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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안옹왕 동상도 보고

비엔티안

비엔티안에 도착하니 날은 환히 밝아 있었다. 정류소는 넓었고 한쪽 켠은 전부가 음식점이었다. 음식점 전면은 문도 없이 툭 터져있었다. 맨 땅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다. 팍세에서 사온 즉석 김치밥을 먹었다. 맥주 큰 병을 하나 샀다. 밥 먹을 때 술을 먹는다. 거친 음식도 잘 넘어가기 때문이다.

호스텔을 찾아가야 한다. 버스 정류장 앞에 커다란 간판을 세워 놓았다. 비엔티안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다. 메콩강에 접해 있고 인구는 80만명이다. 비엔티안은 불란서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이름이고 라오스어로는 ‘위양짠’이라고 불렀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호스텔의 주소를 보여 주면서 어디서 버스를 타느냐고 물어 보았다. 청년 한 사람이 다가왔다. 5만킵을 주면 툭툭 택시를 태워 주겠다고 했다. 2만이면 가겠다고 하였다.

지도 있는 데로 돌아왔다. 아침도 먹었겠다 아직 시간은 이르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늘 해중으로 호스텔만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시멘트 벽에 기대 앉아서 잠을 청했다. 잠이 들려고 하는데 아까 그 청년이 와서 깨웠다. 2만킵에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툭툭에는 짐이 잔뜩 실려있고 현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었다.

호스텔 이름은 ‘시옴’이었다. 메니저의 이름은 ‘필립’이었다. 호주사람인데 여행 왔다가 주저 앉았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배낭 여행객들이 호스텔에서 일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다음 행선지로 떠날 경비를 벌고 있는 것이었다.

손님은 모두 서양 사람들이었고 동양 사람은 나 혼자였다. 동남아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배낭족은 거의가 유럽의 젊은이들이었다.

배낭 여행을 하면서 50세가 넘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호스텔에는 72세된 영국 할아버지가 와있었다. 부인과 이혼하고 울적해서 왔다고 했다. 호스텔은 친구가 말해주어서 알았다고 하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외국 여행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다. 여행이 좋아서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거나 배우자와 이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전에 여행 다닐 때는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지 안았다. 직장 컴퓨터로 비행기나 호스텔 예약을 했다. 여행책자를 이용하여 여행지 정보를 구하였다. 은퇴를 하고 삼성 태블릿을 샀다.

영국 할아버지가 태블릿 사용하는 것을 보더니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자기도 하나 사야겠다고 말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선진국 시민이 아직도 컴퓨터가 없을까. 컴퓨터가 일반화 된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메콩강으로 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장수의 동상이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허리에는 큰 칼을 차고 있었다. 오른팔을 강을 향해 뻗고 있었다. 청년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았더니 모르겠다고 하였다. 중년 신사에게 물어 보았더니 모르겠다고 하였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물어 보았더니 비엔티안 왕조의 안옹 왕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블랙 템플에 가보았다. 절이 아니라 거대한 검은 돌탑이었다. 주변에 쇠사슬을 쳐놓았다. 안에는 잔디를 심어 놓았다. 겉만 보고 지나갔다.

절을 찾아 갔다. 여러 가지 문구가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나무아미타불과 심상사성이란 말이 있었다. 나무아미타불은 부처님께 귀의 해서 극락정토에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심상사성은 뜻을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알아보았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으면 먼저 마음 속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은 블랙 템플을 거쳐서 왔다. 안의 잔디밭 그늘에 누었다. 잠이 들었다. 얼굴이 따끈하여 눈을 떴다. 햇빛이 얼굴에 와있었다. 탑은 원형이어서 그늘이 금방 비껴가 버렸다. 몸을 돌려서 그늘로 이동했다. 금방 햇빛이 얼굴에 닿았다. 또 몸을 돌려서 그늘로 갔다. 한참을 자다 보니 영 햇빛이 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라오스의 팍세…제3의 도시인데…

팍세

팍세는 캄보디아의 씨엠립에서 제일 가까운 라오스의 도시다. 해외 여행시 한 지점으로 부터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육로 가는 방법이 가장 흔하다. 그러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을 때가 있다.

씨엠립으로 부터 이름 모를 회사의 비행기를 타고 팍세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타면 10시간이 걸리는데 비행기는 한 시간에 도착하였다. 탑승객 중에 배낭을 맨 사람은 나 혼자 뿐 이었다.

공항 이민국 직원이 미화 35달러를 받고 커다란 비자를 여권에 붙여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택시도 없고 버스도 없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청소하는 아줌마에게 호스텔 주소를 보여 주면서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 하였다.

아주머니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라오스 돈 2만킵을 주었다. 말없이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미화 1달러는 8000킵이니까 20000킵은 미화로 3달러쯤 되었다.

호스텔은 메콩 강가에 있었다. 이 호스텔은 호스텔이 아니라 호텔이었다. 독방을 나에게 주었다. 2층과 3층은 호텔 방이고 1층은 음식점으로 사용 하고 있었다. 주인 남자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고 주인 여자는 홀을 관리하고 있었다.

세 살 난 아들이 있는데 내 지팡이를 가지고 놀기 좋아하였다. 여기는 라오스인데 주인이나 종업원들은 모두 월남 사람들이었다. 라오스는 월남보다 경쟁이 덜 심하다고 말하였다. 주인 여자는 라오스 말을 유창하게 하였다.

동남아에 대한 속담이 생각났다. 월남사람들은 벼를 심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며 라오스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얼른 듣기에는 라오스 사람들은 게으르다 말같이 들린다. 그러나 참뜻은 모든 나라 국민들은 기후와 풍토에 맞게 살아 간다는 뜻이다. 라오스는 월남이나 캄보디아 보다 더 더웠다.

팍세는 옛날에 참파삭이라는 왕국의 수도 이었다. 뒤에 라오스와 합병하였고 지금은 라오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는 9만명이다. 걸어서 시내로 갔다. 쎄도네 강으로 갔다. 다리 건너에 커다란 부처의 좌상이 보였다.

다리 이름을 써 붙여 놓았다. 라오스 – 니뽕 다리였다. 니뽕은 일본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은 이 다리를 놓아준 대가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라오스로부터 챙기고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는 길었다. 다리 밑의 그늘에서 잤다. 돌아올 때는 툭툭 택시를 탔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주머니가 꼬치 구이를 밥하고 해서 팔았다. 즉석 김치도 만들었다. 작은 절구통에 마늘 고추 생 멸치젓을 넣고 절구로 찧고 비볐다. 이 비빈 것을 채소 위에 얹어서 밥하고 주었다. 기막히게 맛이 있었다.

재래시장에 갔다. 사방이 터지고 지붕만 있는 음식점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을 잘게 썰어서 후라이팬 같이 생긴 웍 이라는 조리기구에 담았다. 반쯤 복은 다음 채소 파 마늘 고추 가루 소금을 첨가하였다. 다 볶아지면 접시에 담아서 밥 하고 같이 손님에게 주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싶은데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여자가 쭈구미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여자가 나를 쳐다 보더니 뭐라고 말을 하였다. 나는 손님들의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저런 식으로 해달라는 뜻이었다.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참 만에 음식이 나왔다. 울고 싶었다. 쭈꾸미를 물에다 푹 삶아서 3분지 1로 쪼그라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밥 날라주는 아가씨의 손목을 잡았다. 다른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손가락으로 밥을 가르쳤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가져왔다. 쭈꾸미 삶은 것과 밥을 소금을 쳐서 먹었다.

절에 가보았다. 스피커를 통해서 염불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사람이 앓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 갔다. 돌탑이 여러 개 있었다. 여러 가지 짐승과 사람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한 면에는 사람들의 이름을 죽 적어 놓았다.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다른 면에는 얼굴 사진을 여러 장 붙여 놓아 놓았다. 죽은 사람들이었다.

