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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안옹왕 동상도 보고

비엔티안

비엔티안에 도착하니 날은 환히 밝아 있었다. 정류소는 넓었고 한쪽 켠은 전부가 음식점이었다. 음식점 전면은 문도 없이 툭 터져있었다. 맨 땅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다. 팍세에서 사온 즉석 김치밥을 먹었다. 맥주 큰 병을 하나 샀다. 밥 먹을 때 술을 먹는다. 거친 음식도 잘 넘어가기 때문이다.

호스텔을 찾아가야 한다. 버스 정류장 앞에 커다란 간판을 세워 놓았다. 비엔티안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다. 메콩강에 접해 있고 인구는 80만명이다. 비엔티안은 불란서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이름이고 라오스어로는 ‘위양짠’이라고 불렀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호스텔의 주소를 보여 주면서 어디서 버스를 타느냐고 물어 보았다. 청년 한 사람이 다가왔다. 5만킵을 주면 툭툭 택시를 태워 주겠다고 했다. 2만이면 가겠다고 하였다.

지도 있는 데로 돌아왔다. 아침도 먹었겠다 아직 시간은 이르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늘 해중으로 호스텔만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시멘트 벽에 기대 앉아서 잠을 청했다. 잠이 들려고 하는데 아까 그 청년이 와서 깨웠다. 2만킵에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툭툭에는 짐이 잔뜩 실려있고 현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었다.

호스텔 이름은 ‘시옴’이었다. 메니저의 이름은 ‘필립’이었다. 호주사람인데 여행 왔다가 주저 앉았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배낭 여행객들이 호스텔에서 일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다음 행선지로 떠날 경비를 벌고 있는 것이었다.

손님은 모두 서양 사람들이었고 동양 사람은 나 혼자였다. 동남아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배낭족은 거의가 유럽의 젊은이들이었다.

배낭 여행을 하면서 50세가 넘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호스텔에는 72세된 영국 할아버지가 와있었다. 부인과 이혼하고 울적해서 왔다고 했다. 호스텔은 친구가 말해주어서 알았다고 하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외국 여행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다. 여행이 좋아서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거나 배우자와 이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전에 여행 다닐 때는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지 안았다. 직장 컴퓨터로 비행기나 호스텔 예약을 했다. 여행책자를 이용하여 여행지 정보를 구하였다. 은퇴를 하고 삼성 태블릿을 샀다.

영국 할아버지가 태블릿 사용하는 것을 보더니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자기도 하나 사야겠다고 말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선진국 시민이 아직도 컴퓨터가 없을까. 컴퓨터가 일반화 된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메콩강으로 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장수의 동상이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허리에는 큰 칼을 차고 있었다. 오른팔을 강을 향해 뻗고 있었다. 청년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았더니 모르겠다고 하였다. 중년 신사에게 물어 보았더니 모르겠다고 하였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물어 보았더니 비엔티안 왕조의 안옹 왕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블랙 템플에 가보았다. 절이 아니라 거대한 검은 돌탑이었다. 주변에 쇠사슬을 쳐놓았다. 안에는 잔디를 심어 놓았다. 겉만 보고 지나갔다.

절을 찾아 갔다. 여러 가지 문구가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나무아미타불과 심상사성이란 말이 있었다. 나무아미타불은 부처님께 귀의 해서 극락정토에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심상사성은 뜻을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알아보았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으면 먼저 마음 속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은 블랙 템플을 거쳐서 왔다. 안의 잔디밭 그늘에 누었다. 잠이 들었다. 얼굴이 따끈하여 눈을 떴다. 햇빛이 얼굴에 와있었다. 탑은 원형이어서 그늘이 금방 비껴가 버렸다. 몸을 돌려서 그늘로 이동했다. 금방 햇빛이 얼굴에 닿았다. 또 몸을 돌려서 그늘로 갔다. 한참을 자다 보니 영 햇빛이 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라오스의 팍세…제3의 도시인데…

팍세

팍세는 캄보디아의 씨엠립에서 제일 가까운 라오스의 도시다. 해외 여행시 한 지점으로 부터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육로 가는 방법이 가장 흔하다. 그러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을 때가 있다.

씨엠립으로 부터 이름 모를 회사의 비행기를 타고 팍세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타면 10시간이 걸리는데 비행기는 한 시간에 도착하였다. 탑승객 중에 배낭을 맨 사람은 나 혼자 뿐 이었다.

공항 이민국 직원이 미화 35달러를 받고 커다란 비자를 여권에 붙여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택시도 없고 버스도 없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청소하는 아줌마에게 호스텔 주소를 보여 주면서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 하였다.

아주머니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라오스 돈 2만킵을 주었다. 말없이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미화 1달러는 8000킵이니까 20000킵은 미화로 3달러쯤 되었다.

호스텔은 메콩 강가에 있었다. 이 호스텔은 호스텔이 아니라 호텔이었다. 독방을 나에게 주었다. 2층과 3층은 호텔 방이고 1층은 음식점으로 사용 하고 있었다. 주인 남자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고 주인 여자는 홀을 관리하고 있었다.

세 살 난 아들이 있는데 내 지팡이를 가지고 놀기 좋아하였다. 여기는 라오스인데 주인이나 종업원들은 모두 월남 사람들이었다. 라오스는 월남보다 경쟁이 덜 심하다고 말하였다. 주인 여자는 라오스 말을 유창하게 하였다.

동남아에 대한 속담이 생각났다. 월남사람들은 벼를 심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며 라오스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얼른 듣기에는 라오스 사람들은 게으르다 말같이 들린다. 그러나 참뜻은 모든 나라 국민들은 기후와 풍토에 맞게 살아 간다는 뜻이다. 라오스는 월남이나 캄보디아 보다 더 더웠다.

팍세는 옛날에 참파삭이라는 왕국의 수도 이었다. 뒤에 라오스와 합병하였고 지금은 라오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는 9만명이다. 걸어서 시내로 갔다. 쎄도네 강으로 갔다. 다리 건너에 커다란 부처의 좌상이 보였다.

