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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미국, 첫 해외 출장길

나는 1960년대에 훼어챠일드 라는 한국주재 미국 전자회사에서 10년 동안 일 하였다. 그 당시의 한국은 몹시 가난하였고 기술이 낙후되어있었다. 이 회사는 한국의 저렴한 임금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부품을 가져와서 완성품으로 조립하였다. 조립 품은 트랜지스터와 반도체였다. 이 제품들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그 때의 한국은 이러한 제품을 만들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훼어챠일드 회사는 그 당시 같이 들어와 있던 모토롤라 회사와 더불어 한국의 최첨단 기술산업회사로 인정 받고 있었다. 그때의 대통령은 박정희 씨였는데 하루는 우리회사에 시찰을 왔다. 품질관리 과장이었던 나는 대통령을 생산라인으로 모시고 가서 반도체의 조립과정 및 어떻게 품질을 관리하고 있는지 설명해 드렸다.

반도체의 모든 조립은 현미경 밑에서 이루어 졌다. 조립공들은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꽃다운 아가씨들이었다. 이들의 하루 임금은 그것이 얼마이었는지 액수는 잊어버렸지만 그 당시의 곰탕 한 그릇 값과 같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것도 높은 임금이었고 또 아가씨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을 때였다.

나는 회사의 명령으로 홍콩지사와 미국의 본사에 출장을 갔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국정원격인 중앙정보부 라는 국가기관이 있었다. 이때는 해외에 나가는 모든 사람은 중앙정보부에 가서 먼저 교육을 받아야 했다. 반공에 대한 교육이었다. 호텔방에 불온 서류나 서적이 놓여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모르는 사람이 접근하면 공작원일지 모르니 피하라는 것 등 이었다.

그때는 회사에 들고 다니는 가방도 변변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홍콩에 가면 007가방을 하나 사올 요량으로 한국에서 떠날 때 보자기에 서류를 싸가지고 갔다. 홍콩 국제공항에 내리니 회사직원이 마중 나와있었다. 나는 차마 이분에게 007가방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밤에 호텔을 나섰다. 007 가방을 하나 사기 위해서였다. 나는 무작정 걸었다. 무작정 이라기보다도 내가 지금 오른쪽으로 돌았으니 돌아 올 때는 왼쪽으로 돌아야지 하는 식으로 머리 속에 가는 길을 외우면서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더니 어떤 가방가게에 도착하였다.

가게에 들어섰더니 어디서 ‘아야’ 하는 젊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나는 쪽을 보았더니 젊은 남녀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갔다. 한국여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여기서 일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한국에서 홍콩에 놀러 왔다가 여기에 취직하였다고 하였다. 한국손님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 온다고 하였다. 나는 가방을 하나 샀다.

나는 돌아올 때 오른쪽 왼쪽은 잊어버려서 호텔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하도 유명한 호텔이어서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나는 해외에 나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홍콩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포도가 하도 커서 자두만 하였고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서 먹는 것도 신비로웠다. 에버딘 이라는 곳에 가보았는데 수족관에 생선을 넣어두고 내가 먹고 싶은 고기를 손으로 가르치자 꺼내서 금방 튀겨 가지고 나왔다.

돌아올 때는 어떤 공동묘지에 들려보았다. 비석에 죽은 사람의 사진을 붙여놓고 생일과 죽은 날짜를 적어 놓았다. 어떤 남자와 여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밤 어떤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중앙정보부 교육이 생각나서 그 사람은 한국에 가버리고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미국에 출장 와서는 서부에서 동부까지 여러 곳을 다녀보았다. 그때 들린 도시는 로스앤젤레스, 산호세 , 샌디에고 , 뉴포트랜드, 뉴욕, 아틀란타 등지였다. 지사가 있는 곳에서는 회사직원이 나왔으나 그렇지 않은 곳은 혼자서 다녔다. 뉴욕에서는 훼어챠일드에서 일하던 정비공이 이민 와있어서 그 집에서 하루 밤 자고 그 다음날은 그의 부인이 안내하여 자유의 여신상에 가보았다. 아틀란타 에서는 나의 막내 동생이 이민 와있어서 그 집에서 일주일 묵었다.

한번은 공중전화를 쓰는데 동전을 더 넣으라는 녹음이 나온다. 나는 전화기를 놓으면 동전이 들어가 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동전을 구하러 갔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돈이 모자랄 경우 전화기를 놓으면 넣었던 동전이 도로 나온다고 하였다.

뉴포트랜드에 가서는 바다가재라는 것을 생전처음 먹어보았다. 나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가재의 눈알까지 다 빼서 먹었다. 체하여 그 날밤 몹시 고생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 하와이에도 들렷고 일본에도 갔다. 하와이의 밤거리에 대한항공 간판이 걸려있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일본의 아다미 온천장에 혼자 갔다. 여관에 가서 기생을 청했으나 여러 곳에서 거절당하였다. 나는 그들이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차별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급해진 나는 돈뭉치를 손에 들고 기생을 청하였다. 그래도 거절 당하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기생하고 노래하고 노는 것은 일대 일의 일이 아니라 다수 대 다수의 사건이라고 하였다.

시내의 제일 비싼 호텔에 여정을 푼 나는 분을 사기지 못했다. 호텔 전화 부에 있어서 안마 녀를 불렀다. 어떤 할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돈만 주고 내 보냈다.