호스텔 여주인을 통해서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가는 밤 버스를 예약하였다. 침대버스였다. 침대 한 칸에 두 사람씩 잔다고 했다. 혼자 자겠다고 하였더니 두 사람 요금을 내라고 하였다. 여자랑 같이 자겠다고 하였더니 안된다고 하였다. 남자는 남자끼리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잘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두 사람 요금을 지불 하고 표를 샀다. 버스는 밤 10시에 출발 한다고 하였다. 밤 9시까지 방에 있다가 버스 타러 가겠다고 하였다. 하루 밤 요금을 더 달라고 하였다. 사정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 밤 숙박비를 더 주었다.

배낭은 메고 가방은 끌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절둑 거리며 걷기 시작하였다. 누가 내 가방을 나꿔 챘다. 놀라서 쳐다 보았더니 호스텔에의 남자 종업원 이었다. 여주인이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 주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정류장에는 수 십대의 버스가 있었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호스텔 종업원이 내가 타야 할 버스도 찾아주고 짐도 침대까지 날라다 주었다. 여주인에게도 고맙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비엔티안까지는 670킬로 미터로 11시간이나 걸렸다.

캄보디아…프놈펜 씨엠립, 툭툭타고…앙코르와트

씨엠립

프놈펜에서 씨엠립 가는 길은 대단히 안 좋았다. 길이 울퉁불퉁했다. 여기저기 포장공사를 하고 있어서 버스가 산동네로 들어서서 돌아가기도 했다. 300킬로 미터를 7시간이나 걸려서 씨엠립에 도착하였다. 택시기사들이 우루루 몰려 들었다.

프놈펜에 있을 때 씨엠립 호스텔에 이메일을 보냈다. 버스 종점에서 무엇을 타고 가면 되느냐고 물어 보았다. 택시를 보내주고 다음날 앙코르 와트 구경갈 때 같은 택시를 이용하면 돈을 안 받겠다고 하였다. 캄보디아에는 툭툭 이라고 하는 택시가 일반적이다.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네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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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까지 미화 5달러 받겠다고 하였다. 앙코르와트에 가겠으니 호스텔 가는 요금을 받지 말라고 하였다. 내일 종일 툭툭을 사용하고 20달러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고 하였다.

버스 종점에서 호스텔이 있는 구도시로 가는 길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버스 트럭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들이 뿌연 먼지 속에서 뒤엉켜서 움직였다. 수 만 마리의 새가 함께 움직여도 서로 부딪치지 아니하고 잘 움직여 나가는 것과 흡사하였다.

앙코르와트는 씨엠립에서 6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제주도 크기의 10 분지 1쯤 되는 인공섬을 만들어 놓고 이 안에 여러 개의 신전을 지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앙코르 와트이다. 앙코르는 크메르어로 도시라는 뜻이고 와트는 신을 모시는 땅이라고 한다. 따라서 앙코르 와트는 신을 모셔놓은 도시라는 뜻이 되겠다.

신전은 12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르야바르만이라는 왕이 지었다. 가로 1500미터 세로 1280미터에 이르는 땅에 담을 쌓았다. 담의 높이는 4.5미터다. 담 주변의 땅을 파서 신전을 에워싸는 인공강을 만들었다. 인공강의 폭이 200미터이다. 길이는 6킬로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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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두 개가 있다. 서쪽에 석회암으로 만든 뚝방 길이 있고 동쪽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다. 방문자들은 서쪽의 뚝방 길을 걸어서 앙코르와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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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가 크메르 제국의 국교여서 신전에는 힌두교 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대표적이 신이 비시누 신으로 중앙신전에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괴되고 없다. 이 신의 특징은 무소부재하였다는 것이다.

입구 양쪽에 호랑이 같이 생긴 수호 짐승이 버티고 있었다. 이 땅 안에는 5개의 신전이 있었다.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만든 석조 건물이었다. 건물은 옆으로 넓적하게 생겼지만 중앙을 높게 만들어서 탑 이라고 불렀다.

탑들은 높이가 모두 다르다. 앞의 것이 제일 낮고 차츰 높아져서 뒤 의 것이 제일 높다. 사람과 동물들의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 되어있었다. 앙코르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고 자연과 어울러 지게 지어진 신전이다. 그리스와 로마와 이집트 의 모든 신전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한다.

앙코르와트의 한 켠에는 신전을 지을 때 만들어 놓은 인공호수가 있다. 앞에 서면 모든 신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앙코르와트의 특이한 점은 신전들이 죽음을 뜻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수르야바르만 왕이 자기의 무덤으로 사용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왕은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고 싶었던 것이다.

첫 번째 신전의 앞면 전체는 양각 조각으로 덥혀 있었다. 원숭이 조각이 많이 있었다. 단체 관광객 가이드가 설명하는 것을 엿들었다. 악마 왕이 미남으로 변신하여 사람 왕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빼앗아 갔다. 군사가 모자랐던 사람 왕은 원숭이들을 군사로 훈련시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부인을 도로 찾아왔다고 설명하였다.

앙코르와트에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많이 만났다. 이들을 따라 다니면서 한국 가이드가 설명해 주는 것을 들었다. 현지 남자 두 명이 오더니 따라 다니지 말라고 했다. 다른 한국인 단체 관광객에게로 가서 설명을 들었다. 쫓겨나면 또 다른 한국 관광객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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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신전 입구에 윗부분이 나체인 아름다운 여자 대리석 조각이 있었다. 이 여자의 젖통을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질반질 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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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에서 1 킬로 떨어진 곳에 앙코르똠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은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이라는 왕이 건축했다. 이 때는 불교시대여서 이 신전에서는 불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불상이 하도 커서 얼굴하나를 만드는데 여러 조각의 대리석을 사용 하였다. 얼굴의 부분 부분을 조각하여 서로 붙여서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

신전 내부는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미로의 구석으로 가서 늘어지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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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코스는 거대한 나무뿌리로 뒤 덥힌 신전이었다. 앙코르와 부근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신전과 마을을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뒤에 수 백년 동안 나무들이 자라서 모든 신전과 마을을 뒤덮었다. 1900년대에 와서 나무를 걷어내고 신전과 마을의 일부를 복원시켰다.

앙코르와트는 건물과 조각이 아름답고 정교하여 일생에 한 번은 꼭 와보아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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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호스텔로 프놈펜에서 헤어졌던 젊고 아름다운 그리스 아가씨 띠오도라가 찾아왔다. 씨엠립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 연필 100자루와 공책 100권을 사다 주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캄보디아의 초등학교에는 연필 없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띠오도라는 착한 처녀였다. 저녁을 사 주었다. 내일 영국으로 돌아 간다고 하였다.

씨엠립에서 라오스로 가는 육로는 길이 나쁘고 험하다. 버스를 포기하고 비행기로 라오스의 팍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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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공짜로 전철타기 공짜로 술 먹기

런던의 1월은 춥고 매일 비가 왔다. 유스호스텔에서 3일을 지냈다. 끼어 입고 목도리도 하고 털모자도 쓰고 장갑도 끼고 나이로비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런던브리지에서 내렸다. 개트위크 공항으로 가는 국철로 바꾸어 타야 했다. 왕복표를 22파운드주고 샀다.

나이로비에서 돌아올 때 터키항공은 착륙공항을 런던 히뜨로우 공항으로 바꾸었다. 역으로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표 값의 반인 11파운드의 환불을 요청하였다. 여직원은 안된다고 하였다. 역장을 만나서 이야기 하였다. 역장은 나에게 1파운드만 주었다. 10파운드를 서비스 차지로 제한 것이었다.

런던 브리지를 걸어서 건넜다. 저 멀리 타워 브리지가 보였다. 바람이 불고 추워서 어떤 건물 로비에 들어 갔더니 경비가 나가라고 하였다. 런던 타워로 갔다. 여행객들이 있어서 나도 기다렸더니 의장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왔다.

타워 브리지 다리 밑에서 점심을 먹었다. 거위간 요리 남겨서 가지고 온 것하고 지니고 다니는 럼주를 마셨다. 벤치에는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어서 호텔의 정원석 위에 앉아서 먹었다. 알록달록한 차림을 한 경비원이 거기 앉으면 안된 다고 하였다. 나는 놀라서 얼른 일어났다. 경비원이 나를 돌 위에 다시 앉히면서 말이 ‘앉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도 늙은 동양노인 관광객이 신기해서 말을 걸어본 것 뿐’ 이라고 했다.