다리 이름을 써 붙여 놓았다. 라오스 – 니뽕 다리였다. 니뽕은 일본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은 이 다리를 놓아준 대가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라오스로부터 챙기고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는 길었다. 다리 밑의 그늘에서 잤다. 돌아올 때는 툭툭 택시를 탔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주머니가 꼬치 구이를 밥하고 해서 팔았다. 즉석 김치도 만들었다. 작은 절구통에 마늘 고추 생 멸치젓을 넣고 절구로 찧고 비볐다. 이 비빈 것을 채소 위에 얹어서 밥하고 주었다. 기막히게 맛이 있었다.

재래시장에 갔다. 사방이 터지고 지붕만 있는 음식점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을 잘게 썰어서 후라이팬 같이 생긴 웍 이라는 조리기구에 담았다. 반쯤 복은 다음 채소 파 마늘 고추 가루 소금을 첨가하였다. 다 볶아지면 접시에 담아서 밥 하고 같이 손님에게 주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싶은데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여자가 쭈구미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여자가 나를 쳐다 보더니 뭐라고 말을 하였다. 나는 손님들의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저런 식으로 해달라는 뜻이었다.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참 만에 음식이 나왔다. 울고 싶었다. 쭈꾸미를 물에다 푹 삶아서 3분지 1로 쪼그라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밥 날라주는 아가씨의 손목을 잡았다. 다른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손가락으로 밥을 가르쳤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가져왔다. 쭈꾸미 삶은 것과 밥을 소금을 쳐서 먹었다.

절에 가보았다. 스피커를 통해서 염불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사람이 앓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 갔다. 돌탑이 여러 개 있었다. 여러 가지 짐승과 사람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한 면에는 사람들의 이름을 죽 적어 놓았다.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다른 면에는 얼굴 사진을 여러 장 붙여 놓아 놓았다. 죽은 사람들이었다.

호스텔 여주인을 통해서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가는 밤 버스를 예약하였다. 침대버스였다. 침대 한 칸에 두 사람씩 잔다고 했다. 혼자 자겠다고 하였더니 두 사람 요금을 내라고 하였다. 여자랑 같이 자겠다고 하였더니 안된다고 하였다. 남자는 남자끼리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잘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두 사람 요금을 지불 하고 표를 샀다. 버스는 밤 10시에 출발 한다고 하였다. 밤 9시까지 방에 있다가 버스 타러 가겠다고 하였다. 하루 밤 요금을 더 달라고 하였다. 사정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 밤 숙박비를 더 주었다.

배낭은 메고 가방은 끌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절둑 거리며 걷기 시작하였다. 누가 내 가방을 나꿔 챘다. 놀라서 쳐다 보았더니 호스텔에의 남자 종업원 이었다. 여주인이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 주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정류장에는 수 십대의 버스가 있었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호스텔 종업원이 내가 타야 할 버스도 찾아주고 짐도 침대까지 날라다 주었다. 여주인에게도 고맙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비엔티안까지는 670킬로 미터로 11시간이나 걸렸다.

캄보디아…프놈펜 씨엠립, 툭툭타고…앙코르와트

씨엠립

프놈펜에서 씨엠립 가는 길은 대단히 안 좋았다. 길이 울퉁불퉁했다. 여기저기 포장공사를 하고 있어서 버스가 산동네로 들어서서 돌아가기도 했다. 300킬로 미터를 7시간이나 걸려서 씨엠립에 도착하였다. 택시기사들이 우루루 몰려 들었다.

프놈펜에 있을 때 씨엠립 호스텔에 이메일을 보냈다. 버스 종점에서 무엇을 타고 가면 되느냐고 물어 보았다. 택시를 보내주고 다음날 앙코르 와트 구경갈 때 같은 택시를 이용하면 돈을 안 받겠다고 하였다. 캄보디아에는 툭툭 이라고 하는 택시가 일반적이다.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네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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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까지 미화 5달러 받겠다고 하였다. 앙코르와트에 가겠으니 호스텔 가는 요금을 받지 말라고 하였다. 내일 종일 툭툭을 사용하고 20달러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고 하였다.

버스 종점에서 호스텔이 있는 구도시로 가는 길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버스 트럭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들이 뿌연 먼지 속에서 뒤엉켜서 움직였다. 수 만 마리의 새가 함께 움직여도 서로 부딪치지 아니하고 잘 움직여 나가는 것과 흡사하였다.

앙코르와트는 씨엠립에서 6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제주도 크기의 10 분지 1쯤 되는 인공섬을 만들어 놓고 이 안에 여러 개의 신전을 지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앙코르 와트이다. 앙코르는 크메르어로 도시라는 뜻이고 와트는 신을 모시는 땅이라고 한다. 따라서 앙코르 와트는 신을 모셔놓은 도시라는 뜻이 되겠다.

신전은 12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르야바르만이라는 왕이 지었다. 가로 1500미터 세로 1280미터에 이르는 땅에 담을 쌓았다. 담의 높이는 4.5미터다. 담 주변의 땅을 파서 신전을 에워싸는 인공강을 만들었다. 인공강의 폭이 200미터이다. 길이는 6킬로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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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두 개가 있다. 서쪽에 석회암으로 만든 뚝방 길이 있고 동쪽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다. 방문자들은 서쪽의 뚝방 길을 걸어서 앙코르와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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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가 크메르 제국의 국교여서 신전에는 힌두교 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대표적이 신이 비시누 신으로 중앙신전에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괴되고 없다. 이 신의 특징은 무소부재하였다는 것이다.

입구 양쪽에 호랑이 같이 생긴 수호 짐승이 버티고 있었다. 이 땅 안에는 5개의 신전이 있었다.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만든 석조 건물이었다. 건물은 옆으로 넓적하게 생겼지만 중앙을 높게 만들어서 탑 이라고 불렀다.

탑들은 높이가 모두 다르다. 앞의 것이 제일 낮고 차츰 높아져서 뒤 의 것이 제일 높다. 사람과 동물들의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 되어있었다. 앙코르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고 자연과 어울러 지게 지어진 신전이다. 그리스와 로마와 이집트 의 모든 신전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한다.

앙코르와트의 한 켠에는 신전을 지을 때 만들어 놓은 인공호수가 있다. 앞에 서면 모든 신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앙코르와트의 특이한 점은 신전들이 죽음을 뜻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수르야바르만 왕이 자기의 무덤으로 사용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왕은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고 싶었던 것이다.

