때에는 되도록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어떤 호스텔 에서는 아침 식사가 나온다. 아무리 거친 음식 이라도 다 먹도록 한다. 어떤 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마켓이 어디 있는지 또는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음식점이 있는 곳을 찾아 내야 한다. 관광객 상대 업소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 에서 미화 50전 하는 밥을 사서 세끼로 나누어 먹은 적이 있다. 혹자는 말한다. 도상국가나 가난한 나라에 가면 돈을 써야지 그 나라 경제가 살아 날것이 아니냐 라고.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나 같은 돈 없고 늙은 노인에게는 해당 무 다. 나는 돈을 아끼고 아끼어서 100개국을 여행하였다.

되도록 현지 말을 좀 배우고 현지인처럼 행동하고 현지인 같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강에 유의하고 교통사고나 강도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야 한다.

나는 1월 1일부터 1월31일 까지 한 달간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를 혼자서 배낭여행 하였다. 로스 엔젤레스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런던과 이스탄불을 거쳐서 나이로비에 도착하였다.

마사이마라 야생동물 국립동물원에서 밤새 사냥한 들소를 뜯어 먹고 있는 사자를 보았다. 근처에서 자기들의 식사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십 마리의 하이네나 도 보았다. 그 용맹하다는 마사이족 마을에도 가보았고 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서 주민의 99%가 무슬림 이라는 인도양의 잔지바르섬에 도 가보았다.

킬리만자로 산에도 가보았다. 포터를 동반한 사파리를 따라가려면 미국 돈 2000달러가 든다. 난 단돈 10불에 다녀왔다. 무릎이 아파 정상등정을 포기하고 킬리만자로 입구인 론드로스 게이트 까지만 갔다 온 것이다. 갈 때는 현지주민들이 이용하는 달라달라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오 가는 길 은 비포장이 많아 차가 몹시 흔들렸고 힘이 들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숙소인 유스호스텔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이 되었다. 사람을 짐짝처럼 많이 태워서 현지주민 여자와 코가 닿을 정도였다. 어떤 젊고 아름다운 궁둥이가 큰 여자가 내 무릎 위에 털썩 앉는 바람에 나는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년에 혼자서 아프리카를 배낭여행 한다는 것은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참으며, 사랑해서는 안될 여자를 사랑하는 일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재미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 후의 느낌

나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가기 전에 이미 다른 아프리카 국가를 가본적이 있다. 이집트 와 모로코를 가 보았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고 하기 보다는 아랍국가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종이 아랍인들 이고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나는 이미 거의100여개국을 여행 하였지만 진짜 아프리카 여행은 미루고 또 미루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지방을 여행하게 되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또 되도록이면 가난한 거지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혼자서 생전 모르는 곳을 걸어 다니기 때문에 봉변이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마이카 에 갔을 때는 얼굴과 머리를 너무 태워서 나를 현지인 취급을 하였고 아르헨티나에 여행 했을 때는 어떤 거지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 마켓이나 상점에 가면 경비가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닌 적도 있었다. 실제로 강도가 다가와서 내 모습을 보고는 돌아서서 가버린 적도 있었다.

아프리카는 영 자신이 없었다. 주민들 거의가 100% 흑인들이고 또 병도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자꾸만 뒤로 미루고 망설여 졌다. 그러나 77세가 되어버린 올해는 지금 안 가면 너무 늦어 버려서 내 일생에 아프리카 여행은 영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고 여행을 댕겨도 죽는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아프리카를 가기로 작정 하였다.

나는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기를 잘했다. 사람들은 색갈만 좀 다를 뿐이지 사는 원리는 어디나 다 똑 같다. 아프리카는 서방세계나 동방세계에 비 해서 좀 가난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더 순박하고 더 인심이 후 한 것 같았다. 또 그들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케냐 나이로비 공원에서 낮잠자기

아루샤에서 달라 달라 미니버스를 타고 5시간에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승객은 현지인들 이었고 나 혼자만 외국인 이었다. 정거장에 내리자 사람들이 벌떼 같이 달려 들었다. 택시를 타고 가자느니 싸고 좋은 호텔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손님잡이 들이었다.

이들이 잡아주는 택시를 타면 돈을 더 주어야 한다. 손님을 데려다 주고 택시기사로부터 팁을 받기 때문이다. ‘아바리 약콕? (안녕 하세요?)’ ‘앗살람 알라이쿰 (회교 인사)을 연발 하였다. 이들은 나를 놓아 주었다.

근처의 공원으로 갔다. 남은 양고기 싸온 것을 먹기 시작 했다. 가방 과 배낭을 풀어 해치고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하면서 속을 다 보여 주었다. 돈 될 만한 것은 없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은 안 보는 척 하면서도 나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보고 있었다.

잔디 위에 누웠다. 배낭은 머리에 베고 가방은 두 다리를 올려 놓았다. 잘 때는 몸의 어딘가에 물건이 닿도록 해야 했다. 누가 가방을 건드리는 바람에 눈을 떴다. 애가 공을 가지고 놀다가 부딪친 것이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길거리로 나섰다. 호스텔로 가자면 택시를 타야 했다. 택시는 위험하다. 운전수 외에 사람이 타고 있는 택시는 타지 말아야 한다. 도중에 운전수가 사람을 태우면 차에서 내려야 한다.

1200 케냐 쉴링에 흥정을 끝내고 택시에 올랐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