타워 브리지를 걸어서 건넜다.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한국관광객도 많이 있었다. 전철역으로 가다가 어떤 술집에 들렸다.

런던의 금요일은 한국의 토요일 같았다. 사람들이 12시에 퇴근했다. 사람들이 대포 집 에 모여서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들어가서 술을 마셨다. 탁자를 치우던 웨이터가 술을 조금 엎질렀다. 웨이터를 불러서 엄살을 피웠다. 내 술을 다 엎질렀으니 새 술을 갖다 달라고 하였다. 가득 찬 새 술잔을 갖다 주었다.

전철역으로 갔다. 직원을 불러서 돈이 1파운드 밖에 없으니 전철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다. 직원이 안 된다고 하였다. 역장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역장도 안 된다고 하였다. 다른 곳으로 가서 전철 문 밑으로 기어서 전철을 탔다. 분하고 술에 취해서 위험한 짓을 했다.

나이로비에서 호스텔에 이메일을 보냈었다. 예약한 비행기편이 취소 되어서 하루 늦어지니 호스텔 예약도 하루씩 순연 해달라고 부탁했다.

호스텔에 도착해서 체크인 하려고 하였더니 내 이름이 예약자 명단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예약의 전부를 지워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안되겠느냐고 했더니 3층의 썰렁한 방으로 안내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히터가 작동이 안되어서 무척 추웠다.

2층에 있는 화장실로 내려갔다. 지난번에 알게 된 아일랜드에서 온 중년 남자가 그 방은 어제 페인트 칠을 했고 히터도 꺼놓았다고 했다. 방이 몹시 추울 뿐만 아니라 페인트 냄새가 나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접수처로 내려갔다.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4층으로 나를 데려갔다. 16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까 방보다 더 추웠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 빈 방은 히터를 꺼놓는다는 것을 알았다. 또 접수처로 내려갔다. 페인트 냄새가 나는 8인용 방으로 다시 가겠다고 하였다.

페인트 냄새 나는 방에 가서 담요를 세 개나 덮고 눈을 감았다. 너무 추워서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접수처로 내려갔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접수처에는 대니라는 청년이 있었다. 나를 위 아래로 쭉 훑어 보았다. “여기는 유스호스텔이다. 젊은 사람만 오는 곳이다. 당신 같은 노인을 받아 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고 가만히 있어라”고 하였다. 기가 막혔다.

지난번 왔을 때 묵었던 그 방에 좀 넣어 줄 수 없느냐고 사정하였다. 대니는 컴퓨터를 두들겨 보더니 그 방에 침대 빈 것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그전에 왔을 때 당신은 다리가 아파서 2층 침대에 못 올라간다고 했다. 그 때 일층 침대를 주었었는데 2층 침대를 올라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올라갈 수 있다고 대답 하였다. 2층 침대에 올라가서 잤다.

몽골 Mongol

몽골 편

나는 200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서 한국으로 갔다. 이때 내 나이는 65세였다. 마누라와 합류하여 비행기를 타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갔다. 몽골의 면적은 1,564,116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큰 나라이다. 인구는 적어서 300만명이다. 몽골은 원래 내 몽골과 외 몽골로 되어있었으나 내 몽골은 중국에 흡수되었고 외 몽골만 소련의 힘을 얻어 독립하였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다.

우리는 5월의 어느 날 밤에 도착했는데 공항 밖으로 나가니 쌀쌀하였다. 환전을 한 다음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택시기사가 호스텔 주소 근처에 도착해서 호스텔로 전화를 걸었다. 기사는 이해할 수 없는 몽골말로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 하더니 우리에게 내가 종이에 적어서 보여준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호스텔월드 라는 믿을만한 인터넷을 통하여 예약을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 기사는 다른 여러 군데에 전화를 해보더니 이 호스텔을 찾는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런 호스텔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기분이 참담하였으나 정신을 차려서 그렇다면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값이 비슷한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리가 묵는 호스텔에서는 아침밥을 주지 않아서 마누라와 나는 아침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 와서 스웨터와 잠바를 꺼내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물어서 울란바토르 국영백화점이 있는 시내로 갔다. 다행히 백화점 바로 옆에 음식점이 하나 있어서 이름 모를 몽고음식을 사먹었다.

마누라와 나는 사전 계획 없이 무작정 몽골로 왔던 터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비사막에 있는 불타는 절벽에 가던지 아니면 소련에 있는 바이칼호수 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물어서 소련대사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다. 비자 신청서를 받기는 하였으나 적는 내용이 아주 까다롭고 신청서를 접수시켜도 며칠 후에나 비자가 나온다고 하였다. 더구나 비자요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우리는 도로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온갖 백화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소도 있었다. 나는 먼저 혼자 있는 여자직원에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일 부 터서 하소연하였다. 그 여자직원은 말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했다고 하면서 당국에 이야기 해두었으니 곳 해결되리라는 갓이었다. 나는 해결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이미 낸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산국가에도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여자 여행 안내원에게 불타는 절벽을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불타는 절벽은 고비사막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비사막을 여행하면 자연히 볼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고비사막을 여행하려면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돈을 내면 된다고 하였다.

5박6일 일정인데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저렴하고 믿을만한 여행사에 연락해서 자동차 한대와 운전수 그리고 가이드 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말하였다. 늙은 나와 나의 마누라는 다른 여행사에 또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돈을 좀 깍 아 주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국영백화점 내부를 구경하였다. 놀라운 것은 백화점 안에 온갖 백화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의 모든 반찬을 만들어서 파는 코너도 있었고 진열대에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진열대에 있는 것은 한국에서 수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반찬은 누가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우리는 국영백화점으로 가서 여행안내 직원을 만났다. 출발 전에 요금의 삼분지 이를 내고 나머지는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계약서도 없이 영수증만 받고 돈을 건 냈다. 내일아침 7시에 와서 가이드와 같이 먹을 거리도 사고 출발은 8시에 한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갔다. 차는 두껑이 있는 큰 짚차였고 기사는 키가 훌쭉한 몽골의 중년 남자였다. 가이드는 젊고 아름다운 살색이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몽골의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과 나와 나의 아내 네 사람은 5박 6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가이드 처녀와 나의 마누라가 일주 일치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우리는 험난한 고비사막의 대장정에 나선 것이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 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안았다. 기사는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도 넣고 여분의 휘발유도 통속에 담아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리가 울란바토르 화력발전소를 지나자 인가가 뜸해졌고 곧 이어서 고비사막으로 들어섰다.

고비사막에는 길이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모래와 흙과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였고 나침반도 없었다. 나는 기사가 무엇을 보고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마누라의 머리는 들어오는 흙먼지로 금새 머리가 부옇게 되었다.

식사준비는 가이드 처녀가 하였다. 마누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밥도 먹었고 김치도 먹었고 된장국도 끓여먹었다. 일 처리는 차를 세워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았다. 어느덧 황혼이 되었다. 지평선으로 지는 해는 마치 닭이 뜨거운 해를 삼키는 것처럼 땅속으로 금새 사라졌다.

날은 어두워 가는데 기사는 아직도 우리가 묵어야 할 숙소를 못 찾고 있었다. 나는 기사에게 고비사막을 몇 번 이나 와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여러 번 와 보았다.’ 였다. 기사는 어디로 방향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차는 어느 몽골 원주민의 천막 집인 게르 앞에 섰다. 먼저 어떤 어린 남자아이가 나와보고 들어가자 건장한 남자어른이 나왔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몽골의상을 입고 있었다.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죽으로 된 치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솜을 누빈 것 같은 것 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소매가 손이 안보일 정도로 길었다.

기사는 이 사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 말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손으로 가르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간 숙소는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면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안는 곳에 있었다. 숙소는 두 개의 조그만 영구 건물과 몇 개의 게르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해먹고 게르 한 채를 숙소로 배당 받았다.