첫 번째 신전의 앞면 전체는 양각 조각으로 덥혀 있었다. 원숭이 조각이 많이 있었다. 단체 관광객 가이드가 설명하는 것을 엿들었다. 악마 왕이 미남으로 변신하여 사람 왕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빼앗아 갔다. 군사가 모자랐던 사람 왕은 원숭이들을 군사로 훈련시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부인을 도로 찾아왔다고 설명하였다.

앙코르와트에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많이 만났다. 이들을 따라 다니면서 한국 가이드가 설명해 주는 것을 들었다. 현지 남자 두 명이 오더니 따라 다니지 말라고 했다. 다른 한국인 단체 관광객에게로 가서 설명을 들었다. 쫓겨나면 또 다른 한국 관광객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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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신전 입구에 윗부분이 나체인 아름다운 여자 대리석 조각이 있었다. 이 여자의 젖통을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질반질 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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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에서 1 킬로 떨어진 곳에 앙코르똠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은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이라는 왕이 건축했다. 이 때는 불교시대여서 이 신전에서는 불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불상이 하도 커서 얼굴하나를 만드는데 여러 조각의 대리석을 사용 하였다. 얼굴의 부분 부분을 조각하여 서로 붙여서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

신전 내부는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미로의 구석으로 가서 늘어지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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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코스는 거대한 나무뿌리로 뒤 덥힌 신전이었다. 앙코르와 부근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신전과 마을을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뒤에 수 백년 동안 나무들이 자라서 모든 신전과 마을을 뒤덮었다. 1900년대에 와서 나무를 걷어내고 신전과 마을의 일부를 복원시켰다.

앙코르와트는 건물과 조각이 아름답고 정교하여 일생에 한 번은 꼭 와보아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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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호스텔로 프놈펜에서 헤어졌던 젊고 아름다운 그리스 아가씨 띠오도라가 찾아왔다. 씨엠립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 연필 100자루와 공책 100권을 사다 주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캄보디아의 초등학교에는 연필 없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띠오도라는 착한 처녀였다. 저녁을 사 주었다. 내일 영국으로 돌아 간다고 하였다.

씨엠립에서 라오스로 가는 육로는 길이 나쁘고 험하다. 버스를 포기하고 비행기로 라오스의 팍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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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했던 호스텔이 없고, 고비사막서 불타는 절벽을 걷다

몽골 편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 한국으로 갔다.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의 나라다.

5월의 공항 밖은 쌀쌀하였다.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시내로 들어온 기사가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호스텔월드 인터넷을 통해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다른 데로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와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나갔다.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데로 갔다.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있었다. 이름 모를 몽골 음식을 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몽골로 왔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에 가던지 아니면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고 싶었다.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 신청서를 받았지만 적는 내용이 까다롭고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야 비자가 나온다고 했다.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했다.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곧 해결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 안에 있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했다. 고비사막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돈을 내면 된다고 했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와 운전수와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했다. 다른 여행사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 반찬을 파는 코너가 있었다.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3분지 2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했다. 돈을 주자 내일아침 7시까지 오라고 하였다.

차는 짚 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왔다.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섰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았다.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다.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었다. 무엇을 보고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누라의 머리카락은 들어오는 먼지로 금새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고 김치도 먹고 된장국도 먹었다. 일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저녁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금새 사라졌다.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걱정이 된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기사가 ‘여러 번 와 보았다’고 하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몽골 원주민의 집인 게르 앞에 섰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가 나왔다.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다.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그 사람이 가르쳐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다.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가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 천막 집이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다.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 건물의 한 방에서 잤다.

다음날은 어디를 가는데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기사가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여자가 망아지 상처 난 곳에 약을 발랐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하였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다. 말랑말랑 하고 꼭지를 위에서 아래로 훑으니 젖이 쏟아졌다.

원주민들의 게르는 짚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왔다.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차보다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산양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했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앙상하게 죽은 나무 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을 달려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돌을 주어다가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갔다.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다. 나는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갔다.

계곡 입구는 봄날처럼 따뜻하고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개울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다. 절벽위로 독수리가 날고 있었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우비를 입었다. 마누라와 나는 비를 쫄딱 맞았다.

더 들어갔더니 우박이 떨어졌다.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다.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했다. 절벽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했다. 석양이 되자 햇빛을 받아서 절벽이 시뻘겋게 변했다. 장작더미가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그야말로 불타는 절벽이었다.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고 공룡 알이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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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의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에는 몽골의 전통 쇼가 있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몽골 춤을 추었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목청을 짜서 부르는 흐미라는 전통 노래도 불렀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이라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동산에 올라갔다. 커다란 간판에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분 나쁘게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옛날에 한국이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가이드가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어떤 성이 항복하지 안으면 사람의 썩은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서 성안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하였다. 징기스칸은 항복하지 않은 성이 정복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죽여 버렸다고 한다. 여자 어린이도 죽였고 개 돼지도 죽였다. 징기스칸은 질이 나쁜 사람이었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징기스칸은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잡아서 잡아서 모두 죽여버렸다고 했다.

돌아오는 날은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고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퍼 부었다.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런던에서 공짜로 전철타기 공짜로 술 먹기

런던의 1월은 춥고 매일 비가 왔다. 유스호스텔에서 3일을 지냈다. 끼어 입고 목도리도 하고 털모자도 쓰고 장갑도 끼고 나이로비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런던브리지에서 내렸다. 개트위크 공항으로 가는 국철로 바꾸어 타야 했다. 왕복표를 22파운드주고 샀다.

나이로비에서 돌아올 때 터키항공은 착륙공항을 런던 히뜨로우 공항으로 바꾸었다. 역으로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표 값의 반인 11파운드의 환불을 요청하였다. 여직원은 안된다고 하였다. 역장을 만나서 이야기 하였다. 역장은 나에게 1파운드만 주었다. 10파운드를 서비스 차지로 제한 것이었다.

런던 브리지를 걸어서 건넜다. 저 멀리 타워 브리지가 보였다. 바람이 불고 추워서 어떤 건물 로비에 들어 갔더니 경비가 나가라고 하였다. 런던 타워로 갔다. 여행객들이 있어서 나도 기다렸더니 의장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왔다.

타워 브리지 다리 밑에서 점심을 먹었다. 거위간 요리 남겨서 가지고 온 것하고 지니고 다니는 럼주를 마셨다. 벤치에는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어서 호텔의 정원석 위에 앉아서 먹었다. 알록달록한 차림을 한 경비원이 거기 앉으면 안된 다고 하였다. 나는 놀라서 얼른 일어났다. 경비원이 나를 돌 위에 다시 앉히면서 말이 ‘앉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도 늙은 동양노인 관광객이 신기해서 말을 걸어본 것 뿐’ 이라고 했다.

타워 브리지를 걸어서 건넜다.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한국관광객도 많이 있었다. 전철역으로 가다가 어떤 술집에 들렸다.

런던의 금요일은 한국의 토요일 같았다. 사람들이 12시에 퇴근했다. 사람들이 대포 집 에 모여서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들어가서 술을 마셨다. 탁자를 치우던 웨이터가 술을 조금 엎질렀다. 웨이터를 불러서 엄살을 피웠다. 내 술을 다 엎질렀으니 새 술을 갖다 달라고 하였다. 가득 찬 새 술잔을 갖다 주었다.

전철역으로 갔다. 직원을 불러서 돈이 1파운드 밖에 없으니 전철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다. 직원이 안 된다고 하였다. 역장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역장도 안 된다고 하였다. 다른 곳으로 가서 전철 문 밑으로 기어서 전철을 탔다. 분하고 술에 취해서 위험한 짓을 했다.

나이로비에서 호스텔에 이메일을 보냈었다. 예약한 비행기편이 취소 되어서 하루 늦어지니 호스텔 예약도 하루씩 순연 해달라고 부탁했다.

호스텔에 도착해서 체크인 하려고 하였더니 내 이름이 예약자 명단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예약의 전부를 지워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안되겠느냐고 했더니 3층의 썰렁한 방으로 안내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히터가 작동이 안되어서 무척 추웠다.

2층에 있는 화장실로 내려갔다. 지난번에 알게 된 아일랜드에서 온 중년 남자가 그 방은 어제 페인트 칠을 했고 히터도 꺼놓았다고 했다. 방이 몹시 추울 뿐만 아니라 페인트 냄새가 나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접수처로 내려갔다.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4층으로 나를 데려갔다. 16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까 방보다 더 추웠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 빈 방은 히터를 꺼놓는다는 것을 알았다. 또 접수처로 내려갔다. 페인트 냄새가 나는 8인용 방으로 다시 가겠다고 하였다.

페인트 냄새 나는 방에 가서 담요를 세 개나 덮고 눈을 감았다. 너무 추워서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접수처로 내려갔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접수처에는 대니라는 청년이 있었다. 나를 위 아래로 쭉 훑어 보았다. “여기는 유스호스텔이다. 젊은 사람만 오는 곳이다. 당신 같은 노인을 받아 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고 가만히 있어라”고 하였다. 기가 막혔다.

지난번 왔을 때 묵었던 그 방에 좀 넣어 줄 수 없느냐고 사정하였다. 대니는 컴퓨터를 두들겨 보더니 그 방에 침대 빈 것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그전에 왔을 때 당신은 다리가 아파서 2층 침대에 못 올라간다고 했다. 그 때 일층 침대를 주었었는데 2층 침대를 올라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올라갈 수 있다고 대답 하였다. 2층 침대에 올라가서 잤다.

몽골 Mongol

몽골 편

나는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서 한국으로 갔다. 이때 내 나이는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를 타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이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원래 내 몽골과 외 몽골로 되어있었으나 내 몽골은 중국에 흡수되었고 외 몽골만 소련의 힘을 얻어 독립하였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다.

우리는 5월의 어느 날 밤에 도착했는데 공항 밖으로 나가니 쌀쌀하였다. 환전을 한 다음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택시기사가 호스텔 주소 근처에 도착해서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기사는 이해할 수 없는 몽골말로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우리에게 내가 종이에 적어서 보여준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호스텔월드 라는 믿을만한 인터넷을 통하여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기사는 다른 여러 군데에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정신을 차려서 그렇다면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리가 묵는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 와서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물어서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시내로 갔다. 다행히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하나 있어서 이름 모를 몽고음식을 사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무작정 몽골로 왔던 터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던지 아니면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 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물어서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다. 비자 신청서를 받기는 하였으나 적는 내용이 아주 까다롭고 신청서를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나 비자가 나온다고 하였다. 더구나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우리는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나는 먼저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 부 터서 하소연하였다. 그 여자직원은 말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하면서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곳 해결되리라는 갓이었다. 나는 해결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산국가에도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여자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을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고비사막을 여행하려면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돈을 내면 된다고 하였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저렴하고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 한대와 운전수 그리고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말하였다. 늙은 나와 나의 마누라는 다른 여행사에 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 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놀라운 것은 백화점 안에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의 모든 반찬을 만들어서 파는 코너도 있었고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진열대에 있는 것은 한국에서 수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반찬은 누가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우리는 국영백화점으로 가서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삼분지 이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계약서도 없이 영수증만 받고 돈을 건 냈다. 내일아침 7시에 와서 가이드와 같이 먹을 거리도 사고 출발은 8시에 한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갔다. 차는 두껑이 있는 큰 짚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몽골의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 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우리는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선 것이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 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아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리가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고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였고 나침반도 없었다. 나는 기사가 무엇을 보고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마누라의 머리는 들어오는 흙먼지로 금새 머리가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었고 김치도 먹었고 된장국도 끓여먹었다. 일 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어느덧 황혼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마치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땅속으로 금새 사라졌다.

날은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아직도 우리가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 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여러 번 와 보았다.’ 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어느 몽골 원주민의 천막 집인 게르 앞에 섰다. 먼저 어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어른이 나왔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이 사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 말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손으로 가르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간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숙소는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해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으로 그 크기가 우리나란 전통적인 우물이 한 스무 개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게르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으나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사정을 말하고 우리는 그 건물의 어느 방에서 잤다.

다음 날 은 어디를 가는데 남자는 없고 게르 옆에서 어떤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작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망아지의 상처에 약을 바르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안는 것이다. 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나는 힘센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게르가 하나 있고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어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가이드가 뭐라고 설명을 하자 부부가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는데 말랑말랑 하였다. 젖통은 만지지 안고 젖꼭지만 위에서 아래로 죽 훑으니 젖이 아래로 분수처럼 쏟아졌다.