게르는 둥그런 원형으로 그 크기가 우리나란 전통적인 우물이 한 스무 개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붕은 중앙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구멍을 닫을 수 있는 가죽 조각도 있었다. 게르는 전체가 가죽이나 양탄자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게르 안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으나 춥고 썰렁하였다. 나의 마누라가 여기는 너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기사와 가이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사정을 말하고 우리는 그 건물의 어느 방에서 잤다.

다음 날 은 어디를 가는데 남자는 없고 게르 옆에서 어떤 중년여자와 어린아이가 작은 망아지 한 마리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아지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안았다. 망아지의 상처에 약을 바르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안는 것이다. 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망아지를 잡아서 땅에다 매다 꽂았다. 나는 힘센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게르가 하나 있고 울안에 염소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어떤 젊은 부부가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가이드가 뭐라고 설명을 하자 부부가 나더러 염소 젖을 짜 보라고 하였다. 염소 젖은 배의 뒷부분에 두 개가 있었는데 말랑말랑 하였다. 젖통은 만지지 안고 젖꼭지만 위에서 아래로 죽 훑으니 젖이 아래로 분수처럼 쏟아졌다.

원주민 들의 게르는 짚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나씩 나올 정도로 서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한참을 가니 한 무리의 산양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짚차 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가이드 말이 산양들은 법적으로 못 잡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몰래 잡아서 해먹는다고 하였다.

다음날은 또 어디를 가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같이 앙상하게 죽은 나무주변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형형색색의 헝겊자락을 매달아 놓았다. 헝겊자락에는 돈도 묶여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더러 사막에서 돌을 주어다가 쌓여있는 돌 위에 올려놓고 헝겊에 돈을 매달고 소원을 빌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또 다음날은 어디로 가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계곡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날씨가 화창하고 더웠는데도 가이드는 우리더러 겨울 옷을 준비해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갖고 갔지만 나는 ‘에이 설마 이렇게 더운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그대로 갔다.

계곡 입구에는 봄날처럼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있었고 작은 개울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들어 갈수록 계곡은 좁아졌고 절벽위로 이름 모를 맹금들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오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는 미리 챙겨가지고 온 우비를 입었지만 나와 나의 마누라는 비를 쫄딱 맞았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소낙비가 우박이 되어서 나의 머리를 강타하였다. 나의 마누라는 겨울 옷을 꺼내 입었지만 나는 오들오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이드 더러 그만 들어가고 돌아 가자고 보챘다. 나는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계곡 입구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봄 날씨였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몸소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다음날 우리는 불타는 절벽에 도착하였다. 절벽은 그다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해질녘이 되자 절벽이 햇빛을 받아서 시뻘겋게 변하고 마치 장작더미에 성냥불을 갖다 댄 것처럼 활활 타는 듯 하였다. 가이드 말이 이곳은 공룡 뼈도 나왔지만 공룡 알이 통째로 화석으로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열심히 공룡 뼈나 알을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줍지 못하였다. 일확천금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몽골의 옛 수도인 카라코름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도시답게 인가도 많이 있었고 건물도 있었고 옛 성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 비슷한 숙소에서 폭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몽골의 전통 쑈 가 있었다.

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추는 몽골의 춤도 인상적 이었지만 가장 신기했던 것은 입을 크게 벌리지 아니하고 목청을 쥐어짜서 부르는 몽골의 전통음악인 흐미 라는 목 노래였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비한 창법이었다. 이 노래는 자연의 소리인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흉내 낸 것 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까운 동산에 무슨 신전 같은 것이 있고 커다란 간판 같은 것도 보여서 가보기로 하였다. 올라 가보니 무슨 기념비 같은 것이 있었고 그 큰 간판에는 옛날의 몽골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에는 소련과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의 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랍고 기분 나쁘게도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이 한때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올 때 영어가 그런대로 유창한 가이드 처녀에게 항의 하였다. 이 아가씨는 자기들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한국도 분명히 몽골의 식민지였다고 배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기스칸은 세계에서 최초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전술가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어떤 성이 항복을 하지 안으면 썩어가는 사람의 시체를 성안으로 집어 던져 서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가르쳐주었다.

나는 징기스칸이 항복을 하지 안는 성을 정복하면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여자 어린이 개 돼지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징기스칸이 썩은 시체까지 무기로 사용한 질 나쁜 사람인줄은 미쳐 몰랐다.

또 그는 자기보다 키 큰 남자를 모두서 잡아 죽여 버렸다고 하였다. 나는 키 작은 사람들이 성공한 예를 많이 알고 있다. 나폴레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요 히틀러나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징기스칸의 키가 얼마나 컷 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도 키 작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 량 할 수 있었다.

나는 키가 1미터 72 센티 미터이니 나도 키 작은 사람에 속한다. 나는 나를 자위한다. 나도 혹시 성공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다음날은 오다가 어떤 게르 에서 잤다. 갑자기 새 차게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 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고비사막에도 이렇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우리는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나와 나의 마누라는 몇 일을 더 묵은 뒤 서울로 왔다.

케냐와 탄자니아

아프리카 여행 개요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가보는 것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은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11년 동안의 해외 배낭여행 중 아프리카 여행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나는 아프리카에 있는 이집트와 모로코는 벌써 갔다 왔지만 이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중동국가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아랍인들이요 종교는 이슬람교 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 까.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머리 속에 늘 그리는 아프리카 여행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여 요하네스버그 빅토리아폭포 빅토리아호수 그리고 탄자니아 와 케냐를 차례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77세가 되어버려서 나의 몸이 더 이상의 혼자서 하는 배낭여행을 허용해 줄 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또 나는 진짜 아프리카 국가에 갔다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때 되도록이면 나의 모습을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새카만 아프리카에 서 이 일이 가능할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아니하였다. 또 아프리카를 가려면 영국 런던에서 머물렀다가 비행기를 바꾸어 타야 하는데 영국의 일월은 너무 추워서 추위를 몹시 타는 늙은 노인인 나는 도저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나의 신상을 위해서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한 마디 말이 나의 가슴을 후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해본 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나는 나의 마지막 혼자서 하는 해외 배낭여행의 목적지를 케냐와 탄자니아로 정하고 또 모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케냐와 탄자니아

2015년이 힘차게 밝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용감하게 77세가 되었다. 나는 1월 1일부터 31일 일 까지 한 달간 혼자서 배낭을 메고 아프리카 의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였다. 작년에는 석 달 동안 동남아를 여행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무릎이 많이 좋아져서 지팡이는 짚지 아니하였다. 나는 1939년 생이다. 늙은 노인인 내가 혼자서 배낭을 메고 해외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 훼어챠일드 라는 미국전자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그때 출장으로 홍콩과 미국을 가 보았다. 그 회사를 그만둔 후에 살 곳을 찾아서 또는 일 거리를 찾아서 호주 사우디 아라비아 태평양 섬 등을 전전 하였다. 그 뒤에 미국에 정착한 후로는 해외 여행의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마크 투웨인 의 말 을 접하게 된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 지면 해 본일 보다는 못해본 일 때문에 더 후회하게 된다. 가 그것이다. 나는 늦었지만 여행을 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혼자서 여행한다. 단체 여행도 가보았고 둘이서 하는 것도 해 보았다. 단체 여행은 가이드만 따라 다녀야 되고 보여 주는 것만 보아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따라 다니는 것 같다. 둘이서 하는 여행은 현지인 이나 다른 여행객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 들어서 보는 것 외에는 별로 배우는 것이 없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백 번도 더 망설인다. 밥은 어디서 먹을지 감기는 걸리지 않을지 설사 병에는 걸리지 않을지 변비는 걸리지 않을지 개에게는 물리지 않을지 길은 잃어 버리지 않을지 내가 잘 곳을 어떻게 찾아 가야 할지 도둑은 맞지 않을지 차에 치이지는 않을지 내가 가는 곳에 병원은 있을지 강도는 당하지 않을지 등등 걱정이 태산 같다. 나는 배낭을 메고 떠나는 날까지 매일 밤 잠을 못 잔다.

그래도 나는 결국 여행을 떠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늙었으니 곧 죽을 것이다. 집에 가만이 편하게 있어도 죽고 고생 하면서 여행해도 죽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죽기 전에 세상을 보자. 사람을 만나자. 저승에 가서 말 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만들자.