원주민 들의 게르는 짚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올 정도로 서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한참을 가니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짚차 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가이드 말이 산양들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하였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같이 앙상하게 죽은 나무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형형색색의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도 묶여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사막에서 돌을 주어다가 쌓여있는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또 다음날은 어디로 가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날씨가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우리더러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지만 나는 ‘에이 설마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그대로 갔다.

계곡 입구에는 봄날처럼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있었고 작은 개울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들어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고 절벽위로 이름 모를 맹금들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오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미리 챙겨가지고 온 우비를 입었지만 나와 나의 마누라는 비를 쫄딱 맞았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소낙비가 우박이 되어서 나의 머리를 강타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지만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이드 더러 그만 들어가고 돌아 가자고 보챘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몸소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하였다. 절벽은 그다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해질녘이 되자 절벽이 햇빛을 받아서 시뻘겋게 변하고 마치 장작더미에 성냥불을 갖다 댄 것처럼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가이드 말이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지만 공룡 알이 통째로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열심히 공룡 뼈나 알을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줍지 못하였다. 일확천금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도시답게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 비슷한 숙소에서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몽골의 전통 쑈 가 있었다.

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추는 몽골의 춤도 인상적 이었지만 가장 신기했던 것은 입을 크게 벌리지 아니하고 목청을 쥐어짜서 부르는 몽골의 전통음악인 흐미 라는 목 노래였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비한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자연의 소리인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 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까운 동산에 무슨 신전 같은 것이 있고 커다란 간판 같은 것도 보여서 가보기로 하였다. 올라 가보니 무슨 기념비 같은 것이 있었고 그 큰 간판에는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랍고 기분 나쁘게도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이 한때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올 때 영어가 그런대로 유창한 가이드 처녀에게 항의 하였다. 이 아가씨는 자기들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한국도 분명히 몽골의 식민지였다고 배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전술가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어떤 성이 항복을 하지 안으면 썩어가는 사람의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 서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나는 징기스칸이 항복을 하지 안는 성을 정복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여자 어린이 개 돼지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징기스칸이 썩은 시체까지 무기로 사용한 질 나쁜 사람인줄은 미쳐 몰랐다.

또 그는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모두서 잡아 죽여 버렸다고 하였다. 나는 키 작은 사람들이 성공한 예를 많이 알고 있다. 나폴레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요 히틀러나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징기스칸의 키가 얼마나 컷 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도 키 작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 량 할 수 있었다.

나는 키가 1미터 72 센티 미터이니 나도 키 작은 사람에 속한다. 나는 나를 자위한다. 나도 혹시 성공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다음날은 오다가 어떤 게르 에서 잤다. 갑자기 새 차게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우리는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몇 일을 더 묵은 뒤 서울로 왔다.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라오스 LAOS

방비엥으로부터 루앙프라방 가는 길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이었다. 거리로는 200킬로미터 이었지만 시간은 10시간이 걸렸다. 라오스에서 운행되고 있는 버스는 거의 모두 한국에서 수입한 옛날 관광버스였다. 길이 꼬불꼬불 할뿐만 아니라 외가닥 길이 대부분 이었다. 산 능선 위로 찻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능선이 너무 좁아서 버스 양쪽으로 산 골자기와 산밑의 강이 훤히 보일 정도 이었다. 버스는 시속 10 킬로미터로 갔다.

도로변에는 동네도 없었다. 어쩌다가 약간 넓은 곳이 나오면 집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농사지을 수 있는 땅도 없는데 이사람 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도로양편의 산비탈에 심어놓은 바나나가 전부였다. 화전을 일구는지 산의 곳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뿌연 하다.

루앙프라방은 절의 도시다. 옛날에는 절이 60개나 되었는데 많이 불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20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루앙프라방 이라는 말 자체가 신성한 부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구 도시 지역은 전체가 유네스코 에 인류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다고 한다.

남간강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니 산으로 올라가는 아주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순전히 돌산인데 이 돌들을 교모 하게 이용해서 절을 지어 놓았다. 암석들이 기울어져 있었고 석탑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석굴 안에는 배 나오신 앉아계신 부처님 도 있었다. 절의 이름이 왓촘씨 절 이라고 한다. 들어 갈 때 입장료 20000킵을 받았다. 이 절의 특징은 부처님께서 이 산에 오신 적이 있는데 부처님의 발자국 하나가 돌에 찍혀서 지워지지 아니하고 지금도 남아 있었다.

누각 같은 것을 지어서 부처님 발자국을 비바람을 부 터서 보호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부처님 발자국을 보았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컸다. 이렇게 큰 발을 가지신 부처님은 얼마나 크셨을 까. 또 부처님 손 바닥은 얼마나 컷을까. 여의봉을 휘두르며 재주를 부리는 손오공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간강을 따라서 나있는 킹키싸라쓰 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메콩강을 만나게 된다. 메콩강을 마주하고 아주 큰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와씨엥똥 절 이라고 한다. 동남아의 절은 다 아름다운데 라오스의 절들은 특히 더 아름답다. 지붕에는 금색 찬란한 번개모양의 기다란 문양을 세워 놓아서 절이 금방 하늘로 날아 오를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이 절에는 길이가 백 미터나 되는 긴 카누 같은 배를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열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극락 강을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라고 한다. 나는 그 배에 올라 가보았다. 내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극락에 가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도 나는 배에서 내려서 나무 그늘을 찾아가서 낮잠을 잤다. 낮잠이 극락보다 급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름 모를 꽃 잎들이 하염없이 내 가슴위로 내렸다.

시내에는 또 다른 절도 있었는데 이 절에는 황포승복을 입은 동자 스님들이 많이 있었다. 시내에는 재래 시장도 있었다. 어떤 현지인이 바나나 잎으로 싼 떡을 하나 산다. 나도 하나 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떡은 다른 떡에 비해서 값이 상당히 비쌌다. 호스텔에 와서 먹으려고 바나나 잎사귀를 벗겨보니 떡이 아니었다. 벌집의 하얀 애 벌래 가 들어있는 부분을 찐 것이었다. 나는 눈 딱 감고 맥주하고 해서 먹었다. 맛 있었다.

이 호스텔에는 젊고 아름다운 일하는 아가씨가 세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두머리 격인 조그맣고 예쁜 끼엘레 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25살 이라고 한다. 아이가 몇이나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 아이가 있다고 한다. 큰 아이가 몇 살 이냐고 물었더니 열 한 살이라고 하였다. 나는 잠 간 의아해 졌다. 그리고 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25에서 11을 빼면 얼마가 될 까. 이 아가씨가 도대체 몇 살에 애기를 낳은 거야.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이 아가씨가 웃는다.

거리의 곳곳에는 당신 몸을 가리시오 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라오스는 너무 더워서 서양 여자 아이들이 거의 벗고 다녔다. 또 거리의 어떤 곳에 하얀 거물이 있었는데 담장이 굉장히 높았다. 이 담장 높은 건물에서 늙고 아름다운 서양여자가 근사한 차를 타고 나온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경비원 에게 여기가 무엇 하는 곳이냐고 물어 보았다. 옛날에는 감옥 이었는데 개조해서 지금은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루 밤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미화 1000달러라고 한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머무는 호스텔은 하루 밤에 3달러였기 때문이었다.

또 어디를 갔더니 김삿갓식당 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한국말과 영어로 쓰여있었다. 나는 루앙 프라방에 한국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떤 중년이 좀 지난 남자분이 나왔다. 나는 혼자 루앙 프라방에 놀러 왔다고 말하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이 분은 원래 한국에서 간판 제작소를 운영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마사지 업소를 운영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했다. 그 뒤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이 적성에 안 맞아서 혼자서 월남의 사이공으로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 음식점을 개업 하셨다고 한다. 돈을 좀 벌어서 가족을 모두 사이공으로 이주 시켰다고 한다.

마누라와 자식들은 사이공에 남겨두고 혼자 루앙 프라방에 와서 김삿갓 식당을 차렸다고 한다. 손님들이 현지인들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한다. 많이는 오지는 않지만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가끔 온다고 했다. 그러면 적자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하였다. 음식은 현지 여자들을 가르쳐서 만들고 있지만 중요한 요리는 자기가 직접 한다고 하신다. 나에게 커피를 한잔 주셨다

내가 감옥을 개조해서 만든 호텔 이야기를 하였다. 하룻밤 숙박료가 1000달러면 너무 비싼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말씀 하신다. 그 전에 일본의 황태자가 여기 구경 온 적이 있는데 그분이 머 물었던 호텔은 방값이 하룻밤에 미화 3000달러였다고 말씀 하신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 분 이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 한마디가 있다. 우리는 여기 100년을 살아도 이방인 입니다. 나는 그 분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는 무수한 인종들이 살고 있고 너나 나나 다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루앙프라방은 이번 나의 동남아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처음에 도착했던 하노이로 돌아갔다.

케냐와 탄자니아

아프리카 여행 개요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가보는 것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은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11년 동안의 해외 배낭여행 중 아프리카 여행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나는 아프리카에 있는 이집트와 모로코는 벌써 갔다 왔지만 이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중동국가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아랍인들이요 종교는 이슬람교 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 까.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머리 속에 늘 그리는 아프리카 여행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여 요하네스버그 빅토리아폭포 빅토리아호수 그리고 탄자니아 와 케냐를 차례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77세가 되어버려서 나의 몸이 더 이상의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허용해 줄 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또 나는 진짜 아프리카 국가에 갔다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때 되도록이면 나의 모습을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새카만 아프리카에 서 이 일이 가능할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아니하였다. 또 아프리카를 가려면 영국 런던에서 머물렀다가 비행기를 바꾸어 타야 하는데 영국의 일월은 너무 추워서 추위를 몹시 타는 늙은 노인인 나는 도저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나의 신상을 위해서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한 마디 말이 나의 가슴을 후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해본 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나는 나의 마지막 혼자서 하는 해외 배낭여행의 목적지를 케냐와 탄자니아로 정하고 또 모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케냐와 탄자니아

2015년이 힘차게 밝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용감하게 77세가 되었다. 나는 1월 1일부터 31일 일 까지 한 달간 혼자서 배낭을 메고 아프리카 의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였다. 작년에는 석 달 동안 동남아를 여행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무릎이 많이 좋아져서 지팡이는 짚지 아니하였다. 나는 1939년 생이다. 늙은 노인인 내가 혼자서 배낭을 메고 해외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 훼어챠일드 라는 미국전자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그때 출장으로 홍콩과 미국을 가 보았다. 그 회사를 그만둔 후에 살 곳을 찾아서 또는 일 거리를 찾아서 호주 사우디 아라비아 태평양 섬 등을 전전 하였다. 그 뒤에 미국에 정착한 후로는 해외 여행의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마크 투웨인 의 말 을 접하게 된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 지면 해 본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더 후회하게 된다. 가 그것이다. 나는 늦었지만 여행을 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혼자서 여행한다. 단체 여행도 가보았고 둘이서 하는 것도 해 보았다. 단체 여행은 가이드만 따라 다녀야 되고 보여 주는 것만 보아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따라 다니는 것 같다. 둘이서 하는 여행은 현지인 이나 다른 여행객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 들어서 보는 것 외에는 별로 배우는 것이 없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백 번도 더 망설인다. 밥은 어디서 먹을지 감기는 걸리지 않을지 설사 병에는 걸리지 않을지 변비는 걸리지 않을지 개에게는 물리지 않을지 길은 잃어 버리지 않을지 내가 잘 곳을 어떻게 찾아 가야 할지 도둑은 맞지 않을지 차에 치이지는 않을지 내가 가는 곳에 병원은 있을지 강도는 당하지 않을지 등등 걱정이 태산 같다. 나는 배낭을 메고 떠나는 날까지 매일 밤 잠을 못 잔다.

그래도 나는 결국 여행을 떠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늙었으니 곧 죽을 것이다. 집에 가만이 편하게 있어도 죽고 고생 하면서 여행해도 죽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죽기 전에 세상을 보자. 사람을 만나자. 저승에 가서 말 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만들자.

나의 어린 손주는 나를 거지 여행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나는 뉴욕에 갔을 때 무숙자 수용소 에서 열흘을 잔 적이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부근의 호텔 방 값은 하루 밤에 보통 400불을 상회한다. 네 사람이 자는 호스텔 방 도 침대 하나에 100달러씩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거지 수용소를 찾아갔다.