나의 어린 손주는 나를 거지 여행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나는 뉴욕에 갔을 때 무숙자 수용소 에서 열흘을 잔 적이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부근의 호텔 방 값은 하루 밤에 보통 400불을 상회한다. 네 사람이 자는 호스텔 방 도 침대 하나에 100달러씩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거지 수용소를 찾아갔다.

외국 여행 때 비행기표나 호스텔 침대 값은 깍 아 주지 않는다. 오직 절약할 수 있는 길은 교통비와 음식이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 하고는 택시를 타지 않는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 할 때나 국경을 넘을 때에는 되도록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어떤 호스텔 에서는 아침 식사가 나온다. 아무리 거친 음식 이라도 다 먹도록 한다. 어떤 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마켓이 어디 있는지 또는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음식점이 있는 곳을 찾아 내야 한다. 관광객 상대 업소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 에서 미화 50전 하는 밥을 사서 세끼로 나누어 먹은 적이 있다. 혹자는 말한다. 도상국가나 가난한 나라에 가면 돈을 써야지 그 나라 경제가 살아 날것이 아니냐 라고.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나 같은 돈 없고 늙은 노인에게는 해당 무 다. 나는 돈을 아끼고 아끼어서 100개국을 여행하였다.

되도록 현지 말을 좀 배우고 현지인처럼 행동하고 현지인 같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강에 유의하고 교통사고나 강도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야 한다.

나는 1월 1일부터 1월31일 까지 한 달간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를 혼자서 배낭여행 하였다. 로스 엔젤레스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런던과 이스탄불을 거쳐서 나이로비에 도착하였다.

마사이마라 야생동물 국립동물원에서 밤새 사냥한 들소를 뜯어 먹고 있는 사자를 보았다. 근처에서 자기들의 식사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십 마리의 하이네나 도 보았다. 그 용맹하다는 마사이족 마을에도 가보았고 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서 주민의 99%가 무슬림 이라는 인도양의 잔지바르섬에 도 가보았다.

킬리만자로 산에도 가보았다. 포터를 동반한 사파리를 따라가려면 미국 돈 2000달러가 든다. 난 단돈 10불에 다녀왔다. 무릎이 아파 정상등정을 포기하고 킬리만자로 입구인 론드로스 게이트 까지만 갔다 온 것이다. 갈 때는 현지주민들이 이용하는 달라달라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오 가는 길 은 비포장이 많아 차가 몹시 흔들렸고 힘이 들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숙소인 유스호스텔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이 되었다. 사람을 짐짝처럼 많이 태워서 현지주민 여자와 코가 닿을 정도였다. 어떤 젊고 아름다운 궁둥이가 큰 여자가 내 무릎 위에 털썩 앉는 바람에 나는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년에 혼자서 아프리카를 배낭여행 한다는 것은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참으며, 사랑해서는 안될 여자를 사랑하는 일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재미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 후의 느낌

나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가기 전에 이미 다른 아프리카 국가를 가본적이 있다. 이집트 와 모로코를 가 보았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라고 하기 보다는 아랍국가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종이 아랍인들 이고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나는 이미 거의100여개국을 여행 하였지만 진짜 아프리카 여행은 미루고 또 미루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지방을 여행하게 되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또 되도록이면 가난한 거지처럼 보이도록 애쓴다. 혼자서 생전 모르는 곳을 걸어 다니기 때문에 봉변이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마이카 에 갔을 때는 얼굴과 머리를 너무 태워서 나를 현지인 취급을 하였고 아르헨티나에 여행 했을 때는 어떤 거지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 마켓이나 상점에 가면 경비가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닌 적도 있었다. 실제로 강도가 다가와서 내 모습을 보고는 돌아서서 가버린 적도 있었다.

아프리카는 영 자신이 없었다. 주민들 거의가 100% 흑인들이고 또 병도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자꾸만 뒤로 미루고 망설여 졌다. 그러나 77세가 되어버린 올해는 지금 안 가면 너무 늦어 버려서 내 일생에 아프리카 여행은 영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고 여행을 댕겨도 죽는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아프리카를 가기로 작정 하였다.

나는 케냐 와 탄자니아를 여행하기를 잘했다. 사람들은 색갈만 좀 다를 뿐이지 사는 원리는 어디나 다 똑 같다. 아프리카는 서방세계나 동방세계에 비 해서 좀 가난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더 순박하고 더 인심이 후 한 것 같았다. 또 그들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케냐 나이로비 호스텔 찾아 가는 길

해외 배낭 여행에서 제일 힘 드는 일중의 하나는 공항 이나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묵을 장소를 찾아가는 일이다. 유스호스텔을 애용한다. 값이 저렴하고 각국에서 온 젊은 배낭 족 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돔을 이용한다. 돔 이라고 하는 것은 방 하나에 침대를 여러 개 갖다 놓고 여러 사람이 같이 자는 방을 말한다. 침대는 보통 이층 삼층으로 되어있고 4인실 부 터서 20인실 까지도 있다. 이중에 침대 하나를 얻어서 자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가 따로 자는 방도 있고 혼숙 하는 방도 많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영국의 런던에 도착하였다. 아무리 컴퓨터를 검색해 보았으나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케냐까지 바로 가는 비행기는 없었다. 날이 따뜻한 케냐로 직접 가고 싶었지만 하는 수없이 추운 런던을 거쳐야 했다. 런던에서 3일을 머문 후 다른 회사의 비행기로 갈아타고 케냐를 향해서 떠났다.

나이로비 공항에 내리니 새벽 4시였다. 공항 바로 옆에 있는 음식점에서 눈을 잠 간 붙이려고 하자 새벽인데도 까만 여자 종업원이 와서 음식을 시켜 먹으라고 성화를 부린다. 배가 아직 고프지 아니하여서 음식을 시켜먹을 생각이 없었다. 구석의 빈 의자에 가서 주저 앉았다. 눈을 감았다. 또 이 여자가 와서 음식을 시켜 먹으라고 한다. 아직 시간이 되려면 멀었지만 하는 수 없이 6시에 떠나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갔다.

버스정류소에 흑인 중년 여자가 혼자 있었다. 말을 붙였다. ‘안녕 하세요’를 케냐말로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바리약콕’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외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를 그 나라 말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봉변이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지인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인사가 그 기본 이기 때문이다.

흑인 중년남자가 다가와서 나를 아는 체 한다. 누구냐고 했더니 아까 당신이 타고 온 터키항공 비행기를 자기도 타고 왔다고 말한다. 자기도 나이로비 시내로 가는데 나를 동행해 주겠다는 것이다. 백 년 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흑인 중년여자의 도움을 받아서 나이로비 시내에 가려고 마음 먹었었으나 흑인 중년남자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다 찌그러진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승객들은 나만 동양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지 흑인들이었다.

버스는 사람을 짐짝처럼 많이 태워서 숨쉬기도 어려웠다. 그 흑인 중년남자 에게 버스 비 라고 말하는 금액의 동전을 주었다.

시내버스는 고속도로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이로비 국제공항의 뒷동네를 통해서 갔다. 길은 포장이 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덩이가 군데군데 파져 있었다. 몸이 공중에 떴다가 가라앉을 때마다 어이쿠 어이쿠 하고 소리를 질러야만 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이로비의 뒷동네의 아침은 가관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검은 사람들이 먼지가 뽀얗게 이는 흙 길을 분주히 오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상 땅을 파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무엇인가 팔고 있었다.

버스가 얼마를 가다가 아주 서버린다. 손님들더러 내리라고 한다. 흑인 중년남자 에게 시내에 다 온 것 이냐고 물었더니 버스를 갈아 타야 한다고 말하였다. 흑인 중년남자는 다시 나에게 버스 비를 달라고 하였다. 아까 시내까지의 요금이라고 하는 금액을 주었는데 또 달라고 하여서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주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로 갔으면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시내를 3시간이나 걸려서 왔다.

버스 종점은 시내 중심에 있었다. 때는 이미 12시가 넘어서 배가 고팠다. 가로수 밑 그늘에 앉아서 비행기 에서 준 밥을 안 먹고 아껴서 가지고 온 것을 먹기 시작했다. 배낭과 끌고 다니는 가방을 모두 열어놓 속의 내용물들이 다 보이도록 진열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서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훔쳐 보고 있었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케냐타 병원 앞에서 내렸다. 예약한 호스텔은 마툼바토 길의 하우스 33번 이었다. 배낭을 메고 끌고 가는 가방은 끌고 가면서 모르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아니 하여서 끌고 가는 가방이 몹시 덜컥거렸다.

가게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하우스 33번지를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보았다. 배 짝 마른 흑인 중년남자가 똑바로 가다가 왼쪽으로 꼬부라져서 조금만 더 가면 나온다고 하였다.  조금 가다가 어떤 청년이 골목에서 나오길래 주소를 보여주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청년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왼쪽으로 나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고 하였다. 되돌아서 걷기 시작하였다.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지 아까 길을 가르쳐 주었던 흑인 중년남자가 뛰어왔다. 내 앞을 가로막고는 똑 바로 가라고 하였다.

길을 물으면 사람들 마다 다르게 가르쳐 준다. 어떤 사람은 이리 가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저리 가라고 말한다. 한 시간 넘게 해매 다가 간신히 하우스 33번을 찾았다. 대문에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문을 두드리니 사람이 나왔다. 말하기를 호스텔은 이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여기는 없다고 하였다. 나는 울었다.

이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승용차 한대가 왔다. 불법 택시다. 1200 케냐 쉴링을 내면 호스텔이 이사간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주고 불법 택시를 탔다. 조금 가더니 나더러 차에서 내리라고 한다. 다른 여행객이 또 그 호스텔에 찾아왔으니 태우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차를 불러서 나를 인계하겠다고 하였다.

당신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했더니 명함을 주면서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새 차가 왔다. 헌 불법택시기사는 새 불법택시 기사에게 돈을 주면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였다. 새 차를 타고 새 운전수와 함께 다시 먼 길을 떠났다.

새 불법택시는 상당시간 달렸다. 호스텔은 참으로 먼 곳으로도 이사를 갔구나 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한 시간 이나 걸려서 우리는 이사간 호스텔에 도착 하였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영생을 생각하다

혼자서 배낭을 메고 외국을 여행해본 것은 이집트가 처음이었다. 2005년이었고 내 나이 66세였다. 환갑을 훨씬 지난 나이에 외국을 혼자서 여행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강도를 당할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둘째 아들이 그 당시 대한항공에 일하고 있었다. 어디 외국에 여행 가고 싶은 데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대한항공에 일한지가 오래되어서 가족 중 한 사람의 비행기 왕복표를 외국의 어느 나라던지 무료로 만들어 줄 수가 있다고 했다.

이집트를 택하였다. 7대 불가사의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피라미드를 보고 싶었다. 이집트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어떻게 배낭여행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현지 호스텔에 가면 젊은 배낭여행객들이 와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물어 보거나 같이 좀 다니자고 하면 되지 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였다.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가기 전에 카이로에 있는 한 호스텔에 3일밤을 예약을 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에서 비행기를 타고 두바이를 거쳐서 카이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환전소로 갔다. 한 중년남자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미화 100달러 한 장을 건 냈다. 이집트 돈을 수도 없이 많이 주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창이 있었고 밑으로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내가 받은 돈을 유리창 앞의 진열대에 좍 펴놓았다.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 장 한 장 세었다. 큰돈 한 장이 모자랐다. 환전 원을 쳐다보았다. 그는 씩 웃더니 큰돈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당신은 부자다.’ 라고 말했다.

대합실로 나왔다. 한 그룹의 한국 단체관광객들이 나왔다. 한국가이드 에게 카이로 시내까지만 버스에 같이 좀 타고 갈 수 없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가이드 말이 공항서 부 터는 현지가이드가 책임지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대합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한 중년남자가 팻말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유리창을 통해서 보였다. 팻말에는 카이로 시내 10불이라고 적혀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택시기사라고 하였다.

택시 승강장으로 갔더니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아랍 식 복장을 한 기사들도 많이 있었다. 택시에 오르려고 하자 경찰이 다가와서 여권을 보자고 하였다.

경찰은 자기 공책에 나의 모든 인적 사항을 적었다. 택시기사에게 운전면허를 달라고 하여 적었다. 택시의 번호판도 적었다.

오다가 기사가 말하였다. 경찰은 나의 안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적은 것이라고. 어찌해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택시기사가 가는 도중에 공범을 하나 더 태운 다음 사막으로 데리고 가서 짐을 뺐고 옷을 벗긴 다음 손님은 사막에 남겨두고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카이로는 공해가 심했다. 건물들과 회교사원들은 우중충한 회색이었다. 도중에 경찰이 차를 세우고 검문검색을 하였다. 기사가 오른 편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가르치면서 대통령 궁 이리고 했다. 공해가 심하니 가난한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다 같이 더러운 공기를 마실 수 밖에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가다가 기사가 왼쪽을 가르치면서 저기가 공동묘지인데 100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호스텔의 건너 편에는 맥도날드 햄버거 집이 있었다. 프론트에는 젊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숙박계를 쓰는데 이 아이가 뭐라고 하면서 나를 툭 치는 것이었다. 수속을 다 마치고 배낭을 들려고 하자 이 아이가 볼펜을 하나 주었다. 윗도리 주머니를 보았더니 있어야 할 볼펜이 없었다.

돔 방으로 안내되었다. 침대가 여덟 개 있었는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자전용 돔 방에는 여자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여자는 중년여자였고 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처녀는 페르시아 공주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통이 넓은 분홍빛 비단바지에 자주색 저고리를 받쳐입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랍국가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아가씨에게 같이 좀 다니자고 말해 볼까 하였으나 입이 떨어지지 아니 하였다.

아직도 이른 아침이라 이집트 박물관을 찾아갔다. 어떤 곳에 택시들이 많이 있었고 기사들도 있었다. 한 기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박물관에 가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박물관은 아침9시 까지만 개인 입장객을 받고 그 다음 부 터는 단체 입장객만 받는다고 했다. 구경꾼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그 사람 말을 믿지 아니하고 계속 걸었다. 길 건너 편에 커다란 주황색 건물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저것이 박물관 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거리에 경찰관 두 사람이 있어서 저것이 박물관 이냐고 물어 보았다. 이 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손을 홰홰 저었다.

양복을 입은 신사가 지나가서 물어 보았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차들은 무섭게 길 양쪽으로 전 속력으로 달렸다. 사람들은 차들 사이사이를 곡예사처럼 길을 건너갔다.

나도 한번 건너볼까 하고 시도해 보다가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 때 한 현지청년이 지나 가면서 저 앞의 그림가게로 들어가면 지하도가 있어서 건너갈 수가 있다고 했다. 반신반의 하면서 가게로 들어갔더니 지하도 같은 것은 보이지 아니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얼른 돌아서 나와 버렸다.

아까 그 청년이 되돌아 왔다. 길을 건너가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아침 9시까지만 개인 입장객을 받는다고 하면서 택시기사와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밤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인데 집이 마침 피라미드 부근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택시는 요금이 비싸니 버스를 타고 가자고 했다. 나는 망설였지만 그 청년이 거짓말 할 사람 같이 보이지 아니하여서 그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그의 이름은 ‘알리’ 라고 했다.

버스요금은 두 사람 것을 합해보아야 1000원도 안되었다. 얼마 가지 아니하여 길거리에 내렸다. 차는 손님이 원하는 어느 곳에서나 세워 주었다. 알리는 나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골목으로 들어갔다. 검은 옷을 입은 아낙네들이 먼지가 이는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같이 놀고 있었다.

알리는 계속 말을 하면서 나를 안심 시켰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 오늘 나를 안내해주면 사례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알리는 ‘돈이 뭐 그리 중요하냐’ 하면서 나를 안심 시켰다. 나는 참 친절한 이집트 청년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알리는 나에게 병물 도 사주었다.