외국 여행 때 비행기표나 호스텔 침대 값은 깍 아 주지 않는다. 오직 절약할 수 있는 길은 교통비와 음식이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 하고는 택시를 타지 않는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 할 때나 국경을 넘을 때에는 되도록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어떤 호스텔 에서는 아침 식사가 나온다. 아무리 거친 음식 이라도 다 먹도록 한다. 어떤 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마켓이 어디 있는지 또는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음식점이 있는 곳을 찾아 내야 한다. 관광객 상대 업소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 에서 미화 50전 하는 밥을 사서 세끼로 나누어 먹은 적이 있다. 혹자는 말한다. 도상국가나 가난한 나라에 가면 돈을 써야지 그 나라 경제가 살아 날것이 아니냐 라고.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나 같은 돈 없고 늙은 노인에게는 해당 무 다. 나는 돈을 아끼고 아끼어서 100개국을 여행하였다.

되도록 현지 말을 좀 배우고 현지인처럼 행동하고 현지인 같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강에 유의하고 교통사고나 강도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야 한다.

나는 1월 1일부터 1월31일 까지 한 달간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를 혼자서 배낭여행 하였다. 로스 엔젤레스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런던과 이스탄불을 거쳐서 나이로비에 도착하였다.

마사이마라 야생동물 국립동물원에서 밤새 사냥한 들소를 뜯어 먹고 있는 사자를 보았다. 근처에서 자기들의 식사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십 마리의 하이네나 도 보았다. 그 용맹하다는 마사이족 마을에도 가보았고 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서 주민의 99%가 무슬림 이라는 인도양의 잔지바르섬에 도 가보았다.

킬리만자로 산에도 가보았다. 포터를 동반한 사파리를 따라가려면 미국 돈 2000달러가 든다. 난 단돈 10불에 다녀왔다. 무릎이 아파 정상등정을 포기하고 킬리만자로 입구인 론드로스 게이트 까지만 갔다 온 것이다. 갈 때는 현지주민들이 이용하는 달라달라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오 가는 길 은 비포장이 많아 차가 몹시 흔들렸고 힘이 들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숙소인 유스호스텔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이 되었다. 사람을 짐짝처럼 많이 태워서 현지주민 여자와 코가 닿을 정도였다. 어떤 젊고 아름다운 궁둥이가 큰 여자가 내 무릎 위에 털썩 앉는 바람에 나는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년에 혼자서 아프리카를 배낭여행 한다는 것은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참으며, 사랑해서는 안될 여자를 사랑하는 일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재미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 후의 느낌

나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가기 전에 이미 다른 아프리카 국가를 가본적이 있다. 이집트 와 모로코를 가 보았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고 하기 보다는 아랍국가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종이 아랍인들 이고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나는 이미 거의100여개국을 여행 하였지만 진짜 아프리카 여행은 미루고 또 미루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지방을 여행하게 되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또 되도록이면 가난한 거지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혼자서 생전 모르는 곳을 걸어 다니기 때문에 봉변이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마이카 에 갔을 때는 얼굴과 머리를 너무 태워서 나를 현지인 취급을 하였고 아르헨티나에 여행 했을 때는 어떤 거지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 마켓이나 상점에 가면 경비가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닌 적도 있었다. 실제로 강도가 다가와서 내 모습을 보고는 돌아서서 가버린 적도 있었다.

아프리카는 영 자신이 없었다. 주민들 거의가 100% 흑인들이고 또 병도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자꾸만 뒤로 미루고 망설여 졌다. 그러나 77세가 되어버린 올해는 지금 안 가면 너무 늦어 버려서 내 일생에 아프리카 여행은 영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고 여행을 댕겨도 죽는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아프리카를 가기로 작정 하였다.

나는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기를 잘했다. 사람들은 색갈만 좀 다를 뿐이지 사는 원리는 어디나 다 똑 같다. 아프리카는 서방세계나 동방세계에 비 해서 좀 가난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더 순박하고 더 인심이 후 한 것 같았다. 또 그들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케냐 나이로비 호스텔 찾아 가는 길

해외 배낭 여행에서 제일 힘 드는 일중의 하나는 공항 이나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묵을 장소를 찾아가는 일이다. 유스호스텔을 애용한다. 값이 저렴하고 각국에서 온 젊은 배낭 족 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돔을 이용한다. 돔 이라고 하는 것은 방 하나에 침대를 여러 개 갖다 놓고 여러 사람이 같이 자는 방을 말한다. 침대는 보통 이층 삼층으로 되어있고 4인실 부 터서 20인실 까지도 있다. 이중에 침대 하나를 얻어서 자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가 따로 자는 방도 있고 혼숙 하는 방도 많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영국의 런던에 도착하였다. 아무리 컴퓨터를 검색해 보았으나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케냐까지 바로 가는 비행기는 없었다. 날이 따뜻한 케냐로 직접 가고 싶었지만 하는 수없이 추운 런던을 거쳐야 했다. 런던에서 3일을 머문 후 다른 회사의 비행기로 갈아타고 케냐를 향해서 떠났다.

나이로비 공항에 내리니 새벽 4시였다. 공항 바로 옆에 있는 음식점에서 눈을 잠 간 붙이려고 하자 새벽인데도 까만 여자 종업원이 와서 음식을 시켜 먹으라고 성화를 부린다. 배가 아직 고프지 아니하여서 음식을 시켜먹을 생각이 없었다. 구석의 빈 의자에 가서 주저 앉았다. 눈을 감았다. 또 이 여자가 와서 음식을 시켜 먹으라고 한다. 아직 시간이 되려면 멀었지만 하는 수 없이 6시에 떠나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갔다.

버스정류소에 흑인 중년 여자가 혼자 있었다. 말을 붙였다. ‘안녕 하세요’를 케냐말로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바리약콕’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외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를 그 나라 말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봉변이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지인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인사가 그 기본 이기 때문이다.

흑인 중년남자가 다가와서 나를 아는 체 한다. 누구냐고 했더니 아까 당신이 타고 온 터키항공 비행기를 자기도 타고 왔다고 말한다. 자기도 나이로비 시내로 가는데 나를 동행해 주겠다는 것이다. 백 년 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흑인 중년여자의 도움을 받아서 나이로비 시내에 가려고 마음 먹었었으나 흑인 중년남자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다 찌그러진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승객들은 나만 동양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지 흑인들이었다.