조금 더 가니 낙타들이 앉아 있었다. 알리가 “피라미드에 갈려면 낙타를 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낙타주인을 잘 아니까 싸게 해줄 테니 낙타를 타고 피라미드에 가자.” 고 하였다. 낙타 사무실로 들어갔다. 주인은 흰 아랍 식 옷을 입고 터번을 쓰고 있었다. 실제가격은 얼마인데 많이 깍 아 주겠다고 말했다.

낙타주인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참 용감한 사람이다. 카이로에서 관광객이 많이 죽는다고 신문에 났을 텐데 어떻게 혼자서 여기까지 왔느냐?” 고 하는 것이었다.

구경꾼은 나 혼자인데 네 개의 생명체가 나를 호위하였다. 알리 와 몰이꾼 한 사람 말 한 필과 낙타 한 마리였다. 낙타 등에 올라타자 낙타가 일어섰다. 동작이 어찌나 큰지 낙타에서 떨어질 번 했다. 몰이꾼이 나를 부축하였다.

나는 낙타를 타고 갔고 알리 와 몰이꾼은 걸어서 갔다. 낙타의 걸음은 느리고 폭이 컸다. 내 몸이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얼마 가지 안아서 배가 아파서 더 이상 낙타를 타고 갈수가 없었다. 몰이꾼이 낙타를 세웠다 그리고 나를 말로 옮겨 태웠다.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말이나 낙타를 타고 신이 나게 달린다. 나는 그것이 사실인지 의심하지 안을 수 없었다.

인가 끊어지고 모래사장이 나왔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이었다. 햇볕은 사정없이 내려 쪼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모래가 나의 얼굴을 때렸다.

나는 모자라도 쓰고 있었지만 알리 와 몰이꾼은 모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햇볕이나 바람을 무서워하지 안았다. 이들은 그 이글거리는 태양에 자기들 몸을 내 맡기고 있었다. 몰이꾼이 말을 빨리 몰아서 나를 즐겁고 무섭게 만들었다. 거대한 피라미드 가 장관을 들어내고 있었다.

낙타사무실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알리는 낙타 사무실 옆에 있는 향수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나 꽃에서 채취한 향수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 나는 늙었기 때문에 향수를 줄 사람이 없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주인은 끈질기게 향수를 사라고 권하였다.

알리는 나일강으로 가서 놀자고 하였다. 그 다음에 기차정거장으로 가서 왕들의 계곡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자고 했다. 기차표는 밤에만 판다고 하면서 지금 가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도 만나보고 자기 식구들도 만나보자고 했다. 이집트인 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였기 때문에 나는 알리 의 말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택시를 탔다. 알리 가 말했다. 여동생이 다음주 결혼하는데 잔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양주와 양담배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양주와 양담배를 좋아한다고 했다. 면세점에 들려서 양주와 양담배를 사달라고 했다. 돈은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출국할 때 지장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알리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가는 도중에 알리는 한 젊은 동양청년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에 한글로 한국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알리는 이 청년도 자기가 구경 시켜 주었는데 양주와 양담배를 사 주었고 자기집에도 갔었다고 하였다

면세점 안으로 들어갔다. 알리는 주인과 싸우는 것처럼 이야기 했다. 양주와 양담배를 사주어도 출국 시 지장이 없겠느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괜찮다고 하였다. 주인은 양주 두 병과 양담배 두 보루를 꺼냈다. 서류를 작성 하더니 나더러 싸인 하라고 하였다. 여권에 물품도장을 쾅쾅 찍었다.

알리는 양주와 양담배를 가게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밖에는 뚱뚱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리는 양주와 양담배를 이 사람에게 주었다. 무엇인가 받아서 자기 주머니 속에 넣었다. 우리는 다른 택시에 올랐다. 나일강으로 간다고 하였다.

왜 술과 담배를 안 가지고 가느냐 고 알리 에게 물어보았다. 알리는 지금 돈이 없어서 물건을 맡겨 두었다가 후에 집에 가서 돈을 가지고 와서 찾아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일강에 도착하였다. 알리는 면세점까지의 택시비와 여기까지 온 택시요금을 달라고 하였다. 달라는 대로 주고 나는 더 이상의 현찰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신용카드 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돈이 있는 줄을 알면 다 쓰게 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변은 시멘트 벽으로 처리가 되어있었다. 강물은 저만치 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배가 한 척 있었고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알리는 음식을 시키고 술도 시켰다. 한 사람이 배에서 내려서 뛰어갔다. 조 금후에 맥주 네 병과 생선 튀김이 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강물은 넓고 유속이 느렸다. 커다란 호수를 항해 하는 것 같았다. 붉은 연꽃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강 가운데 커다란 섬이 있었다. 이 섬에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부자들이 사는 게지 섬이라고 하였다.

술과 음식을 먹었다. 사공은 음악을 틀었다. 알리 와 나는 노래 부르고 춤 추었다. 사공은 우리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었다. 사공이 돈을 달라고 하면 나는 면 모르는 일이라고 고 말하라고 하였다. 자기에게 이야기 하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돈을 알리가 내겠다는 뜻인가 하고 잘못 생각하였다.

강변에 닫자 알리가 나더러 미화 300달러를 달라고 하였다. 나는 아까 너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지 안았느냐고 했다. 알리는 나를 은행으로 데리고 갔다. 은행은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알리는 나를 금전 자동 출납 기로 데리고 갔다. 돈을 뽑으라고 했다.

금전 출납 기의 화면의 글자가 너무 작았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두 개의 글자가 동시에 찍혔다.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때 순찰 돌던 경관 두 명이 와서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말했다. 순경에게 말해 보았자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리 에게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내일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서 주겠다고 말했다. 알리는 밤에 여는 은행이 있으니 가보자고 했다. 그 은행도 문이 닫혀있었다. 알리는 한 그림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림가게 주인은 돈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밤은 깊었다. 지친 나는 바지안쪽 비밀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서 주어버릴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알리 와 사공이 내 몸에 거액의 돈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냥 보내 줄 지가 의심스러웠다.

알리가 택시를 잡았다. 사공도 택시에 탔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이대로 끌려 다니는 것이 나은지 반항해 보거나 탈출을 시도해 보는 것이 옳은지 생각에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알리 가 나를 이렇게 끌고 다니는 것은 내 몸에 현찰이 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해치려고 하겠는가 라고..

한참을 가다가 어디선가 섰다. 낯익은 곳이었다. 아침에 낙타를 탔던 곳이었다. 밤이 되어서 태양도 지고 서늘해 졌다.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아랍 식 복장을 한 노인들이 죽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알리는 향수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낙타 주인에게 내 신용카드로 300불을 뽑아달라고 했다. 60불의 커미션을 주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돈을 받고 나서 손가락으로 알리를 가르치면서 ‘아는 사람이냐?’ 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이 대답했다. “알리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다.”

알리 에게 이제 셈이 다 끝났으니 호스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알리가 택시를 잡았다. 사공은 돈을 다 받았는데도 또 같이 택시를 탔다. 세 사람이 탄 택시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집트에 고속도로가 있는 줄 미쳐 몰랐다.

택시는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달렸다. 호스텔로 가는 줄 알았는데 택시가 한 시간 이상을 달렸다. 알리 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다. 알리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나의 운명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한참을 더 가다가 차가 고속도로에서 내렸다. 맨 흙의 넓은 광장이 있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백열등을 수백 개켜놓고 수레에 물건들을 가뜩 싣고 팔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였다. 먼지가 뽀얗게 일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야시장이었다.

알리는 또 돈을 달라고 하였다. 아까 받은 돈 중에서 저를 주고도 우수리 돈이 나에게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머니의 돈을 털어서 다 주었다. 알리 가 택시를 잡았다. 운전수에게 얼마인지 모를 돈을 주었다. 나더러 택시를 타라고 하였다. 나는 알리 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다. 알리는 자기는 자기집에 다 왔으니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나의 볼에다 대고 뽀뽀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친구여 고맙다. 잘 가시오.”라고.

방에는 오늘밤에도 아무도 없었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써 여덟 시였다. 프론트로 갔다. 허둥대는 것을 본 어제의 그 청년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홉 시 가 지나면 박물관에 못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가 그러 드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박물관에는 돈만 내면 아무 때나 들어갈 수가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인산인해였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많이 보였다. 피라미드 속에는 죽은 왕이 저승에서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만들어 넣어두었다. 이 물건들을 꺼내서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커다란 배도 있었고 여자들이 아이 낳을 적에 사용하는 의자도 있었다. 이집트 여자들은 엉거주춤 서서 애기를 낳았다.

동물의 미이라도 수없이 많이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더니 어떤 것은 가짜 미이라 임이 판명되었다. 모양만 동물이지 나무 가지 등 거짓물건을 속에 넣고 미이라를 만든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기꾼은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그것도 감히 정부를 상대로 해서.

왕들의 미이라도 있었다. 투탕카멘 의 금으로 만든 가면은 인상적이었다. 왕의 미이라의 가슴에는 금으로 만든 풍뎅이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풍뎅이는 소 똥을 동그랗게 뭉친 다음 그 안에 알을 하나 낳고 죽는다. 알은 소 똥을 먹고 자란 다음 성충이 되어 밖으로 나온다. 죽은 풍뎅이 옆에 새로운 풍뎅이가 있으니 이집트 사람들은 풍뎅이가 부활 한 것으로 믿었다. 왕이여 부활 하소서.

나는 이집트에 정이 떨어 졌고 무서워 졌다. 호스텔 청년에게 부탁하여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청년은 택시비를 먼저 달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택시가 왔다. 청년이 택시기사에게 직접 돈을 주었다. 그라고 기사에게 공항까지 나를 태워다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한국남자가 한 사람 있었다.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분은 중국사람이었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답답한 심정을 한국여자 승무원에게 털어 놓을 수가 있었다. 한 달로 예정하고 떠났던 나의 최초의 해외 배낭여행은 이틀 만에 끝나고 말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돌아왔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 

나이로비 호스텔 여자 직원의 충고

호스텔은 세인트 헬렌 컨테이너스 니야시 라는 긴 이름의 길에 있었다. 카렌 과 갤러리아 사이만 왔다 갔다 하는 란카나 라는 이름의 마타투 미니버스 가 있었다. 호스텔 여자직원이 한번 타는데 20 쉴링 이 라고 가르쳐 주었다. 카렌 과 갤러리아 에 여러 번 갔다. 수퍼마켓 도 있고 돈 바꾸는 데 도 있고 음식 도 살수가 있었다.

버스를 탈 때 마다 여직원이 가르쳐 준 대로 20쉴링씩만 주었다. 어떤 조수는 10쉴링 을 더 달라고 하였다. 돈을 더 주기를 거절 하였다. 이 말을 여직원 에게 하였더니 돈 을 더 줄 필요가 없다고 재차 말하였다. 계속해서 싸워 가면서 까지도 20쉴링 만 주었다. 그래도 불상사는 없었다.

마사이 마라 사파리 갈 때 이 일이 생각나서 운전수 인 앙리 옥쿡 에게 물어 보았다. 그리고 놀랬다. 하루 중의 시간대에 따라서 요금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덧붙이기를 내가 만약 젊은 사람 이었으면 나를 차에서 끌어 내렸을 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이 버스를 타면 무조건 30쉴링씩 주었다.

버스는 손을 들면 아무데서나 손님을 태웠고 늘 만원이었다. 갤러리아 에 가서 술 과 먹을 것을 사가지고 버스를 탔다. 비닐봉지 하나가 거의 찰 정도였다. 봉지를 발 밑에 내려 놓았는데 이리 저리 움직였다.

옆에는 검은 늙은 할머니 가 타고 있었다. 할머니가 내 비닐 봉지를 집어 올리더니 자기 무릎 위 에 올려 놓았다. 봉지에서 먹을 것을 꺼내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할머니가 봉지의 끈을 꼭꼭 묶는다. 물건이 쏟아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봉지를 나의 무릎 위에 올려 놓는다. 봉지를 내 무릎에 대고 두 손으로 꼭꼭 누른다. 다시는 내려놓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를 쳐다 보고는 씩 웃는다.

카렌에 갔을 때다. 슈퍼마켓 에 가서 맥주 한 병 과 먹을 것을 샀다. 파킹 장 주변에 있는 상점의 계단에 가서 앉았다. 셔터 가 내려져 있었고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그늘이 좋았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술도 마셨다. 젊은 애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양 할아버지가 신기했던지 계속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가 먹고 있는 맥주병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이것을 보았는지 중년 남자가 와서 애들을 쫓아버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 주었다.

묵는 호스텔은 카렌 이라고 하는 부촌에 있었다. 나이로비 시내로 나가려면 차를 두 번 타야 했다. 란카나 미니버스를 타고 갤러리아 까지 갔다가 길을 건너서 마타투 라고 하는 미니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나이로비의 시내버스는 나이로비 기차역에 모인다. 시내의 중심이고 버스 종점이기 때문이었다.

호스텔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시내에서 멀리 있어서 주변 환경이 깨끗하고 공기가 시내보다 훨씬 맑았다. 호스텔에는 큰 정원이 있었고 커다란 나무들도 심어져 있었다. 큰 나무 두 그루 사이로 해 먹이 매어져 있어서 앉아서 놀기도 하고 낮잠도 잘 수 있었다.

호스텔 여주인은 상당한 인텔리였다. 케냐 정부기관 에서 근무 하였다고 하였다. 호스텔은 자기 것이 아니고 세 내어서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상재가 있는 여자였다. 정부에 일할 때 공무로 한국에 가본적이 있다고 하였다.

놀란 것은 한국이 옛날에는 케냐보다 더 가난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의 오른팔을 공중으로 치켜 올리면서 붕 하고 소리를 냈다. 그렇게 한국의 경제가 떠 버렸다는 것이었다.

호스텔에는 스꾸비 라는 이름의 개가 있었다. 수놈인데 환관 수술을 받았다. 상당히 큰 개였다. 오라고 해도 오지도 않고 슬슬 피하였다. 친해지려고 계속 노력 하였다. 개하고 친해지는 방법은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최고다.

밥 먹을 때 주인 몰래 고기를 조금씩 주었다. 친해졌다. 밥 먹으러 가서 테이블에 앉으면 스꾸비가 어느 틈에 나타났다. 자기의 턱을 나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마사이 마라 야생동물 국립공원에 갔다가 삼 일만에 돌아 왔는데도 잊지 않고 반가워 하였다. 꼬리를 흔들고 펄쩍 펄쩍 뛰었다.

방에는 침대가 여섯 개가 있었다. 이스라엘 청년 둘이 하루 밤을 자고 떠났다. 케냐산으로 간다고 했다. 케냐에는 세계 등산 인들이 즐겨 찾는 높은 명산들이 많이 있었다. 케냐산의 높이는 5000미터로 2800미터의 백두산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루는 불란서 청년이 들어왔다. 걱정이 태산이다. 케냐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밟는데 이민국 직원이 입국을 거절 하였다고 하였다. 여권의 만료 기한이 6개월이 채 안된 다는 것 이었다. 어느 나라를 가던지 여권의 유효기간은 최소한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청년은 불란서 여권유효기간은 10년 인데 여권을 작년에 발급 받았다고 하였다. 자기는 케냐에 올 때까지 여권의 만기일에 신경도 쓰지 안았고 쳐다 보지도 안았다고 하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 까.

청년은 8년전에 여권을 만들었다. 배낭여행을 하도 많이 다녀서 입국도장을 찍을 공간이 여권에 남아있지 안았다. 자기나라 외무부에 가서 말 했더니 새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고 하였다. 문제는 새 여권의 만기일이 구 여권의 만기일과 같았던 것이었다.

청년은 불란서 대사관에 가서 여권을 고치는 조건으로 입국을 허가 받았다고 했다. 저녁에 만났는데 풀이 죽어 있었다. 대사관이 만기일을 고쳐 주거나 연기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서효원 선생님은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백팩 하나만 메고 하신 분입니다. 본문은 전혀 손보지 않았습니다. 이해 바랍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