버스는 사람을 짐짝처럼 많이 태워서 숨쉬기도 어려웠다. 그 흑인 중년남자 에게 버스 비 라고 말하는 금액의 동전을 주었다.

시내버스는 고속도로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이로비 국제공항의 뒷동네를 통해서 갔다. 길은 포장이 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덩이가 군데군데 파져 있었다. 몸이 공중에 떴다가 가라앉을 때마다 어이쿠 어이쿠 하고 소리를 질러야만 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이로비의 뒷동네의 아침은 가관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검은 사람들이 먼지가 뽀얗게 이는 흙 길을 분주히 오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상 땅을 파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무엇인가 팔고 있었다.

버스가 얼마를 가다가 아주 서버린다. 손님들더러 내리라고 한다. 흑인 중년남자 에게 시내에 다 온 것 이냐고 물었더니 버스를 갈아 타야 한다고 말하였다. 흑인 중년남자는 다시 나에게 버스 비를 달라고 하였다. 아까 시내까지의 요금이라고 하는 금액을 주었는데 또 달라고 하여서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주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로 갔으면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시내를 3시간이나 걸려서 왔다.

버스 종점은 시내 중심에 있었다. 때는 이미 12시가 넘어서 배가 고팠다. 가로수 밑 그늘에 앉아서 비행기 에서 준 밥을 안 먹고 아껴서 가지고 온 것을 먹기 시작했다. 배낭과 끌고 다니는 가방을 모두 열어놓 속의 내용물들이 다 보이도록 진열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서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훔쳐 보고 있었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케냐타 병원 앞에서 내렸다. 예약한 호스텔은 마툼바토 길의 하우스 33번 이었다. 배낭을 메고 끌고 가는 가방은 끌고 가면서 모르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아니 하여서 끌고 가는 가방이 몹시 덜컥거렸다.

가게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하우스 33번지를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보았다. 배 짝 마른 흑인 중년남자가 똑바로 가다가 왼쪽으로 꼬부라져서 조금만 더 가면 나온다고 하였다.  조금 가다가 어떤 청년이 골목에서 나오길래 주소를 보여주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청년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왼쪽으로 나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고 하였다. 되돌아서 걷기 시작하였다.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지 아까 길을 가르쳐 주었던 흑인 중년남자가 뛰어왔다. 내 앞을 가로막고는 똑 바로 가라고 하였다.

길을 물으면 사람들 마다 다르게 가르쳐 준다. 어떤 사람은 이리 가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저리 가라고 말한다. 한 시간 넘게 해매 다가 간신히 하우스 33번을 찾았다. 대문에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문을 두드리니 사람이 나왔다. 말하기를 호스텔은 이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여기는 없다고 하였다. 나는 울었다.

이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승용차 한대가 왔다. 불법 택시다. 1200 케냐 쉴링을 내면 호스텔이 이사간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주고 불법 택시를 탔다. 조금 가더니 나더러 차에서 내리라고 한다. 다른 여행객이 또 그 호스텔에 찾아왔으니 태우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차를 불러서 나를 인계하겠다고 하였다.

당신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했더니 명함을 주면서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새 차가 왔다. 헌 불법택시기사는 새 불법택시 기사에게 돈을 주면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였다. 새 차를 타고 새 운전수와 함께 다시 먼 길을 떠났다.

새 불법택시는 상당시간 달렸다. 호스텔은 참으로 먼 곳으로도 이사를 갔구나 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한 시간 이나 걸려서 우리는 이사간 호스텔에 도착 하였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아프리카에서 한국 여인을 안아보다

아프리카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기가 쉽지 안았다. 딱 한 명 한국 사람을 만났다. 아루샤 에서 35 세 된 송혜숙 (가명) 이라는 여자를 만난 것이다. 그 여자는 스위스 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같은 대학교 학생 6명과 현장 답사를 왔다고 했다.

해외 배낭여행을 하다 보면 한국 사람은 만나기가 귀하기 때문에 호스텔 종업원 이나 다른 배낭 족 들이 호스텔에 묵는 다른 한국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 역시 호스텔에서 만난 알빈 이라는 학생이 미리 이야기 해 주었다. 그 여자의 사생활 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별거 하고 있었다.

여행 할 때 동양 여자 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늙은이를 무시하는 한국 젊은 여자들의 정서를 알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 거리에서 멕시칸 아가씨에게 예쁘다 라고 말하면 환하게 웃으면서 고맙다 라고 대답한다. 한국 아가씨에게 같은 말을 했다가 혼났다. ‘할아버지 지금 뭐 라고 그러 셨어요. 할아버지가 지금 몇 살인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면서 눈을 모로 뜨고 흘겨 보았다.

그 여자가 나 에게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내일은 일요일 이니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달라 달라 미니버스를 두 번 바꾸어 타고 그 여자가 한번 가본적이 있는 시골교회로 갔다. 개신교회 인데도 예배절차가 가톨릭 성당과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가대에 백인 여자가 흑인들 속에서 탄자니아 말로 같이 노래를 불렀다.

루터란 대학교 에도 갔다. 학생들이 민속음악과 춤을 선 보이고 있었다. 몇 명의 백인 남녀 학생들이 원주민인 흑인 학생들과 섞여서 같이 노래하고 춤 추고 있었다

돌아 올 때는 칼레비 라고 하는 필란드의 중년의 신사가 버스 정거장까지 짚 차로 태워다 주었다. 필란드 에는 3000개의 호수가 있다고 하였다. 여름이 되면 호수 가에 여자들이 일광욕을 즐긴다고 하였다. 옷을 모두 벗고 일광욕을 한다고 하였다. 해를 볼 수 있을 때 최대한으로 햇빛을 받는다고 했다. 여름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면서 이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송 여사 에게 물어 보았다.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과 천국을 어떻게 철석같이 믿는 것이냐 고. 그 여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고 어느 순간 매를 맞은 것처럼 온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것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나이로비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막 호스텔을 나갈 참 이었다. 송 여사가 눈을 비비고 나왔다. 작별인사를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식으로 서로 안는 인사를 하였다. 송여사가 옛날 한국 여자들이 하듯이 겸손의 몸짓으로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 여자 에게 말 하였다. 남편을 사랑 하시고 남편에게 사랑 받으세요 라고. 내가 괜한 말을 하지 않았나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